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 8월 17일 - 유대인의 궤변과 바울의 대답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08-16 |
첨부파일: 유대인의 궤변과 바울의 대답.hwp(34K) |
유대인의 궤변과 바울의 대답(롬3:1-8)
바울은 이방인의 죄를 지적했다. 또 양심적으로 산다는 사람의, 죄도 지적했다. 율법과 할례 받은 유대인도 죄가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율법과 할례 받고 행했지만,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들도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은, 우리는 선택받았기에, 예외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 선택받고, 율법을 받고 할례 받았는데, 심판을 받으면 되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이렇게 율법과 할례를 받은 특권을 무시한다고 했다. 이러한 유대인의 비난에 대해, 바울은 적절한 대답을 했다. 본문에서 홀수 절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궤변을 말하고, 짝수 절은 바울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1. 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언약을 손상시킨다는 말에 대한 대답(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됐다. 그런데 바울은 2장에서, 선택받고 할례 받은 유대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고 했다.
성령 없는 할례 의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 중에는, 그렇다면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만약 이방인과 같이 죄인이라면, 유대인의 특권이 무엇이고,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했다.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바울 사도는 이 질문에 대해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할례 받는 일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이 많다.’고 했다. ‘여러 가지 유익이 많지만, 한 가지만 들면,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졌다.’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에,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많은 특권을 가졌다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예수님을 믿을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특권이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에게도, 유대인같이 직접 나타나서, 계시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유대민족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며, 뜻이 무엇인지, 자세히 가르쳐줬다.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고, 그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말씀으로 기록한 후에, 그 계시를 유대인에게 위탁했다.
하나님의 신적계시를 받고, 위임 받았음은, 세상 어느 민족도 누리지 못한, 특권이다. 바울은 이 한 가지만 생각해도, 유대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특별한 민족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유대인의 특별한 위치와 축복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2. 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손상시킨다는 말에 대한 대답(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그 계획이 취소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신실한가?
선택된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순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아를 스스로 거부했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신실하다고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무효 되는데, 하나님의 신실함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의 불신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는(카타르게오, 쓸모없게 하다.) 것이 아니냐? 그러나 사도 바울은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은 바울의 주장대로 라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이, 유대인에게 무엇이 유익하냐고 질문하지만, 바울은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사람은 거짓되고,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일을, 끝까지 책임진다.
유대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 이방민족의 포로가 됐어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후손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를 (롬9-11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대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하지 못한다. 내가 진리를 무시했다고, 진리 자체를 파괴하거나,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을 인용했다. (시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했고, 악을 행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의로우며, 주님의 판단이 옳다고 했다.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고, 그 지적이 옳다고 동의했다. 그 후 하나님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다윗을 용서해 주셨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않게 행동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대해 주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않게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대해 준다. 인간의 신실하지 못한 행동이, 하나님을 신실하지 못한 분으로,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함을 드려내 주었다.
3. 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의를 배격한다는 말에 대한 대답(5上).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었다면, 유대인의 죄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진노할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유대인을 심판한다면, 불의한 분이 아니냐? 우리 죄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어찌 우리에게, 화를 낼 수 있는가? 이런 이야기와도 같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우리 죄가 용서 받았다.
자기 죄가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기에, 심판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궤변일 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궤변이 많다. 그래서 이상한 논리로, 하나님께 변명하고 대항한다. 궤변은 상대편을 이론적으로 이기기 위한, 거짓된 논리다.
인간의 불의와 믿음 없음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싫어하기에, 심판할 뿐이다. 그러니 가룟 유다를, 배신자 반역자라고 한다면, 잘못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오히려 잘 한 일이라고 하면, 이런 논리는 궤변일 뿐이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왜 하나님이 심판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5中-6) “…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라고 말했다.
심판하는 하나님이, 결코 불의하지 않다고 했다. 불의하다면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겠느냐? 사람이 말하는 대로, 나도 예기를 하면, 세상이 불의한데, 세상을 심판하는 것으로 보면, 의로운 분이다. 심판하지 않았다면, 불의하지만, 심판하시는 것을 보니, 의로운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울 때, 그 아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좇을 때, 자기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위해 죽게 했다. 따라서 우리 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는, 도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 지은 자에게 진노하고, 의로 분이다.
4.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악을 행하자는 말에 대한 답변(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 이렇게 바울에게 항의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해져, 하나님이 영광을 받았다면, 내가 왜 죄인처럼, 심판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은 내 죄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된 것을 보고, 나를 용납하고 용서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제가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올라와, 저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고, 침을 뱉었다.
이때 제가 대응하지 않고, 끝까지 설교했고, 내려와서 그를 용서했다고 하자.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저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정말 우리 목사님 멋있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그의 행동이 잘한 일인가? 바울은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행동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신실하게 대해 준 것은, 그들이 지은 죄가 옳았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한 일을 행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바꾸어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했다.
“바울이여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가 죄를 지어도, 결국 신실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많이 지을수록,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더 나타내기 위해서라도, 죄를 많이 범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들의 논리를, 바울이 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주장에 대꾸하지 않고, 비난받아 마땅한 이야기라고, 한 마디로 무시해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부당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어떤 단체는,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에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우리가 큰 죄를 지을수록, 그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크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큰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기에, 죄를 지어도 된다는 주장은, 궤변일 뿐이다. 우리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음을 아는데, 어떻게 다시 죄를 사랑하며, 그 가운데에서 살 수 있겠는가?
참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변호하지 않는다. 정당화 하지 않는다. 다윗처럼 “하나님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했다.”고 하며, 겸손하게 무릎 꿇는 사람이 된다. 유대인과 같이 변명하지 말고, 말씀 앞에 복종하고,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전글 : 2015년 8월 9일 - 유대인 너도 죄인(롬2:17-29) | |
다음글 : 2015년 8월 24일 - 사람은 모두 다 죄인이다(롬3:9-18)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