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10월 9 -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한 찬양(롬11:33-3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10-09 |
첨부파일: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한 찬양.hwp(37K) |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한 찬양(롬11:33-36)
바울은 (1-11장)을 통해, 복음에 대해 광범위하게 진술해 왔다. 모든 사람이 죄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과정을 설명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설명했다. 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문제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설명했다.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완성한다. 바울은 여기까지 말한 후에, 바울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설명하던 것을 중단하고, 마음이 벅차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찬양(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바울은 말을 멈추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놀라움과 감탄의 탄성을 질렀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설명하던 중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과 심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판단을 헤아릴 수 없고, 그의 길을 발견할 수도 없다고 외쳤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원문은 이 말이 ‘풍성함과 풍성함이여!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여!’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폭과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풍성한지 놀랐으며, 크게 감탄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참 넓고, 그 깊이가 심오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나타나고, 죄인을 참고 기다려준, 은혜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찬양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하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해 주고, 자기의 자녀로 삼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룬, 구원의 섭리는 묵상하면 할수록, 더욱 더 풍성해진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었다. 노아 때에 사람들의 죄가 넘쳐나게 되었을 때,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지만, 방주로 들어온 죄인을 구원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을 때, 도피성을 마련해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은 십자가로 구원했다. 사형 틀인 십자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을 불렀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넘어지게 되자, 그 기회를 통해서, 이방인을 불렀다. 그리고 하나님은 후에 이방인들을 통하여, 유대인을 다시 불러 줄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고,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한다.
그래서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맞대고 볼 수 있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너무 넓고 깊어서, 아무도 그 넓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깨달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서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고, 그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선언했다. 유한한 우리 생각과,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과 심오함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자세를, 회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높은, 지혜 앞에 설 때에, 겸손해 질 수 있다.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알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힘을 준다. 하나님의 높은 생각과 지혜를 알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게 된다.
(출14장)은 홍해를 가르고, 건너는 장면이다.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의 병사들과,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바다의 물결을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간다. 뒤쫓아 가던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바다에 다 수장되고 말았다. 그래서 (출15장)은 모세와 미리암의 찬양이 나온다.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이루어졌기에, 찬양이 터져 나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계15장)을 보면, 하나님을 반역하던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나온다(계15:1). 그 마지막 심판에서 승리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다.
(계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이것이 우리가 한 평생 부를 노래이며, 마지막에 부를 노래다.
2.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몇 가지 질문(34-35).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바울은 계속해서 질문을 한다. 두 개의 질문으로 되어 있다.
34절 질문은 (사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를 인용한 것이며, 35절 질문은 (욥35: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를 인용한 것이다.
2개의 성경을 인용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조언할 수 없다고 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을 빚지게 할 수 없다. 이는 모든 것들을 만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모사(쉼블로스, 상담가 : 쉼 + 블레‘조언’)가 될 수 없다. 어떻게 피조물이 만물의 주인이며, 모두 다 아는 하나님께, 조언할 수 있나?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는 헤아리거나 조언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상담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을 진 채무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언자가 되거나,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지 말고, 오히려 그 분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닫고, 침묵해야 한다. 욥은 극한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불평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하나님의 크신 지혜를 깨닫고, 이렇게 대답했다. (욥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섭리에 눈을 뜨면, 우리가 무지한 맹인과, 같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진정으로 자신을 보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지혜와 지식이, 보잘 것 없는 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의 계시 없이는, 참된 지혜와 지식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을 졌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셨고,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지금도 우리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입을 열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
3.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영광은, 하나님이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들고,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간의 영광을 구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으로 출발해서, 하나님으로 맺어야 한다. 하나님이 만물의 시작이며, 끝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 만물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에크)라고 말하고,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디아)라고 대답하고, ‘만물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에게로’(에이스) 간다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에서, 3가지 전치사(에크, 디아, 에이스)를 사용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유지하며, 하나님이 만물의 목표가 됨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만물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유일한 분이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만물’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 전체를 말한다. 만물은 글자 그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우주전체와, 천상에 존재하는, 모든 영적 존재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창조의 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가로채면 안 된다. 이 사실을 알 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
(2) 우리의 구원에 대한, 모든 섭리를 의미한다. 바울은 구원에 대한 섭리를 말하는 중이다. 그는 지금 이 모든 구원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고, 하나님을 통해 진행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했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었으며,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이룬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고,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이제 바울은 최종적인 송영으로, 끝맺고 있다.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고, 만물을 유지하고, 또 만물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반발한다.
사단과 우리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살기를 원한다. 우리를 하나님 위치에, 놓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하기를 거부하고, 만물의 주인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예배와 찬송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이 없이는, 참되게 하나님을 찬송이 있을 수 없기에, 앞에서 지루할 정도로 신학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참된 예배와 찬송은, 참된 신학이 동반될 때에 가능하다. 올바른 신학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인도해 준다.
참된 신학이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찬송(예배)이 없는 신학도 올바른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학문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냉정하고, 비판적인 과학의 관찰과 평가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와 경외하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언제나 우리를 예배로 이끈다. 참된 신학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자리가, 피조물인 우리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하지 못한 신학’과 ‘신학이 없는 경건’, 둘 다 똑같이, 주의해야 한다. 우리 마음에,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다면, 찬양이 흘러나온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주신 놀라운 구원에, 감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되기를 바란다. 고난과 고통을 넘어서, 찬양의 승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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