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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6년 7월 3일 -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다(롬9:6-13)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6-07-03
  첨부파일: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다.hwp(80K)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다(9:6-13)

 

바울은 골육의 구원을 위해, 거룩한 근심과 고통을 느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 비해, 하나님께 많은 특혜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특별한 은혜를, 8가지로 정리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자 되고,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과, 조상과, 그리스도가 그들 중에 태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준 메시아를 거절하여, 구원받지 못했다. 바울은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에 큰 고통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제,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인가? 유대인에게 준 구원과 예배와 율법과 약속이, 다 없어졌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구원받을 희망이 없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의 말씀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은 폐지되지 않았다(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했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취소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이스라엘에게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둘 이 있다. 혈통을 따른 육적 이스라엘 약속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인이다. 이스마엘은 혈통으로는 이스라엘인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일부가 메시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가 아니다. 메시아를 거부하고, 약속에서 제외된 것이다. 성령을 통해 구원받은, 영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육체의 혈통으로만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에도 언급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떠나 멸망당한 후에, 그들 중에서 경건한 자들이 남아서,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선지자들은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다. 구약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혈통적으로만 유대인이었다. 이방인처럼 생각하고, 이방인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한 사람은, 이러한 육적 유대인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 소수의 사람을 남겨두고, 그들이 구원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은, 요셉, 마리아, 엘리사벳, 사가랴, 시므온, 그리고 안나같이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옴을 보고, 이렇게 말씀했다.

(1:47)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그가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인이라고, 증언해주셨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려고,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을 때에, 수많은 유대 학자들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출생할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려고, 박사들과 함께 가지 않았다. 메시아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한 것은, 육신으로는 유대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적인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경건한 소수를 남겨두셨고, 그들을 통해서 구원 사역을 완성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했다고 해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상, 결코 취소되거나 변하지 않는다.

2.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7-8).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씨라고 주장한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녀면, 무조건 그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영적인 이스라엘을 선택했음을, 2가지 예를 들어 증언하고 있다.

(1) ‘아브라함의 씨’(스페르마, 후손)를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낳은 자녀라고, 그들을 모두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는, 여종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과, 여주인 사라를 통해 낳은, 이삭이 있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게 된다. 사라를 통해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과 약속이 없이 육체를 따라 난 아들, 이스마엘이 나온다. (17:19-20)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라고 했다.

(21:12-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으로 가는 나라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은 틀림없지만,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을,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직, 사라를 통해 낳은 이삭만, 약속의 자녀로 인정해 주었다. 왜 이삭만을 약속의 자녀로 인정해 주었는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꾀로 낳은 아들이었다. 믿음을 따라 낳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고, 인간적으로 낳았기에,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했다. 이처럼 약속을 붙드는 게 신앙이지, 인간의 노력 행동이나 꾀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 이루어짐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에,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21: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라고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직 이삭을 통해 낳은 자녀만, 네 자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분명히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믿음을 포기하고, 육신으로 낳은 자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슬픔 속에서 이스마엘을 떠나보내야 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아브라함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를 통해 낳은, 이삭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처럼 육적인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경건한 소수의, 영적인 유대인들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성취되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3.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10-11).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2) 이삭의 자녀인, 야곱과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에게 적용된 원리는, 똑같이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에게도 적용되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다른 어머니를 통해서 태어났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는, 아버지만 아니라 어머니도 같았다. 그들은 둘 다,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서 출생했다. 또 그들은 같은 날에 태어난, 쌍둥이기에 나이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한 명은 선택하고, 다른 한 명은 버림받을 것을 예고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러한 점에서, 야곱과 에서의 선택과 유기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사례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바울은 이 일을 증언하기 위해서, 두 가지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25:23)는 말씀이고,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1:2-3)이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큰 자(, 에서)가 작은 자(동생, 야곱)를 섬길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예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결정됨을 보여주지만,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무 죄도 행하지 않은 에서를, 무조건 미워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편애하는, 불의한 분이 아닌가?’ 그 동안 사람들은 계속, 이러한 질문을 제시해 왔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9:13)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다.

(1) ‘야곱에서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이스라엘 족속과 에돔 족속),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9:13)을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스라엘 족속은 사랑하고, 에돔 족속은 미워했다.”

(2) ‘사랑미움선택거부로 해석해야 한다(칼빈). 그래서 (:13)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야곱은 선택하고, 에서는 거부했다.’

(3) ‘미워한다.’는 말을 히브리 관용구를 따라서 보다 덜 사랑한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들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미워한다.’는 말이 보다 덜 사랑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10:37).

이처럼 미워하다는 말을 보다 덜 사랑한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9:13)을 이렇게 해석해야 된다고 말한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그 보다 덜 사랑할 것이다.’ 이 세 가지 견해 중에서, 가장 학자들의 많이 받고 있는 것은, 세 번째 입장이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모두 사랑하셨지만, 특히 야곱을 에서보다, 더 사랑하셨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본문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이뿐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본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만일 바울의 말대로,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고, 우리의 행위와 무관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성경은 야곱과 에서에 대한 선택과 유기를 미리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에서가 버림을 받음은, 그의 불경건한 행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야곱이 얼마나 영적인 축복을 사모했고, 또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구약 성경은, 에서가 장자권을 멸시하고,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축복을 빼앗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서가 버림을 받음은, 그의 불경스러운 행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아무 항의를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선택과 유기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인간의 책임과 심판에 대한 문제는, 우리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교회를 다녔다고,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교회를 다닌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마르크스와 같은 무신론자가 생겨날 수 있다. 자기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기에,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될 것이다. ‘예수 믿는 자를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아무 항의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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