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12월 11일 -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이겨라(롬12:17-21)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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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이겨라(롬12:17-21)
바울은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한다.
1.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아무에게도’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라도, 아무리 악한 사람들이라도, 용서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우리는 부모나 형제, 배우자에게, 깊은 상처를 받고,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 때로는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적의를 품을 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에게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다. 이는 복수하지 말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우리에게 행하면, 성질대로 하면, 내가 당한 이상 앙갚음을 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나왔다.
다른 사람을 살짝 건드렸는데, 더욱 더 크게 당한다는 말이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온 결과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악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루어갈 수 없다. 악은 언제나 더 큰 악과, 화를 가져다 줄 뿐이다. 곱빼기로, 보복할 때가 많다.
그들이 행한 것보다, 더 큰 악으로 갚아주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는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왜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 되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 된다.
초대교회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돌로 그를 쳐서 죽였다. 그때 “주여, 이 원수를 꼭 갚아 주세요. 이 죄를 저들에게 돌려서, 저들의 자손 대대로, 망하게 해 주세요.”
만일 스데반이, 이렇게 기도를 드렸더라면, 그는 위대한 순교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는 고통 속에서도, 평화의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에게 돌로 치는 그들에게, 평화를 선포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다. 그의 기도에 힘입어서, 변화된 사람이 있다. 바로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다.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스데반의 평화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다. “교회가 바울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데반 덕분이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던 스데반의 모습,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이루어낸 스데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다. 남이 악을 행했을 때에, 그들에게 똑같이 악을 행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한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행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서 죽게 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악을 행했던 자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받아주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을 통해, 선을 행할 수 있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 성도들은 복수심을 자제하고,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한다.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이 붙인 이유는, 우리가 항상 모든 사람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질 수 없을 경우가 있음을, 말해준다.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길 원하지만, 상대편에서 원하지 않거나, 들어 줄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울 때에는, 당연히 평화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로운 관계를 원하지 않아도, 성도들은 가능하다면, 그들과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마음을 열어 두어야하며, 언제라도 그들이 마음을 돌이키면, 수용할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악한 사람을 위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형제들을 넘어서, 원수들에게도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들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이외에도, 원수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두 가지 태도를 추가하고 있다.
(1) 원수를 갚지 말라!(19上).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박해한 나라 백성들을 ‘내 사랑하는 자’라고 불렀다.
이 호칭으로 로마교회 성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들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다. 왜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나? 우리는 원래, 불의한 자들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우리는 원수 갚을 권한이 없다.
그래서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권고한다.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정확히 번역하면 ‘그 진노함에, 장소(토포스)를 주라!(디도미)’이다. 우리가 원수를 심판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진노가 심판하도록, 심판의 자리를 양보하라는 의미다.
(2)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할 이유(19中).
“(왜냐하면)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신32:35a)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이다.
왜 성도들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에게 심판에 맡겨야 하는가? 죄인을 심판하는 일이, 내가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할 일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성경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 권한에 속한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때가 되면, 가장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
‘원수 갚는 것’(에크디케시스)은, ‘에크’(~로부터) + 디케(공의, 심판, 복수) = 공의, 심판, 복수인 보복과 처벌을 의미한다. ‘보복과 처벌’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할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악을 행한 자가, 처벌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악인을 처벌하는 일은, 우리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개인적인 보복을 금하고, 하나님에게 심판을 맡겨야만 한다. 그러면 공의의 하나님이, 국가 기관들이나 다른 환경들을 통해서, 악인들을 직접 심판할 것이다.
다윗이 자기의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서, 도주할 때였다. 그때 시므이라는 사울 친족이, 돌을 던지면서, 다윗을 저주했다(삼하16:5). 그러자 다윗의 신하 가운데 한 사람, 아비새가 그것을 보고, 당장 그에게 쫓아 올라가서, 머리를 베어 오겠다고 말했다. 다윗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윗은 전적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판단에 맡겼다. 하나님은 시므이에 대해, 오래 참았다. 그런데 그 시므이가, 솔로몬 왕 때에도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은 시므이를 심판했다. 왜 하나님이 시므이를 바로 그 순간에, 심판하지 않았나? 하나님은 의롭고, 공평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못난 우리를 위해, 지금까지 오래 참아 오셨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록 우리에게 어떤 악행을 행한 사람에 대해서도, 오래 참아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억울하고, 속이 상한 일을 당했다고 할지라고,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노함이 맡겨야 한다.
하나님이 오래 참는 동안에, 그 사람이 회개하면, 우리에게 와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시므이를 심판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심판할 것이다. 우리는 친히 원수를 갚을 권한이 없기에, 의로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3. 성도들이 원수들에게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씀은 잠언을 인용이다.
(잠25:21-22)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우리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원수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들이 굶주리거나, 갈할 때에, 먹고 마실 음식과, 물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저주하지 않지만, 원수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마음이 좋고, 돕지 않고 넘어가려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모르는 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원수가 고난 받을 때에, 보고 기뻐하면, 하나님이 진노하고, 그 고난을 우리에게 옮길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원수에게 선을 베풀면,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다고 했다. 숯불을 머리에 쌓아놓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① 어떤 사람은 숯불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 숯불을 머리에 쌓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더 크게, 하는 것을 말한다. ② 어떤 사람은, 숯불이 수치심이라고 말한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면, 마음에 수치심을 느끼고, 스스로 회개하도록 만든다는 의미로 본다.
원수가 고난당할 때에, 그를 도와주면, 그는 수치를 느끼고, 스스로 한 악행을, 뉘우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도 있다. 이는 은혜로, 용서받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일이다. 성도는 개인적으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심판을 맡겨야 한다.
그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갚거나, 그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돌아서, 원수가 친구가 되는 일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원수들에게도 나타낼 수 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울은 원수들에 대해, 마지막 권고를 하고 있다. ‘악에게 정복당하지 말고, 적극적인 선으로, 악을 정복하라!’고 했다. 강한 자만 할 수 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성도가 원수에 대해, 2가지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다.
① 원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대적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하면, 눈에는 살기등등하게 되고, 마음이 강퍅해진다. 그러므로 악에게 정복을 당하고, 패배하게 될 것이다. ② 원수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악을 선으로 정복할 수 있다.
우리는 원수를 대할 때, 악에게 정복당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악을 정복할 수도 있다.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을 이기는 길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과 평화를 유지하는 일은, 악을 원천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도와줌으로, 그들도 우리의 친구가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도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성도들이 원수들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사랑을 받았기에, 남에게 보여줄 수 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인하여,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을 수 있다. 우리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님을 의지하면, 능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성령님으로,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가 있다. 속상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는가?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기 바란다. 이 세상에서 누가 예수님보다도, 더 억울한 일을 당했는가? 누가 예수님보다도, 더 속상한 일을 당했겠는가? 죄 없는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다.
순전히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당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란다. 그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사랑으로 승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속에 맺힌 것, 특별히 나와 너 사이에, 응어리진 모든 것을, 남겨두지 말고,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모두 다 풀어버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모든 분들 위에 나타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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