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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6년 12월 4일 - 이렇게 사랑하라(롬12:14-16)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6-12-04
  첨부파일:   이렇게 사랑하라.hwp(38K)

이렇게 사랑하라(12:14-1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가지고, 공동체 내에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관계는, 사랑이 지배해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다고 했다. 공동체 내에서, 서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형제들을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대접하기를 힘쓰라. 사랑의 지경을, 자꾸 넓혀가야 한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사랑은, 기독교밖에 있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먼저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히 받아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교회 공동체에서로,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해야 한다.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율로게오)고 했다. 명령형이다. 축복은 유(좋은) + 레고(말하다)에서 왔다. ‘축복은 좋은 말을 한다.’는 뜻이다.

저주하다.’(카타라오마이)도 명령형이다. 카타(아래, ~에 대하여, 반하여) + 아라(기도, 저주)에서 왔다. 따라서 저주하는 말이나, 해치려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박해자를 축복하는 일은 성도가 해야 할 일이다. 성도가 해야 할 말은, 축복하는 말이고, 금해야 할 말은, 저주하는 말이다.

성도들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선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이 명령은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명령이다.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박해하는 자’(디오콘타스), 부당하고 악독한 학대를 말한다. 우리가 악행을 해서, 받는 박해와 고통은, 벌이요, 징벌이다. 선행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 핍박이요, 박해다. 이렇게 불합리한 박해를 받을 때, 신자들의 마음속에도, 분노가 일어나기 쉽다.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면, 억울하지 않을 텐데, 잘못은커녕,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하면, 박해하는 자에게, 적개심을 품기 쉽다. 복수하고 싶은데, 복수할 힘이 없어서, 복수는 하지 못하면, 저주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살다보면,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지 않다. 때로는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런 사람들을 저주하고, 원수를 갚고 싶어진다.

우리민족은 쓴 뿌리가 많다.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신님을,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고 했다. 내가 싫어서 간다면 보내주겠지만, 너는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면서, 뒤끝이 좋지 않은 모습이다. 좋게 보내주면 되는데도, 십리도 못가서, 너는 발병이 난다고 저주한다.

(1) 왜 성도들이 박해를 받는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신자라도 육신의 생각이 남아있기에,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나올 수 있다.

같은 무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기를 원하는데, 죄악의 속성을 따라, 같은 무리에 속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한 자들과, 하나님의 자녀는 소속이 다르기에, 미움 받을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런 사람들을 저주하고 싶지만, 저주하면 안 된다.

(2)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해야 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과거에 구원받기 전에는, 그런 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도 어느 날, 우리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박해를 받을 때 축복하면, 먼저 우리 자신이 변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를 박해하던 사람도, 결국은 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모든 죄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을 것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저주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은 친히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심으로, 이 일을 실천했고, 집사 스데반도 그랬다.

우리가 한 말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10:5-6).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했다.

(3)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이러한 박해자들을 허락하는 이유?

박해자를 통해, 그동안 배웠던 믿음과 사랑의 수준을 알아보려고, 시험을 허락한다. 따라서 수준이 있는 사람에게만, 이런 박해의 시험이 나타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박해를 한 번도 안 받아 봤다면, 이는 부끄러워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해야 하겠는가? 저주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축복해야 한다. 우리에게 박해하는 자가 있음은, 그만큼 우리 믿음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고난은 축복임을 알기 바란다.

2.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라(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죄짓는 일이 아니라면, 사랑은 타인과 함께 웃고 함께 즐거워한다. 형제들의 웃음과 눈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며, 함께 한다.

어린 아이가,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 때, 나를 향하여 총을 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얘야! 총을 가지고 사람에게 겨누면 못쓴다. 그리고 그것은 장난감 총이라, 아무리 쏴도 죽지 않지만, 기분은 좋지 않으니, 쏘면 안 된다, 이렇게 가르치겠는가? 아니면 으악! 하고, 죽는 시늉을 해주는가?

함께하는 진정한 소통이요, 공감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과 소통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자신과 하나가 되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라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는, 무관심하다. 예수님도 당시 사람들의, 무관심을 질책하며, 비유를 들어 말씀했다.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웃의 일에 무관심하지 말고, 관심을 기울여 주라는 말이다. 우리 이웃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기쁜 마음으로 피리를 분다. 그러면 함께 즐거워하면서, 춤을 추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우리 이웃에게, 슬픈 일이 생겼다. 함께 울어주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 물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다. 마음속에 시기심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이러한 예들이 많다.

왜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는가? 왜 요셉의 형들이, 자기 동생 요셉을 미워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었는가? 왜 사울 왕이, 자기 신하요, 자기 사위였던 다윗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나? 모두 질투심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것도 쉽지 않다. 부패한 인간의 심성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했다. 이웃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면,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즐기는 경우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들(빌닷, 엘리바스, 소발)을 생각해 보라. 그들의 친구 욥이, 엄청난 곤경에 처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욥을 위로해 주지 못했다. 다 네 탓이라면서, 욥을 책망하면서, 오히려 욥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주었다. 우는 자로 함께, 울어 주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잘을 지적하면서, 비판하면, 그 사람이 쉽게 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가 쉽다. 일할 의욕을 상실시키고, 좌절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웃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는가? 함께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이웃에, 우는 자가 있는가? 함께 울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 입장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 맞추어 줘야 한다. 나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좋은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동정심을 가지고 안타까워한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한다. 그보다 더 진정한 친구는 내가 정말 잘 되었을 때, 정말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이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질 때, 함께 즐거워할 수 있고, 함께 슬퍼할 수 있다.

3.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라(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왜 모임이 자꾸 힘들어지는가? 마음이 서로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서로 같이 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가지 문장으로 말씀한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3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 왜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는가? 그 배후에 교만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들어내려는 생각이 깔려 있기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다.

(1)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직역하면 서로에 대해, 같은 것에 관심을 두라.’는 말이다. 성도들은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 했다. 이러한 권고들은, 성도들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안에서, 새 마음을 가지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이 된다. 이러한 마음의 공통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아니다.

(2)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남보다, 더 높이려 할 때가 많다. 종종 지위나 계급, 신분, 학력, 재물 등에 따라, 스스로 사람들을, 구분할 때가 많다.

겸손하지 않으면, 불화가 생기게 된다. 상대방을 깔아뭉개려는, 건방진 말을 하면, 금방 조화가 깨져버린다. 반면에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낮은 데 두면, 인정과 사랑을 얻을 수 있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위에 있으려는, 교만한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다. “교만은 천사를 마귀로 만들었다. 그러나 겸손은 사람을 천사로 만든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할 때, 우리는 천사같이, 온화한 모습이 된다.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서 화평할 수 있다.

마음속에 교만한 생각이, 자리 잡게 되면, 마귀처럼 된다. 우리 성도는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모니(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교만하면, 자연히 화목이 깨어질 수밖에 없고,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만하면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과, 자유롭고 친밀한 관계를 가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성도들은 결코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에 대해, 생색내려하지 말고, 마음을 낮추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참된 친구가 되어야 한다.

(3)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는 가식을 말한다. 없지만 있는 척 하는, 잘난 체다. 바울은 기독교적 사랑에 대해, 포괄적으로 묘사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히 받아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교회 공동체에서로,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한다면, 교회는 더, 행복한 공동체가 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고 싶은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성령님을 통해서, 사랑의 힘을 공급받을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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