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11월 13일 - 서로 협력하라(롬12:4-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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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협력하라(롬12:4-5)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다. 신분이 바뀌었다. 따라서 그에 합당한 삶이, 따로 있다. 직장에 취직을 하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안 된다. 그 회사에서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살아야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공동체 내에서 생활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했다.
① 마땅히 생각할 바를 품어라. 주제 파악을 하면서, 월권하지 말라. 상식적으로 행동하라고 했다. ② 그 이상의 생각, 즉 오버하지 말라고 했다.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건전한 생각을 가지라는 뜻이라고 했다.
③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고 하였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면, 교회질서가 무너지고 혼란하니, 성도들은 하나님이 각 성도들에게 준, 믿음의 분량을 따라, 행동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교회 안에,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계속해서,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해서, 성도들이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있으니,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1.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4上).
“우리가 한 몸에…” ‘우리가 한 몸에’라고 했다. 구원받은 사람끼리 모이는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고 한다. 새 생명으로 얻은 사람은,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공동체에 일원이 되어야 한다.
(마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자신’은 개역성경에서는 ‘몸’으로 번역했다.
교회는 ‘내 몸 같이’가 아니라, ‘내 몸 자체’다. 따라서 이웃보다 먼저, 섬겨야 할 곳이 교회다. 교회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출신 지역이 다르고, 경제 수준이 다르고, 학력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공동체 일원이 되면, 신분이 바뀌었기에, 그의 합당한 삶이 따로 있다. 결혼도 동일하다. 혼자 살던 사람이, 결혼하게 된 이후에는, 혼자 살 때와 동일하게 살면 안 된다. 함께 살기 위해, 결혼에 합당한 삶의 방식이 있다.
또한 일반인으로 있다가 정치인이 되었거나, 공인이 된 사람이라면, 거기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과 헌법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성도가 되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복음의 공동체를 위해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성경에 가르친다. 예수님을 믿을 때, 자기만 구원받는 게 아니고, 공동체에 일원이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되는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합당한 삶이 아니다.
공동체의 일부가 되면, 공동체에 합당한 삶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거대 공동체에도, 거기에 합당한 삶이 있다. 그런데 이 각 단계의 합당한 삶은, 자기 스스로는 알 수 없다. 배워야 된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배워야 된다.
공동체를 이루었으면, 그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준 다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율법을 주셨다. 따라서 율법은 구원을 받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내용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이 건물 안에, 들어왔음을 만족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왔음을 만족하기 바란다. 몸이 되었다는 말은 통일성을 말한다. 몸에는 죽은 몸이 있고, 산몸이 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서로 사랑하고(요13:34-35), 서로 섬겨주고(갈5:13), 서로 격려하고(히10:25), 협력하지 못하면, 죽은 모습이다. 우리는 죽은 몸을 시체라고 한다. 시체는 애기를, 낳을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얼마 가지 못해, 썩어버린다. 교회는 시체가 되면, 안 된다.
그러나 너무 많은 교회들이, 시체같이 되어버렸다. 살아있는 몸은, 움직여야 한다. 피가 흐르고, 사랑이 흘러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 안에는, 사랑이 흐른다. 살아있는 몸은 잉태한다. 10년 동안을 예수님을 믿었어도, 전도하지 못하면, 죽은 몸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넘치고, 사랑이 넘쳐야 한다.
2. 많은 지체를 가졌다(4中).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 몸은 많은 지체(멜로스, 몸의 사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양성을 말한다.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다. 서로 다른 지체들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 한 몸이 잘되려면, 한 몸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하고, 지체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지체들의 기능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 자기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지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의 몸과 지체를 비유로 들었다. 우리는 한 몸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몸 안에는, 각기 다른 기능들을 가진, 여러 지체들이 있다. 기능(프락시스)은, ‘직무, 일, 활동, 행위’를 말한다.
교회가 위대한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한 몸이 되어,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교회의 능력이다.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지 말고, 각자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
우리가 등산을 하면, 다리근육만 좋아지는가? 아니다. 우리 몸속에 있는 심장까지도, 튼튼해진다. 그러면 혈액순환이, 원활히 이루어져, 온 몸이 튼튼해진다. 지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기에, 지체가 몸을 벗어나면 안 된다. 몸에 늘 붙어 있어야,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 발에 멍이 들었다. “발아! 네가 잘못했으니까, 너 혼자 책임져.”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온 지체들이 서로 살펴준다. 눈은 발이 어디를 상했는지, 살펴본다. 손은 다친 부분을 만져주고, 약을 발라준다. 입은 ‘호’하고, 지체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아껴준다.
이러한 지체들이, 자기 역할을 다할 때, 몸은 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다. 이렇듯 많은 지체가 있지만, 그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그 나름대로의 직분과, 해야 할 기능이 있다. 하루는 우리 얼굴에 있는, 입과 코와 눈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말 많은 입을 열었다.
“나는 음식을 넣어주고, 말도 하는데, 왜 너희들보다, 언제나 맨 밑에, 위치해야만 하냐?” 그러자 코가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냐? 나는 숨도 쉬고, 냄새도 잘 맡고, 생긴 것도 이렇게 오뚝하게 잘 생겼지만, 기껏해야 얼굴 중간에 위치해있다.”
그러자 눈이 우쭐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그런 소리하지 마. 내가 너희들보다 위에 있는 이유가 있어. 내가 없어 봐라!. 너희들은 단 한 시간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을 거야.” 그러면서 그들의 시선이, 불현듯이 눈 위에 있는, 눈썹을 향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언짢다는 듯이 이렇게 눈썹에게 물었다. “어이, 눈썹! 자네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리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잘난 척하면서, 뻐기듯이 있어?” 그러자 눈썹이 이렇게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나는 언제나 중요한 일들을 하는, 너희들 앞에서, 늘 미안한 심정으로 내 자리를, 열심히 지키고 있었을 뿐이야.” 그러면 눈썹이 쓸모없는 존재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눈썹이 맡은 직분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눈썹은 우리의 눈 위에, 작은 산맥처럼 옆으로, 뻗어나 있다. 그런데 이 눈썹의 결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 있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땀이나 물이 흘러도, 눈으로 흘러 들어오지 않고, 자연히 옆으로 비껴서, 흘러내리도록 되어있다.
또 눈썹이 있는 부분을 만져보라. 도톰하게 솟아있는 곳에, 살짝 얹혀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눈썹 위로 떨어지면, 눈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다 옆으로 비껴지도록 되어 있다. 그뿐인가? 눈썹은 그 이상 자라지도 않고, 짧아지지도 않는다. 항상 그 길이를 유지한다.
이 눈썹이, 머리카락처럼 계속해서 자란다고, 생각해 보라. 눈을 덮어버리고, 입을 덮어버리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눈썹 하나만 보더라도, 절묘하게 설계가 되어있다. 도저히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다.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몸의 각 지체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나름대로 각각 자기가 맡은 직분은 다르다. 괜히 다른 지체와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가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맡은 그 직분에, 충성을 다하면 된다.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는 원리도, 이와 같다고 했다. 로마교회는 많은 민족과 인종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의존하고 있었고, 각각 자기 역할을 다함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있었다.
교회에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 성도들은 각각 다른 역할이 있지만, 각자 그 역할을 다할 때, 교회가 건강해 질 수 있다. 자기 역할을 감당하지 않고, 믿음의 분량을 넘는 행동하면, 교회는 무질서해지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들에게, 각각 주어진, 믿음의 분량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권고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의 분량을 맡겼든지, 우리는 맡은 직분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된다. 어떤 직분을 맡겨주었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묵묵히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몸 된 우리는, 서로를 위해 살라(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기에, 서로를 위해 살라는 말이다. 한 몸을 이루고 있기에, 모든 지체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
내가 어떤 성도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를 사랑해야 되는데 라면 힘들다. 그러나 내가 저 사람이 없으면,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엄지발톱만 빠져도, 축구하기가 힘들다. 균형 감각이 잘 되지가 않아, 쓰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있음으로, 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를 미워할 수 없다. 새끼손가락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다.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장애가 되기에, 그가 있기에, 내가 온전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미워도,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온전해지려면 협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고,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옆 사람 때문에, 내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은 왜 지체들로 표현했는지 생각하면, 미워할 수 없고, 미워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팔이, 자기를 과대평가해서, ‘이까짓 몸에, 나는 붙어있을 수 없어.’ 그러면서 팔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몇 번 꿈틀거리다가, 동작을 멈춰버리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다. 서로를 위해서, 붙어 있어야 한다.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 몸을 생각해보면, 지체들 중에서 발은, 늘 감추어져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다른 지체들을 지탱해 주고, 옮겨주고, 험한 일은 다하면서, 드러나지 않는다. 뇌, 심장, 위장, 간, 폐, 등, 우리 생명과 직결된 장기들도 모두 감추어져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지체는, 얼굴과 손 정도다.
온 몸의 지체들이, 각각 수고를 해도, 영광은 얼굴이 다 받는다. 성대와 입을 이용하여, 노래를 불러도, 신문에는 얼굴이 나온다. 입만 찍혀서, 나오는 법은 없다. 축구선수가 뛰어다니며, 축구를 해도, 신문에 축구선수의 발만 나오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발이 할 일을 안 하고, 파업을 하는가? 얼굴들이 인정을 못 받는다고, 파업을 하는가? 얼굴이 드러나서, 모든 영광을 혼자 다 받는다고 해도, 사실 얼굴처럼 노출의 위험이 큰 것도 없다. 어느 공동체든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영광도 받지만, 그만큼 책임부담이 크다.
얼굴의 역할을 하는지, 발의 역할을 하는지, 한 몸이 된 지체는,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은, 뼈가 부러져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지만, 한 몸에 붙어 있다면, 가시 하나만 박혔어도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파한다.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서로를 위해 사는 것이 지체다.
엄지손가락이 중요하다고, 혼자만 자라게 되면, 기형이 된다. 세포 중에도, 다른 세포와 관계없이 제멋대로 크는 것이 암세포다. 혼자 잘난 척을 하면, 자신도 죽고, 몸을 죽이고, 집안을 죽이고, 또 교회를 죽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함께 잘 살게 된다.
지체가 된다는 말은, 같다는 말이 아니다. 달라야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조화를 이루면, 나와 다른 역할들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미숙하면 분열하고, 싸우고, 지배하려고 하지만, 성숙하면 하나가 되고, 섬기고, 서로를 위해 살게 된다.
몸에 장애가 있으면, 다른 지체들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처럼 성도들 가운데, 몸이나 마음이 연약하면, 아픔을 다 같이 이해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교회가 건강하고, 이 사회와 나라가 건강해 진다. 이것이 바로 몸에 붙은, 지체들의 올바른 생활이다.
초대교회는 카타콤 지하에서 만났고, 뜨거운 교회를 나누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고,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지 않겠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사랑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카타콤의 벽에 새겨진 글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들이 배워야 할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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