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11월 29일 - 소망 중에 살아갈 이유(롬5:5-11)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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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중에 살아갈 이유(롬5:5-11)
믿음으로 의인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장차 완성될 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을 가지고 기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시련과 핍박도 기뻐한다. 이런 시련과 핍박을 통해, 자녀의 인내심과 성숙한 인격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성숙한 인격을 갖추고, 장차 이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기를 원한다. 성도들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성도들이 가진 소망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 설명하고 있다.
1. 소망의 근거가 되는 성령(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성도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성도들이 살 때 환난과 박해를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소망을 갖고 있기에, 환난과 박해에 좌절하지 않고, 멸시와 천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환난과 박해가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임을, 증언하기에 자랑스럽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약속한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힘들고 어렵지만, 내가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환경에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부모는, 자기 자녀들을 사랑한다. 자녀들의 사랑은 변할 수 있지만, 부모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크고 온전하며 불변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에케쿠타이, 붓다, 쏟아내다, 수여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부어졌다. 한없이 풍성하고, 변함이 없다. 인색하지 않고, 크고 넓다. 부모님은 자녀들을, 조건 없이 사랑한다. 자녀들을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난 자녀들은, 사람들을 신뢰하고, 위기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이미 부어졌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다(롬8:9).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삼고, 보증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었다.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영은, 종의 아니라, 아들의 영이다. 아들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보증(알ㅎ라본)한다. ‘알ㅎ라본’은 계약을 법적으로, 유효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성령님은 자녀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도와주신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모두 안다(고전2:10).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자녀들은 어떤 환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을 증언할 수 있나?’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이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가? 바로 십자가 앞에 섰을 때다.
2. 대신 죽음은 사랑의 확증(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를 3가지로 표현했다. ① ‘연약할 때’(아스논)라고 했는데, ‘무력한 자’라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자다.
② ‘경건하지 않은 자’(아세본) ‘경외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나있던 사람이다. 하나님을 거슬리는, 추악한 성품을 보고, 알고도 계속 사랑했다. ③ 죄인(하마르톨론)은, ‘하나님의 목표를 빗나가, 방황하는 사람’이었다. 자식도 계속해서 방황하면, 꼴 보기 싫다.
이런 나를 하나님은 사랑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카이로스), (정해진 때에)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죽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연약하고, 불경건하고, 죄인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배반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약대로’(카타 카이론)라고 번역된 말은 ‘가장 적절한(알맞은) 때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력해졌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있을 때에, 가장 크게 나타났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정해진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은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이때는 하나님의 모든 뜻이 완성되는, 역사의 마지막 시기다.
우리 중에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용감하게 죽는 사람이 있다. 의인은 ‘정의를 존중하고 탈선하지 않으며, 칭찬과 존경받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선인은, ‘공정하고 자비로우며, 사랑 받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며, 존경하는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목숨을 포기할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목숨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사형수)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의 차이다. 우리 중에 누가, 죄지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잘못된 길만 찾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보다 더 큰사랑의 증거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셨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여 변명할 수 없다. 우리 부모님의 사랑도, 이와 비슷하다. 부모님은 자녀가 잘 될 때에도 사랑하지만, 그 자녀가 잘못된 길을 가도, 사랑한다. 부모는 자녀가 불구가 되거나, 사형수가 되어도, 여전히 그들을 사랑한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이 불구가 되거나, 사형을 당해도, 자녀들을 구하려고 할 것이다. 세상 부모도 자녀를 이렇게 사랑한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자녀들을 사랑하겠는가? 성도들은 이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하게 살 수 있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원수도 용서하고, 살 수 있다.
3. 하나님의 진노에서도 구원을 받는다는 소망(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의 소망은 무엇인가?
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하심을 입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 죄인들의 죄 값을,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대신 받았다. 그 피를 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의롭다고 ㅎ했다.
② 의롭게 된 사람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장차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분명히 이 땅에 쏟아지나, 무죄선언을 받은 성도들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얻은 의롭다하심은,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했다.’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중단되지 않았다. 원수 된 죄인들과, 화평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죄인을 위해 죽게 했다.
원수 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웠다. 예수 그리스도로 죄 값을 지불하고, 죄인을 용서했으며, 그들에게 내린 진노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 중에서 살려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했다. 추수 때에 거둔 첫 열매는, 나중에 거둘 모든 곡식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려준 것은, 장차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다시 살려줄 것을, 약속해 준 것이다. 첫 열매가 되어서,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모든 영광에 먼저 들어갔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었다.
아직 우리에게 부활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장차 누릴 영생의 모습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우리의 구원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구원의 증거이며, 확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또 한 가지 결과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즐거워한다.’(카우코메노이, 분사)는 ‘기뻐한다, 자랑한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된 유일한 백성이며, 율법과 할례를 받은 민족이라고 자랑했다. 이방인들은 지혜와 명예, 재산을 자랑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성도들은, 하나님을 자랑한다.
성도들의 자랑과 기쁨의 근거는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한 하나님이다. 성도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뻐한다. 성도들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리스도가 계심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어주고,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다. 성도들은 자기 행위나 지혜를, 자랑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자랑하고 기뻐한다.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부활에 참여할 것을 확신하기에, 고난 속에서도,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즐거워한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져, 성령이 확증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않았을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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