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 8월 30일 - 하나님의 의(롬3:19-24)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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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롬3:19-24)
사도 바울은 이방 세계의 부도덕한 자들의 죄와, 도덕주의 자들의 죄, 종교적인 유대인들의 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낱낱이 지적했다. 모든 민족과 문화, 과학, 종교, 신자나 불신자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자기 의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우리 눈으로 보면, 죄의 세균이 없다고 여겨지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의 세균을 현미경으로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너무도 많은 곳에 득실거리기에, 죄의 증거가 너무나 명백해서, 아무 변명도 못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하나님의 진노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목적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심판 아래에 있음을 알아, 하나님 앞에서 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인인 줄 몰랐다. 율법은 죄에 대해 검사역할을 한다. 재판할 때에 검사는,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증거를 제출한다.
이때 검사가 피고인의 죄를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를 제출하면, 피고는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경우에 피고는, 오직 판사의 관대한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 율법도 모든 사람들이 죄인임을 입증할만한, 너무 분명한 증거를 제기한다.
따라서 율법의 고발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무죄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율법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게 만들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둠 속에 갇힌 사람들이, 심판받도록 했는가? No,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준비했다.
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다(21).
“이제는 (그러나, δὲ)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은 ‘이제는’(누니) ‘그러나’라는 말로, 새 단락을 시작한다.
우리 성경에는 ‘그러나’가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있다. 앞의 이야기 내용을, 전환한다는 뜻이다. ‘이제는’도, 앞의 내용을 전환해 준다. 이러한 두 마디 말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환한 빛이 비취는 밖으로 나온 것처럼, 모든 상황을 한 순간에 역전시킨다.
바울은 모든 인류가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그 동안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로 변명도 못한 채, 침묵해야 했다. 이로 인해 좌절과 낙망의 어둠 속에 갇혔다.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말로, 이 모든 어두움이 한 순간에, 빛으로 전환하고 있다.
정죄 당한 사람들을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의의 길로 안내했다. 행위와 율법으로 인해 정죄 받던 사람들을, 이제는 예비 된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변명할 수가 없어서, 침묵하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용서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율법 외에(코리스, 없이, 떨어져),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했다. 이제부터 소개하는 의는, 율법과는 관계가 없다. 이 ‘의’는 율법이나,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율법과 관계없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준비해 주셨다. 이 길은 ‘행위=상급’이라는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법이다. 인종이나 민족, 신분계급, 빈부귀천,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다.
바울은 이 길을 ‘하나님의 의’라 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위로 얻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의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민족, 계층, 연령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일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고 불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페파네로타이)고 했다. 그 동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 알려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해 놓고 그 동안에는, 숨겨두셨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구원의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주었다. 계시해주었다. 바로 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 비밀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이 비밀을 모든 민족들에게, 전하라고 했다. 이제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준비한 구원의 소식은, 더 이상 숨겨진 비밀이 아니다. 구원의 길은 마땅히,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민족이 듣고 구원받아야만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오래 전부터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증거 되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이 준비한 구원의 길을, 증언해 왔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메시아와 새 언약을 통해서, 인류에게 주어질 복음에 대해 증거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종을 보내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고난 받게 할 것을 예고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 했다. 하나님이 말세에,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줄 것이라 예고했다. 이처럼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증언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마침내 바울은, 자신이 예고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소개한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의는 행위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려고,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냈고,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이러한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누구든지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의’다.
이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약속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녀노소나, 빈부와 귀천을 구별하지 않는다. 요엘 선지자의 예고대로, 하나님은 말세에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고, 그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행2:21, 롬10:13) 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예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고 하였다. (23) “(가르,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했다. 우리 성경에는 ‘왜냐하면’이 빠져있지만, 앞에 나오는 말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준비해 준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방 세계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실패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들 역시, 이 일에 실패했다.
물론 타락의 정도에는, 족속과 계층 간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극도로 타락한 증상을 보이는 반면, 다른 사람보다, 약한 죄의 증상을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들의 죄는 고의적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어야 했다. 바울은 사람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무슨 뜻인가?
‘이르지 못했다.’(휘스테룬타이)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열등하다.’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부족(결핍)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결여(부족, 결핍)되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영광)을 나타내지 못했다.” 사람은 사단을 좇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저주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영광)을 나타내는데, 실패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지혜와 지식과 거룩함과 선함)을, 반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정욕에 이끌려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실패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그들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해 주셨다. 어떻게 예수님 안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가?
3. 속량과 칭의(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호의다. 인간의 행위나 공로도 없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인데, 어떻게 죄인을 값없이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을 무죄로 선언하면, 불의한 재판관이다. 판사는 죄인을 안다고, 불쌍하다고, 그에게 무죄를 선언할 수 없다. 만일 이렇게 하면, 자기 직무를 잘못한 일로, 처벌받고 권한을 박탈당하게 된다. 따라서 공의로운 하나님도, 죄인을 이유 없이, 무죄라고 선언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인을, 무죄로 선언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 때문이었다. ‘속량’(아폴뤼트로세오스)은 상업적 용어로, ‘값을 대신 주고 꺼내온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못해서, 많은 빚을 질 때가 있었다.
만일 이때, 그가 그 돈을 갚을 힘이 없으면, 자기 몸을 팔아(종이 되어)서라도, 그 빚을 갚아야만 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서, 재력 있는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라고 명령했다.
이때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형제가 종이 되지 않도록, 구해냄을 ‘속량’이라고 한다.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죄 값을 지불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보고, 자기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게 하여, 우리 죄 값을 대신 지불하게 했다(막10;45).
하나님은 이를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들을 무죄로 선언하지 않았다. 죄인을 무죄로 선포하기 위해, 매우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죄 값을 지불하는 방법은, 3가지가 있다. ① 죄인이 직접 형벌을 받는 것이고, ② 벌금을 내는 것이며(벌금형), ③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형벌을 받는 것이다(대형제도). 우리가 교통사고를 내고, 서로 합의한 후에, 합의금을 내면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우리나라에도 다른 사람이, 대신 형벌을 받는 제도도 있었다. 판소리 흥부가에, 흥부가 어느 양반을 대신해서, 곤장을 맞겠다고 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몸에, 곤장을 맞으면, 큰 변을 당하게 될까 염려하여, 아내는 한사코 만류한다.
그러나 흥부는 대신 곤장 맞고, 얻은 돈의 일부를 가지고, 몸보신을 하겠다고 한다. 이것이 대형제도다. 옛날에는 아예 전문적으로, 왕자나 귀족 대신, 매를 맞는 직책이 있었다. 이처럼 귀한 몸을 대신해서 매를 맞는 아이를, ‘whipping boy’라고 불렀다.
악용될 우려가 커서, 현재 우리나라는 실시하지 않지만, 대형제도도 장점이 있다. 늙은 부모님을 대신해서, 젊은 자녀가 매를 맞는 일은, 선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죄인을 의롭게 하려고, 대형제도를 사용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기 위해, 매우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독생자가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게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았지만, 하나님이 지불한 대가는, 너무나도 엄청나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사지를 잘라, 불에 태워 하나님께 번제 드리려 했을 때처럼, 매우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받아주며, 대신 양을 보내주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누구든지 이 일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칭의’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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