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4월 17일 -고난과 영광(롬8:18-2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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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영광(롬8:18-25)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상속자이다. 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현재 당하는 고난에도, 기꺼이 동참한다.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면, 영광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영광은 사람들의 몸이, 변형될 때에 완성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이나, 또 우리가 죽는 날에 이루어진다. 성도들은 미래에 이루어질, 영광을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영광의 날을, 고대하는 것은 사람만 아니다. 바울은 영광의 날을 고대하는, 3가지 존재들(피조물, 우리, 성령님)을 소개한다.
1.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생각하건데’(로기조마이, 계산한다. 판단한다). 계산하듯이, 생각해보았다는 말이다.
현재의 ‘고난’(파마, 고통)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고난을 당했나? (고후11:23-27)을 보면, 얼마나 극심한 고난을 당했는지 안다. 옥에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아, 죽을 뻔 했다. 40에 1를 감한 매를 5번,
세 번 태장,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일을 깊은 바다에서, 강의 위험, 강도, 동족, 이방인, 시내, 광야, 바다, 거짓 형제,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누구보다 고난을 받았지만,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천국은 좋은 곳인데,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사도 요한은 천국이 좋음을 표현할 수 없어,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했다. 여자가 최고 아름다울 때가, 단장하고 시집갈 때다. 그렇게 밖에, 영광과 기쁨과 행복을,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영광을 준다고 하니, 현재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왜 사서 고생하나? 어렸을 때 고생을 해야만, 나중에 영광이 오기 때문이다. 일부로도 고생을 자초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고난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올 때, 반드시 상이 포함되어 있음을 믿기 바란다. 이러한 믿음의 눈을 갖기 바란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포기하거나, 가정과 친지를 포기해야 될 때도 있다. 어떤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재산이나 명예, 지식이나 쾌락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받으려면, 여러 가지 박해와 유혹, 강한 연단과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장차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광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늘에서 누리게 될 영광을 ‘장차(멜루산)의 영광’이라 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영광에 참여할 수 없지만, 장차 받게 된다.
또 우리가 누릴 영광을 ‘나타날(아포칼룹나이) 영광’이라 했다. ‘계시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 놓은 영광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은, 이 모든 영광을 분명하게, 계시해줄 것이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계시될) 영광’이라 불렀다.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고난과 영광의 모델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예수님은 사흘 후에, 다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에, 참여했다.
자신이 흘린 피로 인해서, 온 인류가 구원받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이러한 놀라운 결과는, 예수님이 잠시 받은 고난에 비해서, 너무 큰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잠시 받는 고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에게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은 훨씬 더 크고 영원하다. 네가 나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했구나… 하면서, 안아주신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우리의 영광스런 미래를 고대하는 것은, 우리뿐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도 고대하고 있다.
여기서 피조물은, 천사와 사람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을 말한다. 모든 피조물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고대하고 있다. ‘고대한다.’(아포카라도키아)는 ‘목을 길게 빼고, 앞을 본다.’는 말이다. 피조물들은 성도의 영광의 날을 위해, 목을 길게 빼고, 고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피조물들이 ‘강한 기대감을 가지고’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따라서 목마른 사람들이 물을 찾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하기를 고대한다.
2.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고대하는 이유(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왜 피조물들이, 그토록 강렬하게 영광의 날을 고대하고 있는가?
그 날이 와야, 피조물들도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자신을 주관하는 사람들과, 불가분의 운명을 맺고 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 지배를 받는 피조물도, 영향을 받게 된다. 인간이 허무한 일을 행할 때에, 피조물들은 허무한 일을 위해, 사용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허무한’(마타이오테티)은 ‘헛것, 쓸데없는 것,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따라, 좇지 말아야 할 것을 좇아갔다. 이로 인해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 결과 피조물들도, 허무한 인간에게 지배를 받아, 허무한 일에 사용되게 되었다.
피조물들은 반역한 인간에 의해, 불법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인간에게 사용되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후에, 그들은 불법의 도구로 전락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맺고 말았다.
또 땅은 인간이 땀을 흘려야만, 곡식을 내주는, 열악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피조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피조물들은, 인간의 욕망이나 탐욕을 채우다가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결코 이러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인간에게 지배를 받게 만드셨기에, 그들은 할 수 없이 타락한 인간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21-22)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썩어짐’(라스)은 ‘부패하고 썩었다.’는 의미다.
바울은 현재의 모든 피조물들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부패한 고기조각’처럼 쓸모없게 되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이 헛된 일에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이르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영광에 참여하여, 자신들도 선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의 영광의 날이 도래하기를, 더욱 더 갈망할 수밖에 없다. 피조물이 우리와 함께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로, 지구는 신음하고 있다. 인간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로, 지구는 온난화를 일으키고 있다. 인간이 뽑아쓴 물과 석유로 인해, 지구는 자꾸만 싱크 홀과 같이, 지각이 푹 꺼지는 현상과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일은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잘 가꿔야한다.
3. 우리도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 몸의 영광을, 피조물만 고대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우리의 속사람, 즉 영혼도 역시, 이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고대한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에서 탄식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때를 기다린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이 있기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죄의 세력이, 항상 우리 몸을 통해서 유혹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우리의 몸을 통해서, 죄를 좇도록 유혹한다. 이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의 몸은 종종, 성령님과 죄가 싸우는, 영적인 전쟁터로 변한다.
이 문제는 이미 (롬7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본문에 나타난 탄식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우리들이 하는 탄식’이다. 어떤 청년이 군대에 갔다. 성실하게 군 복무를 했고, 세월이 지나서, 전역할 때가 다가왔다.
그때 그 청년은, 하루가 한 달이나 일 년 만큼, 길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이때가 되면, 하루라도 빨리 전역해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탄식도, 이와 비슷하다. 하루 빨리 죄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죄의 세력에, 굴복할 때마다 탄식하면서, 속히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완전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고대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이상하게 사모한다. 언제, 어떻게 오실 것인지에 대해, 예언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재림 날짜를 알기 위해,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재림의 날을 계시 받았다고, 자신이 받았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재림의 날을 위해서, 일도 하지 않고 기도에 열중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오는 때와 기한은, 우리 권한밖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는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준 일들을, 열심히 해야만 한다. 이러한 기다림과 순종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우리는 장차 누리게 될, 그 날을 고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 날을 기다린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으면 안 된다.
착하고 충성된 종처럼 예수님이 맡겨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서, 많은 열매를 남겨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날을 고대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성령님과 함께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면서, 영광을 돌려야 한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소망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에, 소망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보이는 것은, 참 소망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현재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지만, 구원이 완성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미래에 완성될 구원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산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믿음과 함께 소망이 동반될 때, 온전해 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을 받았을 때, 아직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성취될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에 예수님을 믿고,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의인이 되었다. 우리는 죄의 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다. 그러나 구원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죄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성령님을 좆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성화). 또 성령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결국 미래에 완성된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죄에서 벗어나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이, 미래에 완성되기에, 우리는 견고한 소망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의 완성된 구원이, 소망을 통해서만,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구원은 미래에 완성되기에 소망과 함께, 인내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받은 후, 바로 아들을 얻지 못했다. 약속받은 아들을 얻기 위해, 25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후손을 통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기까지는, 수 천 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행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 안에서, 장차 완성될 구원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완성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원이 완성될 때가지 소망하며, 인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소망과 인내는, 약속된 구원을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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