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 10월 2 - 이스라엘 회복의 근거(롬11:28-3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10-02 |
첨부파일: 이스라엘 회복의 근거.hwp(39K) |
이스라엘 회복의 근거(롬11:28-3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았다. 이방인 중에서, 정한 숫자가 차면, 이스라엘을 다시 부를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이루어질 내 언약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씻어주고,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이 구원이, 은혜의 언약이며, 복음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거절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버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악할 때에도 항상 경건한 백성들을 남겨 둔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은 한 번 은혜를 베풀고, 부르신 일에는 후회하지 않는다. 바울은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거가 무엇인지 말씀했다.
1.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사랑 받은 이스라엘(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를 죽였기에,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은혜언약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원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이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했기에,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하나님의 선택 받은 민족이기에, 하나님은 장차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기를 원한다. 그 근거가 부르심인데, 그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기 때문이다.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는 아주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일을 경험하고 실망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어.’라고 말하며, 후회한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고, 잘 대해 주었는데, 그럴 수 있는가!’하며 후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은혜를 베푼 것을, 후회하거나, 취소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는, 변하지 않는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을 확신했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는가?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예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연약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우상을 섬기는 자의, 아들이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에도, 여러 번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흔들렸다.
심지어 그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팔아넘기기도 했으며, 하갈을 통해, 육신의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르신 일을 후회하거나 취소하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는, 변함이 없다.
모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에, 그는 살인하고, 광야로 도피한 범죄자였다. 그는 그곳에서 40년을 지내면서, 보잘것없는 늙은 목동으로 살았다. 후에 하나님이, 가시떨기에서 나타나서, 그를 부르셨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름을 거부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불러서, 애굽에 보내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실수를 했다. 겸손히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이나 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른 일을, 취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범죄 한 후에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최고 선지자로, 존경 받을 수 있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에서, 가장 어린 막내였으며 양을 치는 목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셨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 후에, 충성스런 장군, 우리야의 아내와 동침을 했다. 그녀가 임신하게 되자 다윗은 그 일을 숨기려고, 우리야를 전쟁터로 내몰아, 죽도록 만들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말년을 심한 고통과, 아픔으로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아주 버리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에는, 변하지 않는다.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도, 항상 하나님을 거역했다. 그들은 율법을 무시했고, 간음과 폭력과 불법을 자행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박해하고 죽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려, 이방에 포로가 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그들을 70년 만에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는, 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메시아와 복음을 거부한다. 복음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방해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잃고, 방황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한 번 부른 백성을, 버리지 않고, 부르신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 번 은혜를 베풀었다가도, 손해가 나면 그 약속을 취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기에, 한 번 하신 은혜와 약속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버림받은 이스라엘도, 장차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거역하면, 그들을 징계하지만,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이 범죄 하면 징계하지만, 그를 아주 버리지는 않는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수많은 죄를 지었어도 아주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도 자녀들을 아주 버리지 않는다.
2. 불순종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스라엘의 회복에, 확신을 가질 수 있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반드시 징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기에, 그들을 영원히 징계하지 않고, 다시 용서해 주었다. 하나님은 먼저, 순종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다시 살려주셨다.
이방인들은 죄로 버려진 상태 그대로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도 몰랐고, 그 말씀에 대한 순종도 몰랐다. 그러던 것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때 이방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 백성에서 ‘제외’되었고, 하나님의 언약 밖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소망 없이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기에, 마땅했지만, 멸망시키지 않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 이제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인해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이방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이스라엘은 영적 특권을 받았지만, 타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는, 지금 이방인들을 향해 내리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가, 이스라엘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이방인을 긍휼히 여겨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긍휼히 여겨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일컬어 ‘은혜의 나라’라고 한다. 은혜의 나라에서는, 은혜에 속한 자들만이, 살 수가 있다. 은혜가 무엇인가?
이는 은혜의 반대를 알면, 알 수가 있다. 은혜의 반대는 법이다. 법은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는 덮어주고, 용서하며 살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허물의 사함을 입은 자다. 죄의 수치를 덮음 입고, 죄 용서를 받은 자다.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과,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두 가지 방식으로 대하신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긍휼로 대하시고,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은, 법으로 대하신다.
(시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허물의 사함을 입은 자들이다. 죄가 가려진 자요, 용서받은 자다. 자기 백성이기에,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죄사함을 받아서, 자기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이기에, 죄사함이 주어진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덮어줌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기에, 그의 은혜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은혜와 용서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삶으로 토해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와, 법이라는 두 동네를 만들었다. 자연히 두 부류에는, 두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은혜에 속한 자와, 법에 속한 자다. 은혜의 동네에 사는 사람은, 은혜로 대하시고, 법이라는 동네에 사는 사람은 법으로 대한다. 은혜의 동네에서, 법을 말하면 이단이다.
반대로 법의 동네에서, 은혜를 말하면, 이단이다. 은혜와 법은 성질이 상극이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있다. 하나님은 이 둘을, 갈라내는 일을 한다. 은혜 동네에서는, 법으로 사는 사람을 골라내고, 법 동네에서는, 은혜로 사는 사람을 골라낸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 찾아주는 것을, 잘라냄과 접붙임으로 말씀했다. 하나님이 법에 거하는 자는 잘라내고, 인자에 거한 자들만 남긴다. 법으로 산다는 말이고, 인자에 거한다는 말은 은혜로 산다는 말이다.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이다.
우린 모두 법아래서 태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 아래로 불렀다. 이걸 죄인인 돌 감람나무를 예수라는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였다. 참 감람나무인 예수에게, 접붙임을 당한 사람은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이 공급해 주는, 인자라는 진액을 공급받음으로, 은혜에 거하게 된다.
3.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에 가둔 이유(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바울은 순종하지 않은 자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토굴에 가두어 둠에 비유했다.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과 유대인을, 불순종이라는 토굴감옥에, 가두어두었다. 이 불순종의 감옥에, 먼저 갇힌 사람은 이방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의 감옥에 가두어 두셨나?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에 가두어 둔 이유는, 후에 더 큰 긍휼을 베풀어주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하기를 원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같은 것을 두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유대인은 율법을 해석하는데,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하나님은 죄를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의를 만들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 했는데,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사니, 의인이라고 했다.
결국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 불순종 가운데 가두었다는, 죄인은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가? 이는 죄 때문이다. 죄 때문에 순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으므로, 죄를 이기지 못한다.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를 죄의 종이라고 한다.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죄에 가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했다.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불렀다. 그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계시를 주시고, 앞길을 인도해주셨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특별한 영적 특권과 축복을 누렸다.
그들은 자만에 빠져서, 그 축복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 행위를 버리고,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선민이라고 자랑했고, 이방인을 업신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축복하고,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길 원했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교만하거나, 자만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모두 다,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과 유대인을, 불순종의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했다. 우리의 구원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을 구원하라고 하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에 복을 주셨는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함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을 완성하기를 위함이다.
"
이전글 : 2016년 9월 25 - 이스라엘이 우둔하게 된 이유(롬11:25-27) | |
다음글 : 2016년10월 9 - 하나님의 구원섭리에 대한 찬양(롬11:33-36)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