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 2월 21일 -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는 없다(롬8: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2-21 |
첨부파일: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는 없다.hwp(40K) |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는 없다(롬8:1-2)
(롬7장)은, 율법은 선하지만, 한계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줄 수 있지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몸으로는 죄의 법을 따른다.
그러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강력한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해줄 수는 없는가? (롬8장)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말한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줄, 예수님과 성령님을 소개한다. 따라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을, 생각해 보자.
1. ‘그러므로…’(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장)은 “그러므로”(아라 ; 특히, 역시)로 시작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말에, 결론내릴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는, 앞(7:21-25)에서,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했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사망으로 끌고 가는데,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느냐고 외쳤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1) (7:25)에서,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했나?
① 비록 죄를 범했지만, 예수님 안에는, 용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다. 정죄(유죄판결)을 받지 않으니, 아무리 넘어져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말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공사 중에, 많은 사람이 두려워서, 떨어져 죽었다. 공사하는 밑에 철조망을 만들어 주자, 그 다음부터 안도감으로 아무도 떨어지지 않았다. 죄를 지으면 망한다는 불안감보다, 죄를 지어도 예수님이라는 철조망 있어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죄를 안 짓게 한다.
공부로 몰아붙이는 것보다, 공부 못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백점 성적표를 가져올 수 있다. 공부 못해도 된다는 아이는, 공부를 쉽게 한다. 다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아는 것도 틀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② 죄의 심각함에서 벗어났기에 감사했다.
요즘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가짜 그리스도인이 많다. 도덕적인 윤리나, 인권보호만을 주장하거나, 형식적인 종교인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은, 가볍게 생각한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서, 처벌을 받기 전에는, 심각한 죄를,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은 억울하다며, 오히려 불평만 늘어놓을 수 있다. 또한 범죄 한 사람에게, 아무 제재도 가하지 않기에, 죄의 심각성을 자꾸 잃어간다.
그러나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기 죄로 인해,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사면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 없을 수 없다. 지옥의 형벌을 알았기에, 바울은 오호라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줄 수 있느냐고 외쳤고,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받았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면, 감사는 없다. 누가 내 대신, 죽어달라고 했느냐고 하면서, 억지를 펴거나,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곤한 사람이라고 외쳤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해결책이 있음을 알고 감사했다.
(2) ‘이제’(눈, 지금, 이후로)
아담 안에서, 죄의 지배를 받던 때와,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는 때를 구별한다. 이제는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던 데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때, ‘지금’을 말한다.
아담 안에 있는 때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때를, 분명히 구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역사를, 과거와 지금으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다. AD.와 BC.로 구분한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 때를 기준으로 하는, 연대표를 사용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인류 역사의 주인공인 동시에, 각 개인의 역사에서도,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성도들은 아담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하나 된 때를 기준으로 ‘그때’와 ‘지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 의를 행하며 살게 되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구원받은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오(기름붓다)에서 나온, ‘기름 부은 자’란 뜻이다. 히브리어로 ‘메시아’를 번역한 말이다.
히브리인은 국왕, 제사장, 예언자의 직분을 구별하는 표다(출29:7, 삼상10:1, 16:13, 왕상19:16).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을 말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예수님만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가짜다. 그리스도가 되심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다 지불했기에, 정죄 ‘사법적인 유죄선고를 받지 않는다.’ 비록 연약해서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지 않는가? 유월절 애굽 전역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큰 울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죽음의 사가가 어린양의 피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모두 피해 갔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지만, 쓰러졌다면,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일어나기 바란다. 마귀는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냐고 할 수 있느냐, 그러니 포기하라고 정죄하고, 참소하고, 조롱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적으로 정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이 주는, 놀라운 약속이며 축복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는다.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참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해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준, 성령님이 거한다. 성령님은 장차 우리의 몸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시 살려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성취되었다. 여기에 사용된 ‘정죄’는, ‘유죄선고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법정 용어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유죄선고를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값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서, 죄의 세력에서 해방된다.
성도들이 죄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기에, 더 이상 정죄 받지 않고, 죄의 세력에서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제 2절부터, 본격적으로 성령님에 대해, 말씀한다. 우리들도 성령님으로, 죄와 세상과, 자신과 마귀를, 이길 수 있기 바란다.
3. 성령의 법(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는다.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들을 ‘해방해주셨기 때문’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을 의미한다. 그러면 왜 바울은 성령을 ‘생명의 성령’으로 불렀나? 그 이유는 성령님이, 예수님을 믿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또 영생을 얻게 해주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생명을 창조하고, 우리에게 생명력을 공급해 준다. 여기서 ‘법’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바울은 (7:23, 25)에서 이미 ‘죄의 법’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때 바울이 말한 죄의 법은 ‘우리의 지체 속에 활동하는, 타락한 죄성(세력)’을 의미했다.
이처럼 본문에 나오는 ‘법’도 ‘일정한 힘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세력’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에 언급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도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성도 안에서 역사 하는 성령의 영향력’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죄의 세력이 있다.
우리는 성령님이 오기 전에는, 죄의 세력을 이길 수가 없기에, 죄의 정욕을 좆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사망’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성령님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죄의 세력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을 통해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생명을 만나야만 살아난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되신 분과의 교제에 있다. 교제가 있기에, 잘못됨을 꾸짖음과, 올바르게 살아서, 영광을 말하게 된다.
교제를 방해하는 것은, 가면이고, 극단적인 자기혐오가 있을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성령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을 강조하지 않고, 성령운동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위험한 이단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성령운동과,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는 필요 없다며, 성령만 받으면 된다. 그래서 예언하고, 방언만 하면 된다는 이상한 성령운동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세상에 계실 때, 사단과 죄의 세력과 싸워 승리했다.
사단은 일평생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유혹했지만, 예수님을 이길 수는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죗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해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았으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주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 안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성령님이, 내주하신다. 이 성령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강력한 죄의 세력으로부터 끌어내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의 법에서 우리는 해방시켰다.’고 한 말의 의미이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 한다고 해도, 육신의 소욕, 즉 세상과 구별되어 살기는 어렵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려면, 먼저 예수님의 보혈을 알고, 그 보혈을 의지해야 한다. 그런 후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로 삼아, 이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지 않으며, 세상을 겸하여 살고자 하기에, 실패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함 속에 있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중생의 씻음을 얻었을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게 되지만, 얼마 안 있어, 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활동을 방해하여, 곧 성령이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총으로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새롭게 하심을 얻은 사람들 안에는, 성령님이 마음껏 지배해서, 그를 주관하게 되는데, 그것이 성령이 충만하다는 뜻이다. 성령이 충만할 때만, 내가 육신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길 수 있다.
우리가 구원 받았어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이유가, 바로 성령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흥회에 참석하거나, 철야기도나 금식기도를 했으니,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런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 많이 있음이, 한국 기독교의 불행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은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성령님이 지배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말씀을 떠나서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살펴보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바란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라도,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성경은 2가지를 다,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해서 등을 돌리고 죄를 지으면, 구원의 완성을 받지 못하고, 타락할 수 있다. 교제가 끊어진다. 그렇기에 겸손히, 순종하며 사는, 행함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을 죄사함의 측면만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의 측면으로도 이해해야 한다.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의인’이라 칭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나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의 가치가 있다. 이제부터는 죄를 안 짓는다는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살면서, 승리하는 법을 배우기 바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을 배워 멋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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