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7년 1월 1일 - 복음에 합당한 교회(살전1:5-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7-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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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합당한 교회(살전1:5-8)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어느 교회들보다, 칭찬을 많이 받았다. 많은 환란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기에, 감사와 기쁨을 표하였다. 우리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데 합당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합당은 어떤 기준, 조건, 용도, 도리 따위에 꼭 맞다. 교회는 많고, 믿는다는 종교인도 아주 많다. 십자가도 아주 흔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흐르는 교회는 보기 힘든 시대이다.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을 본받아, 복음에 합당한 교회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2017년 우리교회의 표어는, 복음에 합당한 교회이다.
1. 복음에 합당한 교회는, 성령의 확신이 있는 교회다(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말로 전한다.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말이다. 따라서 복음을 전할 때, 잘 듣는다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복음이, 말로만 전해지지 않았다. 예배 때마다, 설교를 통해서, 복음이 전하지만,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엔, 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부흥하고, 칭찬받고, 본이 되었다. 즉, 복음에 합당한 교회가 되었다. 복음이 능력과 성령으로 되었다는, 어떤 기적만을 말하지 않는다. 복음에는 구원과, 성화의 능력이 있다.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과,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능력은, 복음 이외에, 그 어디에도 없다.
복음만이 죄인을 구원시키는 능력이다. 복음이 말재주에 의지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구원을 이룬다. 따라서 복음은 능력이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면, 나도 모르게, 세상의 기쁨, 담배 맛, 술맛, 게임하는 맛, 다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해진 복음이, 성령으로 전달되었다. 사도 바울은 말의 논리에, 능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할 때, 자신들의 말재주가 아니었다. 그가 전하던 복음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임재가 있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말재주꾼들이 많이 있었다. 여행하며, 말 자랑, 지식자랑, 지혜자랑을 하며,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에 많은 순회 전도자, 순회 철학자들이, 여러 지역을 여행을 하며 다니면서,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면서, 밥을 먹고 살았다.
그러니까 그들의 직업은, 돌아다니면서, 순전히 말로, 자기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얼마나 지혜로운지, 온통 자기 이야기를 하며, 자기 자랑하며 다녔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전하던 이야기는, 그런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성령님이 그들의 입술을 주장했고, 듣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예수님만으로 구원 받게 됨을 전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이라고 전했다. 제가 설교하지만, 성령님이 저의 입술을 주장하여, 듣는 성도들의 마음을 주장해서, 능력 있는 주의 복음이 전해지고, 들려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삶이 없다면, 남을 속이고, 이용해 먹으려는 일이 될 수 있다. 말쟁이들이 복음을 전하면, 복음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고,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사단의 활동만 있을 뿐이다.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은, 큰 확신으로(엔, 안에) 전했다.
사도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 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결코 움츠려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안전을 위해, 복음전하는 일을 자제하지도 않았다. 복음에 확신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복음이라도, 내가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일행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큰 확신으로 전했다. 소리만 크게 지르는 것이, 큰 확신이 아니다. 복음만이 영혼을 살릴 수 있고, 또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면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이 있을 때, 잃어버린 영혼들만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다는, 복음의 열정과 확신으로, 활활 타올라야 한다. 이러한 모습이 될 때, 내가 알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 (5下)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던 자들의 삶이, 그대로 들어나게 되었다. 바울일행은 말로만 영혼사랑을 말하거나, 전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 몸으로 들어났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알았다.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복음의 능력과 역사는, 전하는 자가 그렇게 살 때, 확신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세상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말로만 전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교회와 성도가, 복음으로 살아야 하고, 본을 보여야 한다.
2. 복음에 합당한 교회는, 성령의 기쁨이 있는 교회다(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씀을 받을 때, 평안한 가운데서 받지 않았다. 환난 중에서, 복음을 받았다.
초대교회 당시에, 믿음의 사람들은, 거의 핍박을 당했다. 유대교 율법주의자, 헤롯당, 영지주의자, 로마황제 숭배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환난에는 내적환난과 외적환난이 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부로부터 오는, 외적 환난을 당했다.
복음을 전할 때부터, 그들이 이곳을 떠난 후에도, 핍박을 받았다. 진급한 중이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 뒤거나, 출세한 중에 아니고, 아들 낳은 후에도 아니고, 자식 출세한 후에 아니고, 환란 중에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 흔들리지 않았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넘쳤다.
누가 복음의 능력을 누리며, 사는 자나? 환란 중에도,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는 자다. 우리의 형편이 무엇이든지, 복음을 들을 때, 확신을 가지면, 성령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된다. 그러면 교회가 부흥하고, 칭찬받고 본이 되는 교회는, 저절로 부흥한다.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님은 알고 믿으나, 성령의 기쁨이 없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쁨과,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요셉의 인생을, 저주의 연속처럼 보였다. 미디안 대상에게 팔려서, 애굽에 팔렸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 옥에서 꿈 해몽을 통해, 요셉을 풀어 주기로 한 사람은, 요셉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말씀의 틀로 볼 때, 요셉을 애굽 총리로 삼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고, 물줄기를 바꾸는,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할 수 있다.
사도 바울 또한, 육체의 가시를 위하여, 3번이나 기도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말씀 없이 인생을 풀면, 저주로 보인다. 예수 안 믿는 친구는, 좋은 차를 타고, 단번에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를 다니고, 부자이다. 예수 잘 믿는 나는 중고차 타고, 대학도 떨어지고, 별 볼일 없는 회사에 다닌다.
그러나 선택된 하나님 앞에서 보면, 지금의 역경이,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 도구가 된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때문에, 하나님만을 더 의지할 수 있었다. 육체의 가시가 복이 되었다. 따라서 환경이 어렵다고, 주저 앉아있지 말고, 믿음으로 일어서기 바란다.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칭찬받고, 본이 되고, 복음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의 기초 공사가, 잘 되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달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입으로만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의 열정으로, 본이 되어야 한다. 환란 중에도,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임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복음에 합당한 교회는, 믿는 자의 본이 되는 교회다(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러므로’는 앞의 말씀의 결론으로, 하는 말씀이다. 성령의 확신이 있고, 성령의 기쁨이 있는 교회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환난 가운데서,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본’(튀포스)은, ‘음각, 도장, 자국’ 즉 ‘모델’을 말한다. 헬라는 주전146년부터, 마게도냐 주와 아가야 주, 둘로 나뉘어졌고, 로마에 정복을 당하여 통치를 받았다.
마게도냐는 지금 그리스 북부 전 지역이며, 아가야는 남부 전 지역이다. 그 당시에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아의 수도고, 고린도는 아가야의 수도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었다. 교회는 세상에 본이 되어야 하지만, 다른 교회에도 본이 되어야,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옳을지, 보여준다. 우리 교회 이름과 같이, 다운교회라는 말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 신앙생활은 이런 것이다 하고, 본이 되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배우고, 찬양하는 교회이다,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하여, 이웃을 전도하고, 봉사하며, 풍성한 교제를 이루며, 또한 물질과 아름답게 사용하기 위하여, 선교하며, 구제하는 교회가 되어, 이 시대에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주의 말씀이, 믿음의 소문이 각체에 퍼짐으로 본이 되었다. 좋은 소문을 누가 내는가? 성도들이 소문내야 한다.
이 말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소문내고 다니라는 말이 아니다. 성도들이 처해 있는 곳에서, 각자의 삶을 통해서, 불신자들이 보고, “아 저 사람은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인정만 받으면, 그 다음에는 “저 사람은 어느 교회에 다니지?”라고 궁금하며, 관심을 갖게 된다. 교회의 소문이 잘나고 못 나고는, 성도들이 얼마나,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사느냐? 못 사느냐에 달려 있다. 성도들이 교회의 삶과, 사회의 삶이 다르기에, 세상 사람들이 불신한다.
목사들이 잘못 살기에, 목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다. 그러나 목사가 조금 못 배우고 부족해도, 성도들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면 “그 교회”는 자연히 소문난다. 자식이 성공하면, 부모가 조금 부족하고, 못 배웠어도, 훌륭한 부모로 칭찬을 받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다.
광고 회사들을 보면, 우리가 놀랄 정도로, 많은 광고비를 내고, 자기 회사 상품을 알리고 있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내고, 광고를 내는가? 소문이 나서, 상품이 잘 팔리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좋은 소문이 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바로 되어야 한다.
신앙인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한다. 영적인 자가 되어야만 한다. 저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육신적인 자가 되어서, 저들의 본이 될 수 없다.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면 안 된다. 진주는 고통 가운데서 생겨난다. 다이아몬드는 시커먼 석탄 속에서 생겨난다.
아름다운 봄을 알리는 꽃은, 정원에서 피는 장미 꽃, 백합화가 아니다. 들에서 비바람과 추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난, 노란 개나리와 붉은 진달래꽃이다. 본이 되는 교회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만들어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상이군인이 간증을 하려고, 단상에 섰다. 사회자가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 분은 나라를 위하여, 한 쪽 다리를 잃으신 분입니다.” 소개를 받고 단상에 선 상이군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라를 위하여,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조국을 위해,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조국은, 내 몸과 마음 중에서, 다리 한 쪽만 받고, 그 나머지는 이미 저에게 다 돌려주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했다고 말을 하려면, 이 정도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어떤 믿음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 따라서, 교회 질이 좌우된다. 3종류의 교회가 있다. 문제가 많아, 없어졌으면 좋을 교회, 문제는 없지만,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교회, 주변 사람을 구원하고, 지역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꿈과 희망을 주는 교회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로, 본이 되는, 복음에 합당한 교회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택해서, 교회로 불러 모은 까닭은, 우리 다운교회가 좋은 소문이 나,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시대의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의 강력한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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