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 1월 24일 - 율법이 악한 것은 아니다(롬7:7-1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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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악한 것은 아니다(롬7:7-13)
바울은 지난주일 말씀인, 율법주의자의 주장을 반대했다. 율법주의자는 성도들이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고,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었기에,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법적으로, 부부관계에서 해방되듯,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고, 성령님을 보내서 죄를 극복하고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 바울은 율법주의자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계속해서 ‘율법 폐지론자들에게 답변하고 있다.
1. 율법은 죄가 아니다(7上).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앞에서 우리가 율법에 매여 있었는데, 이제는 해방되었다고 했다. 율법이 죄를 불러일으켜, 죽음을 가져온다면, 율법이 죄인가?
‘바울은 율법을, 악한 것으로 보는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악한가?’라는 질문했다. 역사적으로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율법이 필요 없다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은혜시대에 율법은, 어떤 의미가 있나?
율법이 죄를 조장하기에, 무조건 율법을 거부해야 하는가? 바울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하면서, 율법을 악한 것으로 몰아가는, 태도를 반대한다. 잘못된 이단 사상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선한 것이라고 말했다.
(7下)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렇다면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할까?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한다. ‘죄’(하마르티아)는 ‘표적을 빗나가는 것’을 말한다. 가지 말라는 곳을 가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분명히, 죄라고 선언한다. 율법이 있기에, 죄가 죄인 줄, 알 수 있다. 율법은 죄를 죄로 지적하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임을 폭로하여, 죄의 해악을 경고한다. 이처럼 율법은, 죄 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악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죄를 깨닫게 해준다. 이에 예를 들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으면, 탐심이 죄인 줄, 몰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탐심’(에피쑤미아)은 ‘내적인 욕망이나 충동’, 또는 ‘육적인 욕심’을 말한다.
탐심은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불법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심리학자는 탐심을 죄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있는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말한다. 탐심은 세상에 있는 것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탐심을, 우상숭배의 죄라고 말한다.
바울은 겉으로는 계명을 지켰지만, 마음속에 숨겨진 욕망은, 다스릴 수 없었다. 겉으로 보면 완전했지만, 마음속에는 탐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들여, 죽이는 일에 힘썼다. 이처럼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을 때에는, 이것이 죄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탐심을 금하는 10번째 계명)을 알고 난 후에, 탐심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눅18:18-) 어느 날 부자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영생에 대해 물었다. 부자관리는 자신이, 죄인인 줄 전혀 몰랐지만. 예수님은 부자관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부자관리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율법은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실체를, 근심하게 만들기에, 죄를 깨닫게 해준다. 숨겨진 죄가 그대로 드러난다. 동성애가 죄인가? 아닌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다면, 동성애가 잘못되었음을, 말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랑의 형태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갈수록, 전에는 죄인 줄 몰랐던 죄를, 깨닫게 되고, 회개할 죄가 더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는, 올바른 일이다.
2. 율법을 이용해서, 죄가 우리 안에 탐심을 이루었다(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습관이었기에, 죄가 문제가 안 됐다.
그런데 율법이 오니까, 계명으로 인해, 죄가 드러나게 되었다.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내가 율법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것이다. 숨겨진 죄가 드러나고, 오히려 죄를 더 범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우리 안에는 강한 죄성이 있다. 이 죄성이 율법을 통해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
‘기회’(아포르메)는 아포(떨어져, 분리, 출발) + 홀마오(시작하다, 자극하다, 돌진하다, 하게하다.) = ‘출발점, 작전 기지, 반감.’을 뜻하는 말이다. ‘아프로메’는 군사원정을 위한 출발점, 작전 기지, 또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구축한 발판을 말한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우리 안에 죄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율법을 발판으로 활용했다. 법이 없을 때에 사단은, 우리를 유혹할 수 없었다. 법이 없으면, 우리를 유혹할 수 없고, 우리가 넘어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이 들어오자, 사단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발판을 찾았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하니, 더 호기심이 생겨서, 죄를 짓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은 인류를 위해 준, 선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그 명령을, 아담을 넘어뜨리는, 발판으로 삼았다. 율법이 세상에 왔을 때, 죄는 그 법을 발판으로 해서, 활발히 움직여, 사단은 결국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금지한 열매를 먹고 싶은 마음, 탐심을 갖게 만들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그 유혹에 넘어가, 그 열매를 따먹었다.
우리 안에는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죄성이 있다. 죄가 우리 안에서 죄를 짓게 하는 마음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율법자체는 거룩한 것이라고 말한다. 악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죄가, 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선한 것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를 넘어뜨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하지 말라고 하면, 다 하고 싶어진다.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더 들어가고 싶다. 죄의 원인은 율법이 아니라, 죄성이다.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을 몰랐을 때, 죄의식이 없을 때는, 내 뜻대로 살았다. 그런데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나고 내가 죽었다.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자, 죄의식이 생기고,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죄는 살아나고 내가 죽는 것이다. 말씀이 다가오자, 죄가 살아나서, 내가 죽는, 무서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공할 만한 자기 죄를 보게 된 것이다. 죄가 살아남은 은혜다.
아무리 율법을 읽어도, 계명 앞에 서야만, 내가 죽을 수 있다. 한센 병이 무서운 이유는, 아파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났다. 감각이 살아나자, 가시에만 찔려도 너무 아프다.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 아파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10-11)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죄가 살아나고 나의 죄가 들어나, 내가 죽게 된다. 내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이러한 애통함이 없다면, 영적 한센 병을 앓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알았어도, 계명에 이르지 못해, 사망에 이르렀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회개하지 못해 죽게 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 앞에 가면 갈수록, 도리어 내게는 사망이 된다.
여기서 1인칭 대명사 ‘나’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죄를 깨닫고 죽은 그가 누구인가? ① 바울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② 인류의 대표 아담이다. ③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바울로 볼 수 있다. 바울이 체험한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경험은, 바울 개인을 넘어서, 인류 전체(아담과 이스라엘을 포함한)에게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죄와 사망의 문제는 바울만 아니라,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다.
법이 없다면, 사람이 정죄를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법이 들어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려고, 법을 주셨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율법을 통해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서 사망으로 인도했다.
3. 율법은 선하다(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죄는 나를 멸망시키고, 파괴시킨다. 그러나 율법은 나로 하여금, 죄를 똑바로 보게 한다. 죄는 나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똑바로 보게 한다. 내가 거룩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도 못하다. 자기 죄를 보는 고통은 대단하다. 잘못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변명하게 만든다. 그러나 율법은, 자신을 올바로 보게 한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난다. 율법에는 거룩함이 있다.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서, 하나님의 의롭고, 선한 뜻을 알아, 구원에 이르게 만든다. 나는 살인죄를 범하고 살았다. 그러나 모르고 살았다고, 살인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율법이 들어오므로, 죄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면 살인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함이 잘못인가? 그럴 수 없다. 율법은 아무 죄가 없다. 문제는 내 속에 있는 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율법자체가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한 것은 아니다. 율법자체는 선하다.
우리 안의 죄성이 우리를 미혹해서, 넘어지게 만들었을 뿐이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율법을 이용해서, 우리 안에 온갖 악한 것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사망에 대한 책임은, 율법에 있지 않고,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이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발각되어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재판을 통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러한 경우 그는 자신을 정죄한 법을,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를 범죄자가 되게 만든 것은 법이 아니라, 그가 죄를 짓게 만든 그의 죄성이기 때문이다. 법은 단지 그가 옳지 않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서, 율법이 우리를 사망으로 이끈 장본인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를 사망으로 이끈 원흉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죄를 지적하는 율법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율법폐지론자들의 주장에 반대한다.
죄에 대한 원인은 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법은 공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며, 불의를 행한 사람을 정죄한다. 그러므로 법은 법을 어긴 죄인을, 보호해 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법을 비난할 수 없다.
왜냐면 죄를 지은 책임은,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 행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선한 율법으로, 내 죄를 알고 나니까 절망한다. 죄가 드러나니, 이제는 인정하고, 살길을 찾게 만든다. 불치병으로 죽어가던 나에게, 치료자 예수님을 소개하며, 예수님이 아니면, 살 길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죄가 내 안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다. 내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못한다. 내가 얼마나 죄에 무력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하면,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고, 죄를 죄로 여길 수 있는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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