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4월 10일 -자녀는 상속자이다(롬8: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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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상속자다(롬8:17)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 안에 거하는 영으로 결정이 된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면, 내 모습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이를 ‘칭의’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주어지는, 시민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코리안 드림’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대한민국을, 꿈을 이루는 나라라고 한다. 외국인에게 한국시민권은 축복의 상징이다. 그래서 위장 결혼을 해서라도, 한국시민권을 얻으려고 한다. 한국 시민권만 얻으면, 각종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시민권이, 한국인에게는 자동으로 주어진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묻지도 따지지 않고 주어진다. 잘난 사람이냐, 못난 사람이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장애인이냐? 아니냐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어른이냐 아이냐, 남자냐 여자냐 따지지 않았다. 지금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이 그렇다.
그리스도의 영만 거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만 판단한다. 우리가 비록 육신으로, 죄짓고 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본다. 예수 안에서 의로운 자의 자녀로 본다.
그런데 동시에 자녀들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을 볼 때, 부모님의 자랑과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성숙한 자녀들도 있고, 조금 걱정되는, 미성숙한 자녀들도 있다. 지난번 말씀에서, 영광이 되는 성숙한 자녀를, ‘휘오스’로, 미성숙한 자녀를 ‘테크논’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영,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성숙한 ‘하나님의 아들들’(휘오이)이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고 했다. 종은 두려움 때문에 하고, 자녀이기에 아버지를 존경해서 순종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과 더불어, 친히 우리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자녀들(테크나)이라고 증언한다. 성령님께 순종하고 따를 때, 거룩한 자녀로 살게 된다. 이를 ‘성화’라고 한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위치를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모습인가?
1. 하나님의 자녀는 상속자다(17上).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그런데 자녀들이라면(에이 데 테크나), 하나님의 상속자(클레로노모이)라고 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말해준다.
‘상속자’(클레로노모이)는, 클레로스(획득, 기업, 세습재산) + 노모스(법) = 법적으로 획득한, 세습 재산을 말한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법적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위대한 기업이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들은 잘났건 못났건, 부모님의 유산을 상속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다. 당시의 양자는 친자녀와 함께, 유산을 상속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양자가 된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의 자격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다. 바울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슁클레로노모스)라 불렀다.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인’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양자인 우리는, 친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복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받게 되었다. 이단이 무서운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놓게 만든다. 자꾸 다른 것을 붙들게 만든다.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통일교, 천주교…
그 동안 한국교회는, 구원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사함 받고, 의인이 되어, 종말에는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올바로 살지 못해도 괜찮다는, 구원파식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오늘 본문을 잘못 해석하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죄를 사함 받았다는 측면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하나님과 관계회복의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성경은 어떻게 구원받는지,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가르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한 후에, 시내산으로 불러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다.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다. 이 율법 전체를 요약하여 주신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크게 2부분으로, 말할 수 있다.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말씀한다. 5-10계명은 우리가 이웃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관련된 계명이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가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반드시 2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지만,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웃은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역시 잘못된 믿음이다.
우리가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를 분별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이단이나 사이비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가족조차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하고, 심지어 폭력살인도,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전혀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예수님은 (마22:37-40)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2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내용, 이웃 사랑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 모습이 같이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라는 것이,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기 바란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기독교 국가 영국에 유학하면서,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은 싫어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른 믿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이 있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을 닮는 바른 믿음을 가지자.
2. 상속하는 궁극적 목적 : 영광(17中).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쉰독사스-멘) 말한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상속받는, 궁극적인 목표는 ‘영광’이다.
우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죄를 용서받은 것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하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영광’은 우리가, 모든 죄의 영향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영광스럽게 된 모습, ‘영화’를 말한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장차 모든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죄의 세력에 잡혀 있기에, 부분적으로 무력감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세력에서 벗어나서,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을 때에,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었다. 우리는 타락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었다. 피조물이 침범할 수 없는 권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후로, 사람들은 그 영광을 상실하고 말았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사람들의 죗값을 지불했다. 성령님을 보내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 장차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만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잃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가 잃은 형상을 회복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다.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면, 세상은 싫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 이 미움 받음이 고난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모든 일에, 함께 삶아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살면, 성도들의 삶에, 예수님의 삶에 기준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이 기준이 될 때, 그들은 감당하지 못하기에, 배척과 고난으로, 나타나게 된다. 세상의 법칙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영광에 참여하려면, 먼저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3. 상속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을 받자(下).
“…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그와 함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한다.
가족들은 한 집에 산다. 큰 아들이 사용하는 것은, 작은 아들도 사용할 수 있다. 똑같이 사용한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기에, 영광도 함께 받는다고 말씀하고,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가족의 모습이다.
우리가 고난당함으로, 너는 영광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임을, 드러내고 있기에, 고난이 영광이 되는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각인시켜주는 표식이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이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핍박을 한다. 그러니 고난이, 곧 영광이 된다.
성도들에게 고난이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마귀는 우리의 속에, 예수님이 있는지 없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 속에, 예수님이 없는 자에게는, 시비 걸지 않는다. 같은 편이니까, 그러나 그 속에 예수님이 있는 자는, 가만히 둘 수가 없기에, 자꾸만 시비를 건다.
자기하고 다르니까, 자기들의 나라가 자꾸 침범을 받으니까, 시비를 건다. 그래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는, 족히 비교가 되지 않으니, 고난을 당한다고, 좀 징징거리지 말라고 한다. 고난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영광인 줄 알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우리도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에도 기꺼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하는, 공동 운명체가 되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와 그 백성은, 영광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한다. 한 나라가 잘되면, 모든 백성들도 번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려움을 당하면, 모든 백성들도,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국민과 지도자는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참아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영광만 아니라,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잘 참고 견디면, 영화의 단계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영화의 단계는 사람들의 몸의 변형이 될 때에 완성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날이나, 혹은 자신이 죽는 날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는 지금,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을 때에, 비로소 영화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장차 얻을 영광을 바라보면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쁘게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고난을 당했다.
사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에 참여해야 하는가? 우리 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은, 벌이다. 복음과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상을 받게 된다. 왜 지금 고난을 당하는지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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