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11월 8일 - 실로암에서 눈을 씻으라(요9: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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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에서 눈을 씻으라(요9:1-7)
지난번에 나눈 (요7장)은 초막절의 7일에, (요8장)은 8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다. 이틀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무려 두 장에 걸쳐서 기록했다. 요한은 초막절이 유월절과 함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9장)은 예수님이 행한, 한 가지 이적이 기록되는데, 초막절과 관련이 있다. 날 때부터 맹인인, 청년의 눈을 고쳐주는 이적이다. 그런데 맹인을 볼 수 있도록, 빛을 준 일은, 그냥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메시아의 일이었다. (시146:8上)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라고 했다.
(사29:18下)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35:5上)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라고 했다. 맹인이 눈을 뜨는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요한은 증언한다. 안식일에 맹인이 눈을 뜨는 이적이 일어나, 자연스럽게 안식일 논쟁을 낳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눈 뜬 맹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맹인이 눈을 뜨는 모습을 통해, 어떻게 맹인이 눈을 뜨고 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이 청년의 분명한 증언을 듣고도, 예수님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믿고 순종한 맹인 청년을, 신앙으로 인도해주신다.
1.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1-2)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고쳐준다. 맹인을 치유한 것은, 예수님이 (8:12中)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확증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맹인을 고친 일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지만,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고친 일은 본문에만 기록되었다. 제자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가, 왜 맹인으로 태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유대인들은 질병과 실패가, 죄 때문이라는 인과응보를 믿었다. (시89:32)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출20:5中)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은, 죄 때문에 일어났다고민 알고 있었다. 죄가 없다면, 벌이 없다며, 환자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정죄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이런 병에 걸리느냐?, 저렇게 가난하게 사느냐?’면서 멸시했다.
현재 모습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생에 죄가 많아서…’라고 말을 한다. 이런 말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기에, 맹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누구 죄 때문인지 궁금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맹인은 유월절과 함께, 최고 명절인 초막절 행사에,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맹인에게는 초막절의 축제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당시 맹인과 같은 장애인은, 부정한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이런 부정한 사람은, 성전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치료했다. 예수님의 생각은, 당시 사상과 달랐다. 하나님은 부모의 죄로, 아무런 죄도 없는 자녀들을, 고통에 몰아넣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맹인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다.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 사람과 부모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할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라 했다. 그 청년이 맹인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보셨다.
우리는 흔히 누가 고통을 당하면, 그가 죄를 지어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하나님은 때로, 인간의 죄를 징계하고, 바로잡기 위해,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실 때가 있다. 그러나 항상 인간의 고난이, 그들의 죄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에게 고난을 허락할 때가 있다. 욥과 요셉이 당한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었다. 따라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볼 때, 무조건 그들이 죄를 지어서, 고난당한다고 생각하고, 정죄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욥을 비난하는, 욥의 친구들을 책망했다. 따라서 고난당하는 사람을 정죄하면,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된다.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소망이다.
고난당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는 맹인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더 큰 목적들을 위해, 쓰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고난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기회가 된다.
2. 때가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4-5).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지금은 낮이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때가 아직 낮이라’는, 예수님이 일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인류구원의 일을 위해, 시간을 정해 놓았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지금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인류구원을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이때가 지나면, 곧 밤이 오고,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은 무엇인가?
① 맹인에게 빛을 주시는 일이다. ② 맹인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이다. ③ 맹인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맹인과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허락된 때에, 잃은 영혼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세상에는 진리의 빛이 비쳤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어둠의 세력이 세상을 위협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겠다고 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기간은 곧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예수님은 그 때가 가까워 올수록,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으라는, 예수님의 호소도 더 강렬해진다.
(요12:36上)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빛이 되는 방법은, 빛이 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며, 구원하는 빛이다. 오직 그 안에서만, 사람들은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낮이다.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어두움이다.
밤과 관련해서, 예수님을 빛이라 함은, 자신이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신의 사역의 의미를 밝힌 후에, 맹인의 시력을 회복시켜줌으로,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지금까지 그 맹인은, 논의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과, 계시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그에게 무조건 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왜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하는가? ①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② ‘때가 아직 낮이니’ 아직 낮이기 때문이다. ③ ‘밤이 오리니.’ 밤이 오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이 오고 있는, 긴박한 상태를 의미한다.
3. 보냄을 받은 맹인이, 밝은 눈으로 돌아옴(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은 허락된 시간에 쉬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 맹인 된 청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은 후, 그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그 청년의 눈에 발랐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그의 눈을 씻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면 왜 청년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씻으라고 했나? 침이 활용된 경우는 2가지 경우다.
(1) 유대 사회에서 침은, 몸에서 나오는 액체로, 더럽게 인식되었다. (레15:8) “유출병이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고대사회 사람은, 침에는 약효가 있다고 믿었다.
(2) 침이 치료로, 사용되었다. (막7: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막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그러면 침이 약효가 있기에, 예수님이 침을 뱉었나? 왜 이렇게 했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다. 각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자기 능력을 나타냈다. 침을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한 재료로, 사용했다.
침을 뱉어 만든 진흙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익숙하게 사용된 상징적 용어다. (사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그래서 침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권능의 근원을 상징의 말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근원을 성령이라 했다(요7:38-39). 따라서 흙과 침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사용한 2가지 재료, ‘흙과 생기’를 상징한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으로 활동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진흙으로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예수님도 진흙으로 맹인의 눈에, 빛을 창조해 주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치유 활동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된다.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은 맹인에게, 눈을 씻으라 한 곳은 ‘실로암 못’이었다. 신약성경은 이곳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요한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을 위해 ‘실로암’의 의미(보냄을 받았다.)를 설명한다. 살라흐(보내다, 인도하다.) + 암(백성) =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되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보냄을 받은 자에게, 씻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보내다는 동사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어다. 예수님은 보냄을 받은 자요, 보냄을 받은 자는, 맹인에게 빛을 제공한다. 이는 생수의 근원으로서, 자신을 제공함과 같다.
(사8: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이스라엘이 실로의 물을 거절했다 했는데, 실로는 신약에서 ‘실로암’으로 불렸다. 이런 면에서 실로암 못은, 생명의 빛을 거부하는 유대인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맹인에게 순종을 강조했다.
요한은 여기에서 ‘보냄을 받았다.’는 실로암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고, 세상에 와서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또한 예수님은 맹인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냈으며, 보내심을 받은 맹인은 눈을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
예수님과 맹인은 모두다, 보냄을 받았으며, 보내신 분의 일을 수행했다. 실로암 연못은 영적으로, 파송과 순종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교사다. 그 곳에서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수행해야 한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은 맹인이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침에, 어떤 치료의 약효가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지도 않았다. 그 맹인이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의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음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맹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요한은 보냄을 받은 예수님이, 맹인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는 것과, 그러한 눈을 뜨는 역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은총을 거절했다. 순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메시아로 오셨다. 예수님은 기쁨의 명절인 초막절의 관제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바라만 보던 맹인에게,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 하심은, 늦었지만 초막절의 기쁨에 동참하라는 말이다.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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