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 2월 14일 - 율법과 죄(롬7:14-25)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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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죄(롬7:14-25)
바울은 (롬7장)에서, 율법주의자들과, 율법폐지론자들의 견해를, 모두 반대했다고 말했다.
①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했다(7:1-6).
② 율법폐지론자들은, 은혜로 구원 받기에, 이제 율법은 무익하니,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율법은 죄가 아니며, 거룩하고 선하다(7:7-13).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며, 죄를 드러내지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주지 못한다고 했다.
이렇게 율법의 한계와, 무능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면, 죄 문제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죄 문제로 고민하다 보면, 내가 신자가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이러한 갈등에 대해, 오늘 말씀하고 있다.
1. 율법을 행하지 못해서, 죄에 팔린 나는?(14-15).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그)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율법은 신령하다고 말했다. ‘신령하다’(프뉴마티코스)는 ‘퓨뉴마’(성령, 영) + ‘이코스’(~에 속하는) = 성령에 속한 것이란 뜻이다. 율법이 ‘신령한’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다.’고 했다.
‘육신에 속했다.’(사르키노스)는 사르크스(육체) + 이코스(~에 속하는) = ‘육체에 속하는, 육체의 지배를 받는다.’이다.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거룩한 것이지만, 율법을 따르지 못하고, 육신에 속해, 죄 아래 있다고 했다. 이 말씀이 로마서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 중의 하나이다.
이 부분이 신자의 경험을 말하는지, 불신자의 경험을 말하는지, 의견이 서로 상반되어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초기엔 불신자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구원받은 성도의, 안타까운 고민이라고 했다. 그러면 더 살펴보자.
(1) 어떤 사람은 불신자라고 한다. 그 이유는,
① 나는 성령에 속한 자가 아니라, 육신에 속했다고 했으니, 불신자다.
② ‘죄 아래에 팔렸도다.’(핖라스코, 거래되다, 노예로 처분하다)니, 은혜 아래 없다고 말한다.
③ 죄 아래에 팔려서,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탄식하며, 선한 일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한 일을 행하는 줄 깨달았다며, 한 마디로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으니, 분명히 불신자 상태의, 바울이라고 한다.
(2) 안타까운 신자의 상태를 말한다.
① 마음으로 선을 원하기 때문이다. 선한 것을 향한 의지가 있다고 했다(15,18, 19, 21). 불신자라면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기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을, 원할 수 없다.
②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22). 행복한 사람은 (시1:1)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했다…” 그런데 구원받았으니, 율법은 필요 없다고 하면, 율법에 대한 오해이거나, 부담을 느끼고, 경시하는 사람들로, 진정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지키고 사랑한다. 그러므로 필요 없다고 하는 자들은, 잘못된 자들이다.
③ 중생하지 않은 자는, 감사할 수도 없다(25).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들을 보면,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로 봐야한다 한다. 대부분 이렇게 보는데, 저도 이런 관점에서 말씀드리겠다. 바울은 2가지 세력이, 자신 안에 공존함을 깨달았다.
마음은 율법을 따르며, 악을 미워하는, 선한 세력이 있지만, 선한 세력을 누르고, 악으로 이끄는, 악한 세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악에게 끌려서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했다. 이러한 갈등은 분명히, 중생한 사람도 겪을 수 있다.
중생한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기 원하지만, 삶의 현장 속에서, 악으로 이끄는 세력을 따라 살 수 있다. 이는 마치 새들이, 내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내 머리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로 일어난다. 따라서 영적싸움에서 이기려면, 율법의 기능을 먼저 알아야 한다. 율법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가르쳐 주지만,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은, 주지 못한다. 율법을 통해 선을 행해야 함을 알지만, 악을 계속 행하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이다.
죄에 민감하여, 죄짓지 않으려고, 애써 본 분들은, 이러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아무리 결심하고, 의지를 다져도 죄짓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했다.
2. 율법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내 속에 거하는 죄(16-17).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율법은 선한데,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죄짓지 않게, 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죄가 그랬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나를 지배하려는 죄의 법에서,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왜 우리는,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가?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죄의 세력에게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악으로 이끌고 있다. 인간의 문제는, 밖에 있지 않다. 환경과 구조를 바꾸면, 약간 도움이 되지만, 안이 바뀌지 않는다.
바울은 죄짓는 근본적인 책임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세력, 즉 타락한 본성’이라고 분명히 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죄짓는 일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었지, 죄를 지으라고 강요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 강도가 은행에 들어와, 머리에 총을 겨누고, 은행직원에게 돈을 꺼내서, 가방에 담으라 했다. 그 직원은, 돈을 가방에 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도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을 수 있기에, 할 수 없이 가방에 돈을, 담아 줄 수 있다. 그 직원이 가방에 담았다고, 고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직원은, 강도의 총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모든 책임은 총 들고, 그 일을 하도록 시킨, 강도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보다 강한 죄가, 죄를 짓게 만든다. 성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완전한 승리는 없다.
(18-20)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4-17) 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리고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한 법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법은 ‘우리 안에 있는 세력들’을 의미한다.
‘자신 안에, 선과 악을 지향하는, 2개의 자아’가 있음을 알았다. 자기 안에, 선을 행하려는 소원을 가진 자아와, 악을 행하려는 자아가,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하는 것을 발견했다. 잘 아는 소설 중에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낮에는 훌륭하고, 존경받는 지킬 박사로 활동하지만, 밤이 되면 사악하고 음흉한 하이드(숨은 사람)로 변해, 온갖 추잡한 일을 하고 다닌다. 이 소설은 이러한 방식으로 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두 인격, 즉 선한 자아와, 악한 자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2-23)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면서도, 마음 안에 있는 또 다른 죄의 세력에게 끌려, 죄를 행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바울의 속사람, 중생한 자아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했다. 중생한 심령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는다. 중생한 심령은, 하나님의 법에 찬성하고, 그것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행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는 그의 안에, 또 다른 법(세력), 즉 죄의 세력이 그와 싸워서, 강제로 그를 죄의 법으로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바울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면서도, 실제로는 죄의 법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었다. 바울과 같이 중생한 성도들도 이러한 일을 경험한다.
3. 마음과 육신이 좇는 것(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냐고, 먼저 몸부림 쳤다.
‘이 사망의 몸’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될 수밖에 없는 육신을, 어찌하면 제어하고, 이길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자기를 이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해줄 자를 찾는, 깊은 절망 중에, 비통한 부르짖음이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나 동시에, 그 마음 안에는 ‘확신과 감사에 가득 찬 부르짖음’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부르짖음이 있었다.
중생한 성도의 마음 안에도, 2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신의 성품’(벧후1:4)을 가지고 있지만, 타락한 성품도 있다. 이것이 함께 싸운다(갈5:17). 유대인들은 말한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검은 개와, 흰 개가 있는데, 항상 싸운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개가 이길까?
사람들이 잘 먹이는 쪽이, 가장 큰 몸집을 가지고, 이긴다고 했다. 우리는 종종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몸으로는 죄를 좆는 일을, 경험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 안에, ‘2개의 부르짖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울은 동시에 ‘두 가지 법을 섬기고 있다.’고 했다.
‘거듭난 자아’(아우토스 에고)는, 하나님의 법을 섬겼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타락한 자아인 그의 ‘육신’(사륵스: 성령의 지배를 거부하는, 거짓된 타락한 자아)은 여전히 죄를 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타락한 자아는, 정욕을 좆아 사는, 노예로 만들었다.
바울은 이러한 힘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다. 율법도 그에게, 이러한 죄의 세력을 이길 힘을,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새로운 마음과 죄의 세력을 동시에 섬기며, 기쁨과 갈등을 동시에 체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번번이, 육신에게 패하여, 죄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율법은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주지만, 강력한 죄의 세력을 극복할, 힘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신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몸으로는 죄를 짓는 모순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만약 25절이 없이, 24절로 끝났다면, 로마서 7장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면서, 승리의 근거를 제시한다. 내면(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이길 수가 있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 우리 죄를 없애려고, 속죄물이 되어 준 것만 알다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서, 우리가 죄와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길을 열어 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예수님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바울은 아직 성령님을 소개하지 않았지만, 성령님의 필요성과 역사를, 강하게 제기한다. 이러한 비통한 부르짖음은, 성령님으로 해결될 수 있다. 구원 받았지만, 성령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에, 죄를 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에 대해, 점점 사모함이 커져가고, 죄에 대해서는, 증오심이 커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새 길은 바로, 육신을 이기는, 성령님의 역사임을 다음에서 밝힌다. 그 말씀이 이제, 8장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8장의 말씀을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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