제 목 : 2017년 1월 8일 - 다스리는 자와 교회(롬13:3-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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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리는 자와 교회(롬13:3-5)
지난번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라고 권했다. 기독교인은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나 파괴자가 되면 안 된다. 세상의 통치자들을 세운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국가는, 신적권위를 가진 기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에 대해 말할 때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권한을 악용하는, 헤롯이나 네로, 히틀러, 김일성 같은 통치자에게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이 세웠다는 말이지, 이 권한을 가지고, 악용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악한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 사례들이 나온다. 아들을 낳으면, 다 죽이라고 했을 때나, 복음전파를 하지 못하게 막았을 때, 순종하지 않았다. 성도는 합법적인 권위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국가에 공권력을 주어서,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은 권한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더 근원적인 권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왜냐하면 통치자를 세우거나, 폐위시키는 일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합법적인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왜 국가를 허락했고, 왜 그들에게 공권력을 주셨나? 정부는 자기에게 주어진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다.
1. 선한 일을 행하며 살라(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1) 성도들이 선한 일을 하며 살면, 다스리는 자들은(아르콘, 지배하는 자),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 다스리는 자들은, 사람들이 악한 일을 했을 때에, 두려움이 된다고 했다. 선한 일을 행하며 살면, 경찰도, 검찰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운전을 하다가 경찰을 보고, 겁을 먹는 사람들이 있다. 왜 겁을 먹는가? 과속을 하거나, 신호를 어겼기에, 경찰차만 보아도, 가슴이 떨리고, 등에 땀이 나고, 머리가 아찔해 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죄를 지어서, 다스리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죄가 없다면, 당당할 수 있다. 경찰이 불러세워도, 죄가 없거나, 선한 일들을 하며 살아간다면, 그 권위에 눌리지 않고, 어디서든지 당당할 수 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이 땅의 법칙을 어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2)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고 했다. ‘선’(아가스)인데, ‘은혜, 좋은 것, 좋은 일’을 말한다. 그러면 칭찬을 받으리라고 했다. 성도들은 선을 행하여, 칭찬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좋은 지도자는 처벌과 규제보다, 아름다운 가치관을 보존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선한 일을 많이 하도록, 나라에서는 공익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포상 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훈장이나 상금으로 포상하고, 또 감사장도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스리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상을 주기보다, 처벌을 더 많이 하고, 덕을 증진시키기보다, 규제를 많이 한다. 따라서 다스리는 자들은, 처벌이나 규제보다, 포상을 개선하고,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3)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4上)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을 베풀라고 하였다. 바울은 다스리는 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불렀다(4).
‘사역자’(디아코노스)는,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성령님의 은사를 통해 시행되는, 여러 가지 사역들(가르치는 일, 다스리는 일, 구제하는 일…)을 ‘디아코노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집사를 부르지만,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를 부를 때도, 사용했다.
또한 본문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하는 일도 ‘디아코노스’라고 불렀다.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부른 것 같이,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자도 ‘하나님의 사역자’라 불렀다. 목회자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모두 다 하나님이 세운,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에, 복음전파와 진리수호의 임무를 맡겼다. 이를 감당할 수 있게, 성령님의 은사와 능력을 주었다. 하나님은 국가에도, 사회질서와 안녕을 수행할 수 있도록,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공권력을 주셨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와 정부는, 모두 하나님이 세운, 신적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부와 교회는,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정부가 교회를 반대하거나, 박해하면 안 되며, 동시에 교회도, 국가를 부정하거나, 법을 거부해도 안 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국가가 교회를 탄압하고,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는 일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모두, 교회나 정부에게, 큰 불행을 초래했다. 교회와 국가가, 다 하나님이 세운 신적 기관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로서, 국가는 국가로서, 하나님이 준 힘을 가지고, 자기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서로가 협조해야 할, 신적기관들이다.
2. 다스리는 자는,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4中).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하나님은 다스리는 자에게 준 힘을, ‘칼’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국가에 공권력, 즉 ‘칼’을 주셨다. 만일 정부가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그 정부는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축복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힘을 남용(악용)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1) 다스리는 자의 힘은,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게 ‘공권력’, 즉 ‘칼’(마카이라, 싸움, 형벌)을 주셨다. ‘칼’은 (롬8:35)에서 ‘죽음’의 의미로, (행12:2)은 ‘처형’의 뜻으로 사용되었기에, ‘악행자를 처벌하는, 힘’을 말한다.
다스리는 자는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이 공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다스리는 범죄자를 찾아서, 공정하게 재판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할 수 있는 ‘칼’을 가지고 있다. 경찰과 재판관들이, 칼을 가진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칼을 가진 것은, 악을 처벌하고 백성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한 것이다. 예전부터 고위 관리들은, 칼이나 총, 또는 지휘봉을 가지고 다녔다. 자기 휘하에 있는 군인이나,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권한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정부에도 이러한 ‘칼’을 주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칼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악을 심판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국가 통치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원수 갚는 것을 금했다.
이는 개인이, 과도한 보복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공적인 재판기관에 의해서, 공정하게 심판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국가관에, 죄를 처벌하는 힘을 주어서, 재판을 거쳐서, 죄인들을 공정하게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악을 행하는 자(호 카콘 프랏손)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에크디코스)이기 때문이다. ‘에크디코스’는 에크(~부터, ~속한)+디케(공의, 심판, 처벌) = ‘공의를 행하는 자, 벌하는 자’이다.
따라서 만일 다스리는 칼을 가지고,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다스리는 정부는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정부는 악한 일을 처벌하고, 선한 일을 포상하여, 사회에 공의가 시행되도록 해야만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먼저 다스리는 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규정해야 한다.
(2) 우리는 국가가 정한, 선악의 기준을 ‘법’이라고 한다. 국가는 정당한 방법과 절차를 따라 공정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따라, 나라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개인에게, 원수 갚는 일을 그치고 사랑하라고 명했다. 국가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의 편에 서서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
만일 정부가 부유하고, 힘 있는 자의 편에서, 가난한 자를 압제하면, 그 정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백성들에게 외면 받게 된다. 사법부가 공정하게 재판하지 않으면,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법부는 법을 시행할 때에, 양심과 법에 의해서, 공정하게 판결해야 한다.
법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으면, 국가의 공권력은, 타락의 도구가 된다. 공권력을 가지고, 법률을 집행하고, 공의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국가에게, 반드시 공의를 시행하도록 명했기에, 국가는 법을 집행함으로,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3. 성도는 양심을 위해 국가에 복종해야 한다(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오늘 많은 사람들은, 처벌이 두려워서, 법을 지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더 높은 동기에서, 정부를 인정하고,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이것을 ‘양심을 위한 복종’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만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선)과, 미워하는 일(악)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이러한 기능을 ‘양심’이라고 부른다. 양심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옳은 일을 격려하고 잘못된 일을 책망한다. 이 양심은 합법적인 국가에, 복종하는 일이 옳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을 좇아서,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우리 양심적인 판단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 양심(쉬네이데시스) ‘공통된 지각, 도적적 의식’인데, 우리 양심은, 타락하고 오염되어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완전하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성도들 안에는, 성령님이 계셔서, 양심의 기능이 올바르게 작용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양심은, 불신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양심이 옳다고 인정하는 일을,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롬9:1-2).
합법적인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일은, 성령님과 양심이, 모두 옳다고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양심을 위해, 합법적인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법을 준수해야 한다. 성도들은 이렇게 함으로,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사람들은, 점점 더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 있다. 오늘 젊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는,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잃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권위를 경시하고 있다. 사람들은 법이나 권위보다, 자기 이익이나 입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이 극대화되면, 사회는 질서를 잃고,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권위와 권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정당한 권위와 권한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마음으로 인정하고, 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무조건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그릇된 요구를 할 때에는 시정을 요구하거나, 저항운동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정부에게, 교회가 하는 일(예배, 복음전파 등)을 금할 권한을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부는 교회를 박해하여, 자기 권한을 벗어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국가에 주어진 힘을,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하며, 그 힘으로 하나님이 금한 일을, 강제로 시키면 안 된다. 국가는 강제로 성도들에게, 양심을 거스른 일을, 명할 수 없다.
만일 국가가 공권력을,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에 사용하면, 성도들은 그 일을 시정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때로는 불복종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성도들이, 국가에 불복종하는 것은, 국가보다 더 높은 권위인,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 위해서다.
다니엘은 왕이 준 음식을 먹는 일이, 양심을 거슬렀기에, 그 음식을 먹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해 주셨다. 성도들은 성령과 말씀을 통해, 양심의 판단에 조명을 받을 수 있기에, 불신자보다 선악을, 더 잘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선한 양심의 판단을 따라, 성도들은 살아가야 한다. 또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국가가 선한 길로 가도록 기도해야 하며, 선한 삶을 통해, 국가의 선을 증진시켜야 한다. 성도들은 각 분야에서 정부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할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올바른 행동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잘못했을 때는, 심판을 받을 수 있다.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올바른 통치를 해야 한다. 올바른 통치는, 법과 양심적인 행동을 통해 비춰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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