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 9월 27일 - 더 나은 본향(히11:13-1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0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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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히11:13-16)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 장에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귀중한 믿음,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한, 믿음의 특징들을 소개한다. 그들이 나왔던 땅의 본향을, 생각하지 않았다. 믿음의 영웅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본향(파트리스)은, ‘조국, 고향’으로, 땅에 있는 육신의 고향을 뜻하지만, 더 나은 본향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 천국을 의미한다. 그들은 천국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천국을 사모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기뻐했다.
오늘 주일은 추석이다. 많은 분들이 고향에 갔다. 부모님과 친지들을 만나 뵙고, 인사하는 일은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더 나은 본향, 천국이 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바란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다.
1.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으로 증언했다(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살았지만, 생전에 약속의 땅을, 받지 못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를 불러, 새로운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는 동안, 약속의 땅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땅은 고작,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매장할, 소유지가 전부였다.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거했지만, 그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 곳에 정착해서, 살 수 없었다. 그들은 이방 땅에 있는 것 같이, 장막에 거하면서 계속해서, 옮겨 다녔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약속을 받지 못했다. 야곱이 죽은 지, 오백 년이 지나,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정착했지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다. 약속을 받지 못했지만,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멀리서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했다. 추석을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님을 반갑게 만나서,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리라고 했다.
언제 어떻게, 그 약속을 이룰 것인지, 말씀하지 않았다. 땅을 주겠다는 약속만 했다. 한 가지로도 그들은 충분했다. 하나님이 약속했으니,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 틀림이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비록 약속을 보지 못했지만, 필히 성취될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멀리서, 바라보면서 기뻐했다.
본문처럼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으로 증언했다. 당시에 외국인과 나그네에 대해, 몹시 배타적이며, 적대적이었다. (창23:4)에 아브라함은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이렇듯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했고, 실제로 이방 땅에 있는 것 같이 살았다. 장막에 거하면서, 언제라도 떠날 준비하면서 살았다. (히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본향을 찾는 자임을 나타냈기에, 거류하는 땅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지내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삶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함께 동거할 수 없었기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며 땅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롯은, 땅의 것에 집착해서, 소돔으로 갔다. 결과는 비극이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할 때, 롯은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그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잠시 살다 갈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 의식으로, 살기를 바란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죽을 때는 다 반납하고,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에 쌓아 두지 말자.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는, 하늘에 쌓아 두기를 바란다.
2. 더 나은 본향을 생각했다며 살았기에,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다(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믿음의 사람들은,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으로,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내며 살았다면, 그들이 찾는 본향은, 과연 어디 인가?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라는 말은, 그들이 나왔던 본향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기에,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은, 이 땅에 있는 그들의 고향, 곧 갈대아 우르를 뜻한다.
그런데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아브라함 때,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다. 만일 아브라함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얼마든지, 갈대아 우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다. 그 곳에는 우상을 섬기다가 죽은, 조상들의 무덤들이, 잔뜩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곳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흉년을 피해 잠시 애굽에 내려갔다가, 곧 다시 가나안으로 되돌아왔다. 반면에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를 지나갈 때, 그들의 몸은 출애굽을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출애굽을 못했다.
애굽 땅, 고기 가마 곁에 앉아서,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생각하며, 불평하고 원망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왔던 본향인, 애굽을 생각했다. 이처럼 믿음 없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과거 지향적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미래 지향적이다. 앞으로 갈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
(16上)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왔다. 약속한 땅도, 유업으로 받지 못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그들이 찾는 본향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에, 나온 바 본향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에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본향보다는, 앞으로 영원히 살 본향을 그리워했다.
그들은 더 좋고, 더 나은 편을 선택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했다. (고후12장)을 보면, 바울이 셋째 하늘, 낙원에 이끌려갔다.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은 더 나은 본향을 미리 경험했다. 자신이 경험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전의 나온 바 본향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바울은 더 나은 본향을 너무 사모했기에 (빌1:23)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이 땅에서 우리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간다.
때로는 외국인과 나그네 된 우리의 삶이, 외롭기도 하고, 고달플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늘 밝은 소망 가운데, 살기 바란다. 가는 세월을 아쉬워 말자. 변하는 산천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을, 항상 사모하자.
3.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16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을, 받지 못했지만, 믿음을 따라 살았다.
낙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죽을 때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믿음을 따라 죽었다. 이 땅에서는 장막에 거하면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살았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나왔던 본향을 생각하며,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끝까지 인내했다.
아래를 보지 않고, 위를 바라보았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만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본문말씀과 같이, 그들에게 2가지 복이 주어졌다. 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다. 그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을 보고, 기꺼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했다. (출3: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며(마22:32), 모세의 글에도 부활이 있음을, 사두개인들에게 밝혔다. 그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지만,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했고 지키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존중히 여기고,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허물이 많이 있기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기가 너무 죄송스럽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하나님을 불러보라. 세상에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 이 땅에서 실력 있는 사람과, 잘 알며 지내는 사이일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자랑거리가 된다. 하물며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서, 나와 함께 하며, 나의 삶을 책임진다면, 참으로 감격스럽다.
②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했다. 그들이 땅에서는, 장막에 거했다. 성을 지을 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놓았다. (히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들은 터가 없어서, 성을 짓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했다. (겔48:35) 말씀처럼, 그 성의 이름은 여호와삼마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이다. 세상 왕들이 사는 성도 화려하다. 하물며 하나님이 계획하고,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계신 성이니, 그 영화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계21장, 22장)은, 그 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그 성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지어졌다. 성의 문은 진주로 되어 있다. 그 성에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 또한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믿음의 조상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예비한 성을 바랐다.
그들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지 않고, 늘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그러기에 그들이 땅에서는, 장막에 거하며 힘들게 살았지만,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위에서, 우리를 부르실 날이 있다. 그때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미련 없이 끝낼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한 성, 우리가 사모하는 더 나은 본향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추석을 맞아, 많은 분들이 나온 바 본향을, 찾을 줄 안다. 잘 다녀오고, 주 안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란다. 그러나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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