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10월 16일 -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1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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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제물로 드리라(롬12:1)
(롬1장)부터, 11장까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대하드라마를, 전체적으로 보았다. 구원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롬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이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개인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인류의 구원으로 끝난다. (롬9장)부터 (11장)까지, 인류의 구원을 말했다.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완성된다. 구원의 감격으로 11장을 마쳤다.
복음의 교리를, 11장까지 지루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고, 이제 (롬12장)부터, 복음에 합당한 삶, 즉 일상생활에서 제자들의 도를 설명한다. 구원의 교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도덕과 윤리, 삶의 문제가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르침의 특징은, 교리와 삶을 결합한 부분이다.
바울 서신들은 전반부에는, 복음에 대한 교리를 다룬다. 후반부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로마서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출발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로 확장된다.
(롬12장)에서,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1-2) 성도와 성도의 관계(3-13), 성도와 사회의 관계(14-21)에 대해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하나? 바울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했다(12:1).
1. 바울의 권면(1上).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그러므로’ 앞에 말씀한 내용,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듬뿍 받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감동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과연 어떠한 삶을,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되겠는가?’를 말씀했다. ‘그러므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형제들아!’를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형제 인식이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지배한 원수의 나라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하나님의 원수로 살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사도로 바뀌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자신과 같은, ‘한 가족, 한 형제’라고 불렀다.
바울 당시에, 로마교회 안에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부분적으로 긴장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거리낌 없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형제’라고 불렀다. 이렇게 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었으며, 신분, 계급, 인종적 차별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로마교회 성도들을 ‘형제’로 불렀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피 값을 주고 산 자들로,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났다면,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형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교회에 들어와서, 넘어지는 이유들이 많이 있지만, 먼저 믿은 자들에게, 실망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울은 여기서 ‘그러므로 내가 권한다.’는 말로 시작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가 먼저 나오지만, 원문은 ‘내가 권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로 나온다. ‘권한다.’(파라칼레오, ‘가까이 부르다, 초청하다, 위로하다, 변호하다, 돕다, 간청하다.’)는, 다양한 뜻을 가진 말이다.
본문에서는 ‘권한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바울은 여기서 얼마든지,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내가 명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명한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권한다.’고 말했다. 주님이 그에게 준 권위를, 온유와 겸손함으로, 사용하여 말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복음적인 삶은 자원하여 행해져야 하며, 결코 명령이나 강압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에, 네가 안 되어도, 나는 반복적으로 계속 권할 수밖에 없다.
2. 권면의 근거(1上) - 하나님의 자비하심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고 했다. ‘모든 자비’(오이코티르모스)는 ‘동정, 불쌍히 여김, 연민’이다.
자비를 복수로 썼다. 하나님의 자비가, 너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원수처럼 살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 받자, 너무 감사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다.
로마교회 성도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우리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를, 불쌍하게 여겨,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서, 인간을 대신해서 죽게 해서, 우리 죄인들을 살리셨다.
하나님의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며,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영광에 참여하게 했다. 따라서 복음을 삶 속에 실천하는 일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하심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에 의지해서, 성도들을 권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윤리적인 호소를 할 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해서 호소했다. 율법은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순종하라고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해서, 사랑하라고 호소한다.
율법은 자기 힘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만, 복음은 성령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한다. 성도들의 모든 선행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순종을 강요하지 않지만, 율법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윤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에 근거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면, 불쌍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권면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권면하게 된다. 우리가 바울의 심정을 가져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로, 사람에게 권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상대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서, 꾸짖듯이 하면, 권면이 아니라, 정죄가 될 수 있다.
정죄와 권면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랑과 자비로 시작되면, 권면이 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면, 정죄가 된다. 우리는 사랑과 자비로, 권면해야 한다. 자꾸만 문제가 생기는 원인은, 권면하지 않고, 정죄하기에 문제가 생기고, 상처가 아물지 않게 된다. 권면하는 삶을 살기 바란다.
3. 권고의 내용 : 산 제물(1下).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했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라고 권했다.
은혜를 경험하면, 보답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시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을 드리고 싶어진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영적 침체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충분한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무엇인가, 받기만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만큼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우리 몸도, 마음도, 뜻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만큼 우리 신앙이, 성장할 수가 있다.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꾸 받기만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라고 한다.
① 구약의 제물은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제물로 드렸다. 이러한 제물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피를 흘리고 죽임 당하기 위해, 드려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짐승의 피를 보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더 이상 짐승을 죽여서, 제물로 드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약의 성도들이 드려야 할 제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받고, 다시 얻은 새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산 제물’을 드리라고 했다.
구약의 제물은, 죽은 짐승을 드렸지만, 신약의 제물은, 몸을 드리는 산 제물이다. 이것은 성도의 전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예배는, 성전이나 교회건물 안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는 것만, 거룩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모두 다, 거룩한 일이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참된 예배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드려지는 예배다.
② ‘너희 몸’을 드려라. 너희 몸은,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된 너희 몸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거듭난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법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옛 사람과는, 영원히 결별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만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대신,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고, 나를 예수님과 연합시키셨다.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요, 진리다. 누구든지 만약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요, 구원의 뿌리가 되는, 대속의 은총이 무너지기에, 기독교에서 취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제물은 말이 없다. 죽어져야 한다. 자비하심으로 권하고, 그 권함 때문에 나를 욕하고 핍박해도 나는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죽어져야 한다. 예배를 오려고 해도 죽어야 하고, 목장모임에서도 죽어야 하고, 삶에서도 죽어야 하고, 날마다 죽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몸을 드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이나 이념, 정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몸이 없으면, 영도 없다. 영은 몸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영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요, 신앙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몸으로 믿는 것이다. 몸은 시간이요, 은사다. 찬양으로 섬기는 분은, 자신의 몸으로 섬기는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든지, 화장실 청소를 하든지, 주차안내를 하든지, 우리 몸이 움직일 때, 신앙생활의 실체가 보이게 된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관념적이 된다. 현실이 없다. 몸이 없는 사람은, 받을 축복도 없다. 참된 예배란 몸을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몸이라고, 같은 몸이 아니다. 어떤 몸이냐가 중요하다. 주정한 몸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깨끗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몸, 하나님이 기뻐하는 몸이 되어야 한다.
③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산 제물은 새로운 제물을 말한다. 이 산 제물은, 거룩한 산 제물이다. 제물은 제단에 바치는 제물을 말한다. 우리는 지난날 죽은 제물을 드렸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난날 몸을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었다.”고 했다(롬6:13).
죄의 종이었기에, 우리 몸을 죄에게 드려왔다. 이것이 곧 죽은 제물이었다. (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러나 산 제물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리는 제물이다. 지난날 죄의 무기에서 의의 무기로 드리는 제물이다. (롬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 값을 지불하고 산, 거룩한 몸을, 죄를 짓는 도구로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의 도구로 사용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몸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이러한 제물은, 짐승을 드리는 제물보다, 더 온전한 제물이다. 바울은 이러한 제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예배는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의 제물과 같은 온전한 제물이다.
성도들이 성령님을 의지해서, 자기 몸을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헌신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예배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거룩한 제물’을 드리라고 했다. 성령님을 소유한 성도들은 모두 다 거룩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도 역시, 거룩한 일이다.
구원의 도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전 삶을 통해서, 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예배다. 이것을 ‘성도들이 드릴 영적인 예배’라 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영적 생활이다. ‘영적’(로기코스)은 ‘마땅하다, 합리적, 말이 되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적 예배’는 ‘마땅하게 드릴 예배, 합리적인 예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산 제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몸으로 산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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