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내용
•홈  >  말씀과찬양  >  설교내용
  제  목 : 2015년 12월 20일 - 죄에 죽어 하나님을 위해 살자(롬6:6-11)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5-12-20
  첨부파일:   죄에 죽어 하나님을 위해 살자.hwp(34K)

죄에 죽어 하나님을 위해 살자(6:6-11)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연합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연합하여, 무덤에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부활해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표시로, 믿음으로 침례를 받았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계속 죄 가운데 머무를 수가 없다. 구원받은 후에 계속해서 죄짓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죄의 세력을 멸하여,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를 좇아가던 옛 사람에서 해방시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에, 성도들은 죄를 이기고, 성화되어가야 한다. 성도가 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침례를 통하여, 우리 몸에 흔적으로 가지고 있다. 또 침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합하여, 부활했음을 알아야 한다. 죄 가운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한다.

1. 십자가는 죄의 세력을 멸하기 위한 것이다(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것을) ‘우리가 알거니와’(투토 기노스콘테스), 계속 경험으로 알고 있다(분사).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침례를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알고 있다고 선언했다.

옛 사람은 아담처럼, 죄의 본성을 좇던 성향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죄의 몸, ‘죄의 지배를 받는 몸’, 죄의 통제를 받는 몸을 말한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부터, 우리 안에는 아담처럼, 죄의 욕심을 좇는, 자기중심적 본성이 생기게 되었다. ‘죽어’(카타르게오)는 카타(아래) + 알고스(고용되지 않은, 무용의) ‘완전히 쓸모없게 하다’, ‘폐지하다.’는 뜻으로, ‘패배해서 권세를 빼앗긴 것을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던 죄의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죽어 패배함으로, 권세를 다 빼앗기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살아남으로, 죄의 세력이 더 이상 우리에게, 폭군 노릇을 하지 못하도록, 그 권세를 빼앗아 버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려면, 그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인이 감옥에서, 자기 형기를 다 마치면, 그는 더 이상 경찰이나 판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기 죄 값을 모두, 지불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모두 지불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더 이상, 죄와 사망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죄와 사망이 우리를 지배할 권세를, 잃고 말았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동인, 동신), 여순사건 당시 좌익 학생(안재선)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그 좌익 학생은 체포되어, 살인죄로 기소되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좌익 주동 학생의 사면을 요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짐으로, 그 좌익 학생은 풀려나게 되었다.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잃은 슬픔이 컸지만, 이미 죽은 아들로 인해, 다른 젊은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두 아들을 죽인, 좌익 주동 학생(안재선)을 양아들로 삼고, 동인·동신 두 아들이 못다 한 일을 하라고, (손인신)이라 지어주며, 양아들을 삼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더 이상, 경찰이나 판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미 그가 지었던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법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죽지 않았기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2. 연합했으면, 부활로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된다(8-9).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줄도 믿는다!’고 말했다. ‘죽었으면’(아페네스코), 아포(떨어져서) + 네스코(죽다) = ()에서 떨어져 나와 죽었다고 했다. ‘함께 살다.’(쉬제소멘), (함께) + 자오(살다) ‘공동의 삶을 계속하다, 공동으로 생존하다.’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 지낸 바 된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공동의 삶을 살고 있기에, 그들은 더 이상 죄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알고 있다.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다시 죽지 아니 한다.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퀴리유에이, 통치하다, 지배하다, 주가 되다.) 못할 것이다. ‘그를그로부터’(탈격) 주장하지 못한다. 그로부터 주인이 되지 못한다.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된다. 사망이 주인이 되면, 성도의 신앙은 헛것이 된다(고전15:14).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가 죽었으나 부활함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에 연합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에게 속하여,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죽지 않을 것이며, 사망은 예수님을 주관할 수 없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영원히 살아계시며, 사망 권세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10) “그가 죽으심은 ()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단번에(엡하팤스, 오직 한 번) 죽음을 당했다. 한 때에(옛날에)라는 의미의 포테가 사용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한 후에,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히 살아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몸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3.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여기라(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여길지어다.’(로기조마이) ‘간주하다, 생각하다.’이고, 명령형이다. 이 말은 회계사들이 전문적으로 사용하던 말이다. 나의 계좌에 입금이 되었으면, 현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여기라고 할 때, 쓰는 말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1)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 실제로 죽지 않았는데, 그렇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여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죄 지을 일이 생각날 때 막 성질이 나려고 할 때 나는 죽었다.”라고 끊임없이 자신을 죽은 자리에 놓아야 한다.

(2)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 우리의 새 생명은, 옛 생명이 개선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생명이, 이전된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이다. 따라서 새롭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서 해방되고,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죄와 결별하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

손 목사님의 요청으로, 무죄선고를 받고 양자가 된 좌익 학생은, 더 이상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죄는 모두 사면되었고, 손 목사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하거나, 의기소침해할 필요가 없다.

이제 자신을, 대한민국의 시민인 동시에,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로 간주해야 한다. 바울은 이처럼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향해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여기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어떤 부자 친척이 죽을 때, 다른 친척이 없어서, 먼 친척뻘 되는, 제 이름으로, 1조원을 예치해 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 그 사실을 통고받고 나서,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 “미안하지만, 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꺼내 쓰려고 생각하지 못한다.

여기지않으면, 그것이 실제로, 우리의 삶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존재이지만,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을, 늘 확인하라. 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매장 당했다. 왜 여기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2가지로 말할 수 있다. 용서하는 은혜와, 부어주는 은혜다. 똑같은 은혜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모든 범죄를, 용서해 주셨다. 용서하고 감싸주는 은혜다.

돌아와서 아버지께 효도하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면서 받는 은혜는, 부어지는 은혜, 승리의 은혜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은혜만 알고, 승리하는 은혜를 모른다면 잘못이다. 죽기 직전에 깨달은, 삼손의 은혜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무엘, 요셉과 같이, 쓰임 받는 은혜도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기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새 생명 안에서, 넘치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면서 살아가기 바란다.

 "

  이전글 : 2015년 12월 13일 - 죄를 이기려면(롬6:1-5)
  다음글 : 2015년 12월 27일 -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나(왕하2:1-14)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