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11월 27일 - 이웃을 향해 사랑을 나타내라(롬12:9-1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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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향해 사랑을 나타내라(롬12:9-13)
기독교인은 공동체 내에서, 건전한 판단력을 하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준,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지혜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가 되고, 한 몸을 이룬 지체들이다. 한 몸에는 각각 역할이 다른, 수많은 지체들이 있다.
그 각각의 지체들이, 제 역할을 다할 때에, 건강한 몸을 만들 수 있다. 교회도 각각 다른 은사와 역할을 맡은, 수많은 성도들이 있으며, 그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 봉사할 때에 교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 구제, 다스리는 일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제 공동체에서 나타내야 할 덕목,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배지는,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5장). 그러므로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관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인 사랑에, 초점에 맞추어 설명한다.
1. 참된 사랑의 정체성(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아가페, 하나님의 사랑, 애정, 자비)을 말한다. 앞에서 말씀한 다양한 은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가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성적 사랑(에로스)나, 친족(스토르게), 또 친구간의 사랑(필리아)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에는 십자가가 있고, 조건이 없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예수님의 피, 보혈이 있다.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다. 희생의 대가를 치루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왜 사랑이 공허한가? 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하는 힘이 있다. 바울은 성도들이, 공동체 내에서 나타내야 할 성품이, 아가페(사랑)라고 말하고 있다. 아가페가 갖는, 2가지 중요한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1)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9a).
‘거짓이 없다’(아뉘포크리토스)는, 아(아니다) + 휘포크리노마이(잘못된 무리에 ‘속하여 결단하다’, 숨기다, 가정하다, ~인 체하다.)이다. 사랑은 잘못된 무리에 속하여, 결단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이는 휘포(아래) + 크리노(구별하다, 결정하다, 선고하다)에서 왔다. 일반적인 거짓(가짜, 허위)는 ‘프슈데스, 프슈도스)이다. 당시 극장에는 배우들이, 자기 배역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다. 가면을 쓰면, 자신과 다른 모습이 되기에, 분별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나 위선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것을 의미한다. 아가페는 위선이나 거짓이 없다. 우리는 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를 속일 때가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참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거짓이나 위선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어, 거짓 없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눈에 보이는 조직이나, 위원회, 사람들을, 온전히 한 목적과 한 몸을 이루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다.
성도는 이러한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성도들은 거짓이나 위선을 버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을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거짓을 물리치게 된다. 따라서 쉰천지의 거짓은, 사랑이 아니다.
(2)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다(9b).
‘악’(포네로스)을 미워하다(아포스튀게오, 지극히 미워하다, 싫어하다의 분사) 아포(떨어져, 몹시) + 스튀그네토스(미워하는, 싫은)이다. 진정한 사랑은, 악을 몹시 싫어한다. 악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며, 반드시 심판한다. 악한 것을 용납함이, 사랑이 아니다. 악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악을 미워한다. 사랑은 무조건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잠6:16-19)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미워하고, 싫어하신다.
‘선에 속하라’ ‘선’(아가스,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 구원, 은혜)을 말한다. ‘속하다’(콜로메노이, 콜라오의 수동 분사)은, ‘굳게 지키다, 붙다.’는 말이다. ‘아교풀로 붙여서,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가 선한 자다.
진정한 사랑은 선을 가까이 하되, 선과 하나 되어,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거짓이 없고 진실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가까이 한다. 진정한 사랑은, 악을 미워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선을 가까이 한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며, 선한 일을 사랑한다.
2. 사랑은 이렇게 한다(10-11).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 형제사랑 안으로 (들어가라)(10a).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라 했다. ‘형제를 사랑하여’(필라델피아)는, 필로스(사랑하는 사람) + 아델포스(형제)로, 형제 사랑이다. 직역하면, ‘형제 사랑 안으로’다.
‘우애하다.’(필로스토르고스)는 필로스(사랑하는 사람, 우정) + 스토르게(부모님의 사랑)에서 왔다. 따라서 ‘우애하다’는 ‘친구와 같은 우정, 부모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내에서, 성도들은 한 피를 나눈 가족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주님 안에서 가족이다. 그러므로 서로 가족처럼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성경은 곳곳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한다(요13:34-35). 이러한 사랑이 없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2)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10b).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다. 존경(티메)은 ‘댓가, 위엄, 귀중품’을 말한다.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교만하지 말고, 서로 남을 존경해야 한다. 귀히 여겨야 한다.
성도들은 남이 존경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남을 존경하고, 이웃을 나보다도 낫게 여겨야 한다. 우리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도, 먼저 자신을 낮춰서, 죄인들의 종이 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도,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존경하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에서 수많은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겸손과, 존경의 정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먼저 하라고 했다. 먼저라는 말이 중요하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존경하라는 말이다. ‘네가 사랑한다면, 나도 사랑할게’ 이런 자세를 가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사랑하고, 존경하라.
(3)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11a).
‘부지런하다’(스푸데, 신속, 열심, 진심), 신속히, 열심과 진심으로 사랑한다. ‘게으르다’(오크네로스, 싫증나는, 게으른)으로, ‘오크네오’(주저하다, 망설이다)는 말에서 왔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섬기는 일을 미루지 않고, 열심히, 진심으로 한다. 사랑하면 새벽부터 일어나 안부를 묻는다. 사랑하면 감각이 살아난다. 사랑이 식으면, 비참하고 속상하고, 피곤을 느끼지만, 사랑하면 눈이 반짝이고, 온몸의 세포가 움직인다. 사랑하면 게으르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가 없다면, 늦잠 자게 된다. 충동적으로 산다. 사랑할 대상이 없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새벽에 나와,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따라서 사랑하기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게 살자.
(4)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긴다(11b).
‘열심을 품다’(토 퓨뉴마 제온테스) 퓨뉴마(영, 영혼), ‘품다.’(제오, 뜨겁다, 타오르다, 열정적이다, 분사) 영으로 불타오른다는 말이다. 성도는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려는,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타오른다.’는 ‘물이 부글부글 끓어서 흘러넘치는 것’을 말한다. 주를 섬긴다는, 주님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맹목적인 열심은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지만, 주님에게 순종하는 열심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뜨거운 마음과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야 한다.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면 타성에 젖어,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형식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면 주님에 대한 열심이 식어지게 된다.
이러한 때에 성도들은, 성령 충만을 위해, 더욱 기도해야 하며, 주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면, 성령님이 열심과, 사랑을 회복시켜 준다. 우리는 지금, 차가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성령 충만하여,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3. 주님에 대한 소망과 영혼을 기대하라(12-1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는다(12ab).
‘즐거워하며’(카이로, 유쾌하게 되다. 행복하게 되다. 환영하다의 분사), 소망이 있으면, 즐거워한다. ‘환난’(립시스, 압박, 핍박, 환란…), ‘참으며’(휘포메노, 아래에 머물다 분사)로, 계속 견디게 된다.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주님의 영광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다. 소망은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기쁨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이 소망은,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우리가 이 소망을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환난을 겪고, 기도하며, 견뎌야 한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는, 항상 죄악과 고통과 저주가 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미래가 있기에 외롭지 않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안심하고 떠나야 한다. 갈등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괴롭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주님이 다시 온다는 믿음과, 새 하늘과 새 땅, 눈물과 고통과, 죽음과 한숨이 없는, 그 약속의 땅이 있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마5:11).
(2) 기도에 항상 힘쓴다(12c).
‘힘쓰는 자’(프로스칼테레오, 인내하다, 끈질기게 성실하다, 근면하다)인데, ‘프로스’(함께, ~의 곁에, 가까이에) + 칼테레오(굳세다, 인내하다)이다. 기도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기 바란다.
굳세게 서고,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기도할 때 용서하라(막11:23-25). 따라서 어떤 사람이 미워질 때, 인내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13a).
성도들의 ‘쓸 것’(크레이아, 요구, 요청, 결핍)을 ‘공급하라’(코이노네오, 남과 나누다, 교통, 교제를 나누다, 동참자가 되다) ‘사람들의 필요와 고난을, 함께 나누라.’는 말이다.
성도들은 가진 것들을, 다른 형제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나눔에 있어, 매우 관대했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 그들의 교제는 실제로 ‘모든 물건까지, 서로 함께 사용’했다(행2:42 참조).
(4)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13b).
‘손 대접하기를’(필록세니아, 환대,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 접대) ‘힘쓰라’(디오콘테스, 추구하라)는 말이다. 성도들은 가난하고, 방문한 손님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필라델피아’(형제간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 동시에, 손님들에게 ‘필록세니아’(낯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이 두 가지 사랑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교회는 참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특히 바울 당시에, 손님 대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여관이 거의 없었고, 안전하지 못했고, 매우 불쾌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여행객들에게 자기 집을 개방하여, 손님들을 대접하는 일이 중요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이 일을 매우 강조했다(딤전3:2, 딛1:8). 오리겐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낯선 사람들이, 올 때에, 그를 받아들이는 것 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찾기 위해 주의 깊게 알아보고,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선가, 머리를 가릴 지붕 하나 없이, 거리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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