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 4월 24일 -도와주시는 성령님(롬8:26-28)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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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시는 성령님(롬8:26-2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기쁘게 고난에 동참한다. 성도들은 재림을 통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소망하며 산다.
우리가 미래에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는 존재들이 3가지, 피조물, 우리 영혼, 성령님이라 했다. 지난주에 피조물과 우리 영혼이, 영광의 날을 고대한다고 말씀했다. 오늘은 성령님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때까지, 우리를 도와주는지 생각해 보자.
1.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때까지, 우리 연약함을 도와준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된다. 그날이 올 때까지, 육신이 제한받는다. 우리 몸은 아담의 타락이후, 여러 가지 죄악의 영향을 받았다. 죄로 인해, 연약함과 무능함에 싸여, 정욕을 좇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무지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정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육신이 완전히,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몸이 연약하기에, 피곤을 느끼며, 때로는 병에 걸린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함 때문에,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을, 해결하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도와줄 수 있다. 육신이 연약(아스데네이아, 나약함, 질병)해서,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영광에 이르는 날까지, 함께 하며 도와준다. 어떻게 도와주는가?
(1) 성령님이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이해력은 제한되어 있기에, 하나님이 왜 그러한 환경을 주셨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 그릇된 기도를 드릴 때가 있다.
성경을 보면, 모세와 바울도,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기도를 드렸다. 모세는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응답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달랐기 때문이다(신3:23-26).
바울도 자기 몸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지만, 응답 받지 못했다(고후12:1-10). 하나님이 그 가시를 통해, 바울을 겸손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우리는,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도와준다.’(쉰안티람바노)는, 3가지 의미를 가진 말이, 합쳐 만들어진 단어다. ① ‘쉰’(함께) ② ‘안티’(반대편에서, 대신에) ③ ‘람바노’(잡다)는 말이다.
“두 사람이 함께 짐을 지고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2번 사용됐다. (눅10장)을 보면, 나사로의 집에, 예수님을 초청했다. 그때 언니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느라, 매우 분주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만 들었다.
그때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했다. (눅10:40下)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때 본문에 나온 ‘돕는다’(쉰안티람바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돕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연약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행하지 못할 때에, 성령님이 친히 우리를 도와서, 할 수 있도록 잡아준다.’는 의미다. 우리는 혼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지만, 성령님과 함께 하면, 능히 그 뜻을 행할 수 있다.
이 말을 오해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님이 다 해준다고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해도,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순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순종할 때에, 부족한 것을 도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스테낙모스 알렐레토스)’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휘페렌튕카노, 중재한다)고 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처럼,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알랄레-토이스)은, ‘아’(부정어) + 랄레오(말하다)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탄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그릇된 기도를 드릴 때, 성령님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우리 속에서 탄식하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준다. 이러한 점에서 성도들에게는, 두 분 중보자가 있다.
①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중보자, (그리스도)가 있으며(딤전2:5), ②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 때에, 좀 더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다.
2. 성령님이 어떻게 돕는가?(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살펴보고 간구한다(엔튕카노. 호소하다.)
(2)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합력하여’(쉰에네르게이)는 쉰(함께) + 에르곤(노력, 행위, 일)이다.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님이 기도해주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사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오이다멘, 경험적이며, 성령 하나님이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요, 선한 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성령 하나님이 우리 유익을 위해, 힘써주심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쁨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사단은 성도들이, 고난 받을 때에, 그들을 낙심하게 만들려고 미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때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모든 것을 선하게, 보기에 좋게, 아름답게 바꾸어준다. 천사들을 보내서, 성도들을 지켜주기에, 어려운 일이 당해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철저하게 선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시험을 만났을 때도 기뻐할 수 있다(약1: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고 했다. 합력은 서로 연관되어, 작용한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선한 뜻을 행한다. 하나님은 특히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된 사람을, 더욱 사랑한다. 그들을 완전하게 보호해 주고,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지만,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와 심판으로 인도한다.
바울은 성도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했다. 하나님은 자녀를 사랑한다.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믿고 의지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관계는, 부자 관계가 아니라, 주종의 관계다.
또한 성도들을 ‘그의 뜻대로, 부름 받은 자’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세전에, 자기 자녀로 선택했다. 하나님은 정한 때에, 자기의 종들을 보내서, 자녀로 불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직접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 받은 성도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모든 환경을 다 동원해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때로 성도들에게, 평안과 풍요로움을 준다. 그때 우리는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성도들에게, 고난과 역경도 준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성도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성숙한 인격을 소유하게 만들며, 여러 가지 귀중한 일들이, 성취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의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난을 주셨을 때에도,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남들이 알지 못한, 수많은 계시를 주셨다. 바울은 이러한 계시를 통해서,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편에서 바울에게, 가시(몸의 질병)를 주셨다. 바울은 이로 인해 큰 고통을 받았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준 계시와 가시는, 모두 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의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신 선물이었다(고후12:7-9).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어 주는, 좋은 도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여, 도와주신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잘못 살 때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고난을 주어서,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한다.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즉시 용서하고 안아준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더 깊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내리는 징계와 매도,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을 거역하던,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포로가 되게 만들어서, 어려운 포로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떠났던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깨달아, 돌아와 바로 살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경건한 욥과, 그 가정에 큰 물질과 명예와 평안과 화목을 주셨다. 사람들은 축복받은 욥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사단은 그가,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빼앗았다. 욥은 한 순간에 자녀, 물질, 명예, 건강마저, 모두 잃고 말았다. 욥은 왜 자기에게, 이러한 시련이 찾아오는지, 알 수 없었기에, 기나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부르짖었다.
후에 그 모든 일이 자기에게, 유익했음을 깨달았다. 욥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귀로 듣기만 했던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욥42:5).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형들이 그를 질투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러다가 지나가던 상인이 있어, 노예로 팔았다. 그들은 그를, 애굽의 장군 보디발의 집에 팔았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옥에 갇히게 된다.
옥 안에서는, 왕의 곁에서 가까이 있던 신하들을 만났다. 거기서 요셉이 해몽을 잘 해 주어, 훗날 바로 앞에 서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요셉은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였다.
결국 하나님은, 이러한 어려움이 요셉을 이끌어 내고, 국무총리가 되게 했다. 모든 일들이 서로 합력한다는 의미다. 요셉이 당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이루기 위한 일들이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섭리와 뜻이 있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이러한 신앙으로 형통한 때만 아니라, 시련당할 때에도 계속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뻐하기를 바란다.
무엇이 걱정되는가? 무슨 근심이 있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두려움과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는, 좋은 분, 선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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