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10월 4일 - 생명의 면류관(체육대회)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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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면류관(계2:8-11)
오늘은 체육대회가 있다. 체육대회를 통해,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 승리는 참 기분 좋고, 신나는 말이다. 승리의 환호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큰 감격을 준다. 승리하면 큰 기쁨이 있지만, 패한 자는 비참함이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승리의 면류관이 나온다. 면류관은 2개가 있다.
① ‘디아데마’(διάδημα)이다(계12:3, 13:1, 19:12).
디아데오(διαδέω, 둘러매다)에서 나온 말로, δια(~함께) + δέω(묶다, 매다)인데, ‘머리띠, 왕관’을 말한다. 이는 왕권, 권력의 상징으로 쓰였다. 왕이 쓰는 왕관을 크라운. ‘디아데마’라고 한다.
② ‘스테파노스’(στέφανος)이다(계2:10, 고전9:25, 딤전4:8, …18번 나온다.)
스테포(둘러싸다)에서 유래했으며, ‘면류관, 왕관’을 의미한다.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이 쓰는, 월계관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승리, 축제, 명예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스테파노스’는 승리의 표상이다. 본문에 ‘스테파노스’가 나오는데, 오랫동안 수고하고, 훈련하고, 인내하고, 절제했을 때, 나타나는 면류관을 말한다. 신앙의 승리자 스데반이, 이 말에서 왔다. 운동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잠깐 뛴다. 불과 몇 시간, 혹은 1분, 아니 어떤 것은, 10초면 경기가 끝난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는가?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하고, 인내하고, 참고, 젊은 사람들이 절제하고, 그 많은 수고 끝에, 승리의 영광을 누리게 될 때, 그에게 씌워주는 면류관을, 스테파노스라 말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에 하신 말씀이다. (계2장과 3장)은 예수님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각기 하신 말씀이다. 앞의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았다. 일곱 교회 가운데, 네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도 받고 책망도 받았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의 책망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한 박해 속에서도, 처음 사랑을 끝까지 잘 지킴으로, 예수님의 칭찬만 받았다. 우리는 예수님께, 책망 받을 일들은 고치고, 칭찬 받을 일들에만 힘쓰기 바란다. 어떻게 해야 칭찬받고, 면류관을 쓰는 자가 될까?
1. 어떻게 할 때 칭찬을 받았나?(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서머나의 이름은 (몰약)인데, 성도들의 신앙 절개가 몰약과 같이, 향기를 뿜는데서 생긴 이름이다.
현재 터키에서는 이곳을 ‘이즈밀’이라고 부른다. 당시 서머나에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서있었다. 서머나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황제를 섬기는, 신전에 올라가야만 했다. 그리고 “가이사(황제)가 나의 주”라고 고백하면서,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당시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주후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서머나로 피난 가서, 회당을 세우고, 유대주의 사상으로 무장하며, 그들의 세력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곳에 복음이 전파되어, 서머나 교회가 세워졌다.
자연히 서머나 교회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자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다. 또 유대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들로부터도, 심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2가지로 묘사되었다.
① ‘처음과 마지막’(사44:6).
하나님은 스스로를 ‘처음과 마지막’이라 했다. 처음과 마지막은, 예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칭호다. 예수님은 이 칭호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생하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셨다.
②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영원하기에, 본질상 결코 죽을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죽으셨다.
육신으로 오셔서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사셨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칭호를 통해, 부활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셨다. 서머나 교회는 박해로 죽음을 당했지만, 순교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임을, 말씀으로 위로했다.
예수님이 죽었지만, 살아난 것처럼, 우리가 실패하고 쓸어졌어도, 성공으로 살아날 수 있다. 넘어져 쓰러지고 패배했어도, 다시 일어나 승리할 수 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역사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믿음을 격려함으로, 승리의 틀을 마련하기 바란다.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겪고 있는 3가지 아픔을 알아주면서,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고 칭찬해주었다.
(1) 그들의 환난을 알아주셨다. 서머나는 황제숭배의 중심도시지만, 황제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결코 가이사를, 주라 고백하지 않았다. 주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었다. 그래서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여러 가지 환난으로 처형까지 당했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시인했다.
(2) 그들의 궁핍도 알아주셨다. 서머나는 부요한 도시지만, 교회는 궁핍했다. 가난한 사람만 서머나 교회에 들어왔는가?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이, 일부러 칭찬할 일은 아니다. 박해자가 그들의 소유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니까, 환난과 궁핍이 있었다.
(히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했다. 하늘에 많은 보물을 쌓아두었기 때문이다.
(3) 비방(중상, 모독)을 받고 있음을 알아주셨다.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있었다. 유대인만 ‘여호와의 총회’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자칭 유대인이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임을 ‘여호와의 총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당’일 뿐이라고 했다. 사탄은 서머나 교회를 쓰러뜨리기 위해, 유대인을 자기 도구로 사용했다. 그런 가운데도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다.
우리도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처음 사랑을 끝까지, 잘 지켜나가자. 말씀을 따르자. 그래서 서머나 교회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 바란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실상은 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니라.’ 이런 복이 넘쳐나기 바란다.
2. 예수님의 당부(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해, 2가지를 당부했다.
①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과 비방을 알았다. 그러니 ‘이제는, 곧 상황이 좋아질 것이니, 안심하라!’하지 않고, 고난을 받게 된다고 했다.
마귀는 장차, 서머나 교회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서머나 교회를 대적했던 자들이 유대인이었든지, 로마인들이었든지 간에, 그 주체는 결국 마귀였다. 마귀는 고난의 목적을, 시험을 받아 예수님을 떠나게 하지만, 예수님은 시험을, 테스트와 훈련의 기회로 삼는다.
시험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사탄은 성도를 시험할 수 있다. 예컨대 사탄이 욥을 시험한 것도, 하나님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은 욥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고난의 기간은, 십 일 동안이었다. 십 일은,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
십 일이 아니라, 십 년의 고난이라도, 장차 살아가게 될, 영원한 삶에 비하면, 극히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하고, 일시적이다.
②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서머나 교회가 장차 받을, 십 일 동안의 환난이 끝나고 나면, 그 결과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옥에서, 풀려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고 당부했다.
만일 옥에서 풀려난다면, 아직도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닫고, 더더욱 생명 다해, 충성해야 할 것이다. 만일 처형당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변함없이 충성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했다. 충성했으니 영화로운 관이 주어지고,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잠시뿐이다.
그러나 장래에 우리가 누릴 영광은, 영원하다.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이 당부하신 대로, 우리가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자.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자. 그리함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관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3. 예수님께 받은 약속(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언제나 똑같이 말씀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각 교회의 사자는, 예수님의 편지를, 성도들 앞에서 읽어줄 것이다. 각 교회의 사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다.
듣는 이의 귀를 열어주고,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각 교회의 성도들이, 그 교회의 사자를 통해,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박해로 인해서, 첫째 사망의 고통을 당할 수 있었지만, (계20:6) 말씀처럼,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예하기에, 둘째 사망의 해를 결코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더불어,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극심한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의 비방 가운데서도 인내하면서,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했다. 그 결과 그들은 생명의 관을 받았다. 현재 일곱 교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회는, 서머나 교회뿐이다.
폴리갑 기념교회인데, 현재도 그대로 존속한다.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86세에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사자였다. 박해자들은 폴리갑을, 노천극장으로 끌고 갔다. 그때 로마 총독이 회유의 말을, 폴리갑에게 던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용서해주겠다.
그러자 폴리갑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86년간 예수님을 섬겨왔는데, 그 분은 단 한 번도 내게, 해를 끼치신 일이 없소. 그러니 내가 어찌,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겠소?” 총독은 폴리갑에게, 최후의 통첩을 했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을 화형에 처할 수밖에 없소.”
그때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한 시간 타다가, 꺼지고 마는 불로써, 나를 위협하지만,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심판의 불에 대해서는 알지를 못하고 있소. 주저하지 말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시행하시오.”
그 날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었다. 그런데도 그곳에 있던 많은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규례를 어겨가면서까지, 자진해서 나무들을 잔뜩 들고 왔다. 얼른 폴리갑을 처형해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폴리갑은, 86세의 나이로 화형에 처해져서, 순교했다.
서머나 교회에 비하면, 너무 안일하고, 나태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가? 체육대회를 맞이하면서 서머나 교회처럼, 열심히 하자.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날까지,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다,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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