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6년 1월 17일 - 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롬7:1-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6-0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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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대하여 죽은 우리(롬7:1-6)
지금까지의 로마서 말씀을 살펴보면, 율법은 3가지 역할을 한다고 했다.
(1)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만든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기에,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현미경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균을, 분명하고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율법은, 죄의 세균에 얼마나 깊이 감염되어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2)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한다.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를 구하게 만들어준다. 환자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게 되면, 의사를 찾게 된다. 율법은 죄인들에게 자기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은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권고한다.
(3)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은 중생한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지 ‘거룩함과 의와 사랑의 삶’을 가르쳐주고, 성령을 보내서,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대하는, 3가지 입장을 취한다.
① 율법을 통해서만, 우리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하는데, 지금도 성도들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② 은혜로 구원받기에, 율법과는 상관이 없다는 견해다. 이런 주장하는 사람을 ‘율법폐지론자’라고 하는데,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더 이상 율법은 필요 없다. 율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두 가지 사상은, 잘못된 것이며, 이단 사상으로, 모두 반대한다.
③ 은혜로 구원받지만, 율법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선한 것이다. 우리 힘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주장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반론한다.
1. 율법의 구속력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자신과 로마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말이다. 법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성경박사라는 유대인을 말한다. 이들이 성경을 잘못 알고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설명해 준다. 바울은 먼저 법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한다.
법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만, 구속력을 갖는다. ‘주관하다.’(퀴리유오)는 ‘통치하다, 지배하다, 주가 되다.’로,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 의미다. 법은 우리가 살아 있을 때만, 구속력을 가지며, 죽은 사람은 구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죄의 세력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살인죄를 짓고 도망을 다니던 사람도 죽으면, 죄의 형벌에서 벗어난다. 법은 그대로 있어도, 죄를 지은 자가 죽으면, 법이 효력을 잃게 된다. 죄를 진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과, 당선 축하금의 꼬리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검찰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검찰의 압박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을 죄어, 신변을 비관해서, 봉화마을 뒷산에서 죽자,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죄를 물을 수 없게 된 것이다.
(2-3)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죄를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면, 그들은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물론 이혼을 하면, 그들은 부부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혼하지 않으면, 남편과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다른 이성과 동침하거나 결혼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이러한 경우에 법은, 그 죄를 물어서, 벌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만일 배우자 중에 한 사람이 교통사고나 질병, 또는 기타 사고로 죽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배우자 중에 한쪽이 먼저 죽으면, 남은 다른 배우자는, 결혼에 대한 법적의무에서 벗어나게 된다. ‘벗어난다.’(카테르게오)는 ‘무효가 된다, 폐지된다.’는 뜻이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남편과 맺은 부부관계가 무효 되거나 폐지되기에, 남편이 죽은 후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도, 처벌되지 않는다.
남편의 죽음과 함께, 남편에 대한 법적 의무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죽음은 결혼관계를 끝내게 만들기에, 두 번째 결혼을 정당하게 만들어준다. 부부가 혼인법에서 자유롭게 됨은, 오직 배우자가 죽었을 경우다. 왜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 이유는 다음 절에서 알 수 있다.
2.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다(4上).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바울은 앞에서 말한, 법적 원리를 영적 원리에, 적용하기 위해서다.
율법도 살아있는 동안만 구속한다. 우리가 율법에 순종하면, 생명을 얻게 되고, 율법을 거역하면, 저주를 받았다. 이것은 결혼관계와 비슷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율법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죽었을 때에 가능하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율법에 대해서, 죽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율법에 대해서 죽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을 이루었으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했다.
우리는 믿음과 침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했다(6장).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 값으로 사망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참여함으로, 죄의 형벌(죽음)을, 완전히 지불했다. 그러므로 이제 법(죄)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거나, 구속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계가 청산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다.
이것은 마치 남편이 죽은 후에,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다. (4下)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어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지 않으셨으면, 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했는가? 그것은 더 이상 죄의 열매를 맺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의로운 열매를 맺도록 위해서다.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바울은 우리가 이전에 ‘육신에 있었다.’고 했다. ‘육신’(싸릌스)은 ‘죄의 통제와 지배를 받는, 인간 본성’을 말한다. 원래 우리의 몸은, 악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며, 선한 것이다. 우리 몸은 정욕을 따라 살면, 죄의 도구가 되지만, 성령을 좇아 살면, 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육신’은 ‘영, 성령’과 대조되는 의미이다. 이 경우에 육신은 ‘윤리적으로, 악한 성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에 있었다.’는 ‘과거에는 죄가 우리를 주관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육신에 거할 때에, 죄의 정욕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했다.
‘죄의 정욕’은 ‘죄짓게 하는 정욕, 욕정’을 말한다. 우리가 죄 가운에 거할 때에는, 죄를 짓게 하는 정욕, 욕정이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러한 죄의 정욕은, 특히 율법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율법에 단단히 매여 있었다.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았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았다. 그때 율법은 우리에게, 정욕을 따르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경고를 듣고도, 죄의 정욕에 매여 살았다. 그러므로 율법은 죄인으로 선고했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다.
죄의 정욕은 우리에게, 사망의 열매를 맺게 만들었다. 죄의 정욕은 우리를, 정욕을 좇게 만들어서 그릇된 길로 가게 만들었다. 죄의 정욕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만들었다. 그때에 우리의 주인은 죄였으며, 우리는 그 주인에게 사망의 열매를 상납했다.
그리고 죄는, 그 열매를 통해서, 더욱 더 우리를 강하게 지배했다. 그때에 우리는, 죄를 따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죄의 노예가 되어 살았고, 계속해서 더 많은 사망의 열매를 거두면서 살아가야 했다.
3. 이제는 우리가(6).
“(그러나, 데)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어맸던 율법에서 벗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의를 이루었다.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동참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는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사망의 노예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죄와 율법의 종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여인이, 남편이 죽은 후에 그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과 같다. 따라서 전에 따르던 ‘조문’(문자)를 따라 살 필요가 없다. 조문은 돌과 양피지에 기록된 ‘율법’을 의미하며, 10계명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은 율법을 ‘묵은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새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옛 언약인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것을 행할 힘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할 힘이 없었다.
하나님은 옛 언약인 율법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언약을 주셨다. 하나님은 더 이상 율법으로 대하지 않고, 새 언약을 통해 은혜로 대해 주겠다고 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그들이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줬다.
성령은 성도들을, 진리로 인도해 주고, 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법을 따르지 말고, 살아계신 법인 성령을 따라, 하나님을 위해 섬겨야만 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의 선행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려고 했다. 그들은 금식이나 고행을 통해서, 선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고행을, 반대하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이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대해준다. 그러므로 은혜의 법을 좇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노력으로, 율법을 행하려고 힘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낙망과 좌절뿐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율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라 봉사하라!”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구원했고,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공급해 준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살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이 보내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물 때에,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좇지 말고, 성령을 좇아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후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 봉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정욕을 따라, 죄 가운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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