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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5년 12월 13일 - 죄를 이기려면(롬6:1-5)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5-12-13
  첨부파일:   죄를 이기려면.hwp(38K)

죄를 이기려면(6:1-5)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매우 아름답게 묘사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은혜 안에 서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죄에서 벗어나서,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과정도 없이, 믿는 즉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율법이 주어짐은, 사람의 죄를 더하기 위해서였고, 죄가 많이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율법이 해롭고,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러한 의심과 비난에 대해, 하나씩 대답한다. 믿음의 법은 결단코, 성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의 법이, 율법보다, 행위보다, 월등한 의를 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되어져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1.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다(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앞에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다. 죄를 더 짓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아직 몰랐던 죄까지도,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율법은 죄를 보게 하는 거울이다.

바울은 우리가 죄에서 용서받은 성도라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말했다. ‘죄에 거하겠느냐?’(에피메노) 에피(위에, 가까이) + 메노(머물다, 거하다), ‘죄에 머물러 산다.’는 말이다. ‘그럴 수 없다.’(메 게노이토)고 했다. 결코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 될 수 없다.

죄에 거한다.’는 말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받은 것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에,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그러니 유다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가?’ 이런 말과 똑같이, 잘못된 말이다. ‘믿음의 법은, 죄를 허용한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행위와 관계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은, 더 큰 은혜를 입었다. 그렇다고 구원받은 후에,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이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은, 죄에 대한 관계를 다 청산하고 이별했다는 의미다. 우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죄인으로 선고받고, 사망의 노예가 되었다. 그때 우리는 육체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저주 속에 살았다.

죄의 빚을 갚기 전에는,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의를 행하고 싶어도, 행할 수 없었다. 우리의 의지보다, 죄의 세력이 더 컸기 때문에, ‘의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었다. 의를 행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의 빚을 모두 다 청산해 주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함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지불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 값을 지불하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우리는 마침내 죄와 모든 관계를 청산하고, 죄에 대해서 결별을 선언했다.

허준은 동의보감을 쓴 유명한 의사다. 그는 젊었을 때에, 밀수를 주도한 범죄자였다. 천민으로 나라의 법을 어겼고, 또 법으로 금지된, 양반규수와 결혼했다. 그는 이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십여 년 간, 자기신분을 숨기고, 숨어서 살았다.

그러다가 좋은 의원을 만나서, 의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열심히 의술을 연구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았다. 후에 내의원고시에 합격해서, 왕자를 돌보는 궁중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기가 과거에 지은 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해서, 항상 가슴을 졸이면서 살았다.

그가 지은 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였다. 그런데 왕의 호위대장으로 임명된 사람이, 허준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결국 과거의 죄가 드러나서, 참수당하거나 귀양을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와 아내는 옥에 갇혀서, 엄한 문초를 받았으며, 그 소식을 들은 홀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졌다.

그때 왕은, 그의 공로와 뛰어난 의술을 인정하고, 그를 용서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안된다고 상소했기에, 왕은 할 수 없이 그를, 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왕이 총애하던 빈이 쓰러졌다. 아무도 그녀를 살려내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할 수 없이, 다시 허준을 불러내서, 빈을 치료하게 했다. 허준은 성심을 다해, 빈을 돌본 결과, 그녀를 다시 살려낼 수 있었다. 이 일로 왕은, 자신의 권한으로, 허준에게 특별사면령을 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에 지은 죄로, 두려워하면서, 숨어 살지 않아도 되었다.

허준이 용서받았다고 해서, 다시 밀수꾼이 되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허준이 사면을 받은 후에, 다시 밀수하고 나라 법을 어긴다면, 난처한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사면 받은 후에 계속불법을 행하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기를 사면해 준, 왕의 뜻을 악으로 갚는 것이 될 것이다.

다행히 허준은 사면받은 후에, 자기의 남은여생을,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하는 일에 바쳤다. 이런 원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의 죄를 특별히 사면해 주셨다. 이제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계속해서 죄에 머물러, 살 수 없다.

어찌 우리가 그 안에서, 더 살겠는가? 이제 우리는 남은 인생동안,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또 우리를 용서해 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2. 알지 못하느냐(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알지 못하느냐?’(아그노에이테) (부정어) + 노이에오(마음을 사용하다, 마음에 두다, 이해하다, 생각하다.)이다. 알아야만 죄를 이길 수가 있는데,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침례를 받았다’(에밥티스).

침례는 염색하다, 잠그다’(밥토)에서 왔다. 하나 되었다, 연합되었다는 말이다. ‘합하여’(에이스)밖에서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합하여라는 말에 연합과 일치가 있다. 운명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되었기에 우리라는 말이 강조된다.

참된 침례를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확인하고, 도장을 찍는다. 침례가 바로 이렇게 죽었다는 표현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침례를, 그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침례를, 받았음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다.

예수님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침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었다. 침례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되었다. 믿고 침례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되어 죄 값인 사망을 지불했다.

장사되었나니죽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장사다. 어떤 사람들은 매장하기 전에, 관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매장되고 나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 완전히 죽었다는 말이다. 중생하기 전에는, 죄에 대하여 살아있었지만,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게 되었다.

아버지의 영광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 일으킴을 받은 것과 같이, 새로운 생명 가운데 행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영광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침례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아니라, 부활에도 참여했다.

침례는 몸을 물속에 푹 담갔다가, 다시 일으킴을 받는다.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는 약식이기에, 이러한 표현을 할 수 없다. 그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물속에서 일으킬 때, 예수님과 함께 살은 것이다. 물론 침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훨씬 더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인 신앙의 표시로, 침례 받은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죽음에 참여한 사람이다. 침례예식은 과거에 지은 죄로 죽고,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남을 말한다.

죄에 매여, 죄를 지으며 살던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의 사망을 통해, 모든 죄 값을 지불했으니, 더 이상 사망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서, 무죄를 증명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성도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더 이상 죄와 사망에게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했다면, 연합한 자가 되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죽음과, 연합한 부활의 영광을 생각하다면, 새로운 생명의 영광을 맛볼 수 있다. 죽고 다시 살았다는 연합관계를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이면, 큰 위로와 확신을 갖는다.

죄에 쉽게 끌려가지 않는다. 죄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고, 즉시 회개하고 돌아온다. 죄에 머물지 않기에, 거기에 오래 머물 수 없다. 죄를 범했다고 해도, 그 범죄가 우리의 구원을 흔들지 못한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문제를 놓고 의심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 생명이다. 예수님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성도들은 구원받은 후에 과거로 돌아가서, 죄들 가운데 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임금님이, 시찰을 나갔다가,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서,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거지 소년을 보았다. 그런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그 거지 소년을 데리고, 궁궐에 들어와, 대신들 앞에 서서, ‘오늘부터 이 소년을 내 아들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이제 분명한 왕자가 되었다.

그 순간 그 거지는 죽었고, 새로운 왕자로 태어난 것이다. 저녁에 잘 시간이 되었는데, 왕자가 막 대궐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신하들이 어디 가느냐고 묻자, ‘다리 밑 명당자리를 빨리 가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했다. 신하들은 왕자님이 주무실 곳이 대궐 안에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아침이 되자, 이 왕자님이 다시 대궐 밖으로 달려 나간다. 시녀들이 좇아가면서 왕자님 어디에 가십니까?’하자, 내가 세수하는 곳은, 다리 밑에 있다고 하자, 세수하실 곳이 대궐 안에 준비되어 있다고 했다. 왕자가 왕자다운 행동이 나타나려면, 거지의식을 버리고, 왕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거지는 죽었고, 새롭게 왕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당분간은 거지같은 행동이 계속될 수 있다. 오랫동안 거지같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연합하고, 본받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 얻은 우리는 죄에 거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 죽었고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침례를 통해 경험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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