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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5년 6월 21- 바울과 복음(롬1:14-17)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5-06-21
  첨부파일:   바울과 복음.hwp(38K)

바울과 복음(1:14-17)

   바울은 자신을 소개한 후에, 복음을 소개했다.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2).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인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방문계획이 지연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매 맺도록 기도했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 복음을 전해도, 저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복음은 특별한 사람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원받은 자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 나는 복음에 빚진 자다!(14-15).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의 심정을 느꼈다. ‘은 남의 돈을 빌렸을 때에, 갚아야 할 채무이다. 은행이나, 사람에게 빚을 졌는데, 갚지 못해서, 독촉 받는 신세가 되면, 정말 괴롭다.

전화만 와도 빚 갚으라는, 독촉전화인 줄 알고, 깜짝 놀라고 누가 초인종만 눌러도, 불안해한다. 그러면 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는데, 왜 세상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느낌을 갖게 되었나?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일 제가 다영이에게 전해주라고, ○○에게 100만원을 맡겼다고 하자. 그러면 ○○는 다영이에게 100만원을 줘야만 한다. 바울이 빚졌다는 것은, 이와 비슷한 이유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에게 전해달라고, 복음을 맡겼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책임, 즉 빚을 지고 있었다.

만일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줘야 하는 것을 착복한 것이니, 책임져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바울은 사는 동안,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빚진 자의 심정을 가졌기에,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사도가 아니지만, 세상에 복음을 전할, 빚 진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의 종들을 보내셨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맡겼다. 복음은 특별한 사람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이 듣고, 구원받도록 예비 된 것이기에, 우리도 빚진 자의 심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만일 복음을 듣고 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남에게 줄 복음을, 전하지 않은, 책임이 따른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처럼, 복음의 빚을 진, 채무자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 복음은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예수님의 엄청난 대가가 있었다.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고통을 당하고 죽은, 예수님이 있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가? 너무 엄청나기에,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도, 하나님께 진 구원의 빚을 갚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 빚을 갚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은 불신자에게만 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복음은 날마다, 새로운 감동을 주고, 날마다 새로운 기쁨을 준다. 우리가 산수를 배울 때, 1+1=2라고 배운다.

그러나 1+1=2를 배웠다고, 수학을 다 배운 것이 아니다. 배우고 나면, 빼기, 곱하기, 나누기, 미분, 적분을 계속 배워야하는 것처럼, 복음은 계속 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고난당하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격과 감동이 사라진다.

점점 형식적이고, 율법적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초신자가 아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이다. 복음의 감동이 식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복음은 날마다 전해야 한다.

2. 나는 복음을 자랑한다(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복음이 자랑스럽다는 말이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다.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스칸달론, , 올가미, 함정)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대 근동 역사자료나, 성경에는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이해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가장 무서운 저주요, 형벌로 이해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와 부끄러움과 고통을 대신해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친구와 같이 가다가, 엄마를 만났는데, 엄마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다른 엄마보다 늙어보여서, 못 본 척하고, 자나 친 적이 있을 것이다. 부끄럽다고 느꼈기에, 엄마를 외면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엄마가 행한 사랑의 감동이 있으면, 담대할 수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랑할 만한 것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거저 주지만, 아무에게나 주지 않고, 믿는 사람에게 준다.

구원은 예수님에게만 있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생명의 길을 몰랐기에, 유대인은 표적을 찾아다녔고(종교), 헬라인은 지혜를 찾아다녔다(철학). 로마인은, 권력과 명예를 찾아다녔다(행복).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표적이나 지혜나 권력이 아닌,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표적이나, 지혜나, 권력이 아니라, 반역자로 몰려서, 십자가에서 달려 처형된, 예수님을 전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죄수를, 전하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복음 안에는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구원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원하는, 표적과 지혜와 권력을 주지 않지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이,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표적이나 명예, 권력, 부나 지식을 주지 못하는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복음에는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복음을 자랑하고, 적극적으로 전하게 되어 있다.

3.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왜 복음 안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17절에 왜냐하면’(가르),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 말이 17절 앞에 나온다.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사람을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기때문이다. 이 구절은 로마서 전체의, 요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구절이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이 말씀을 읽고 은혜 받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16세기 유럽의 주된 종교는, 로마가톨릭이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은 부패했고, 교황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의 비리가 극에 달했다. 가장 큰 죄악은, 면죄부 판매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시작했는데, 끝마치지 못했다. 그래서 교황 레오 10세는, 그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계획했다. 면죄부를 사면, 즉시 구입한 당사자의 죄가 사함 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연옥에서 고통을 받는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도, 연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간다고 백성들을 현혹했다. 개혁교회 안에도, 이런 가르침이 있을 수 있다. 헌금을 많이 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면, 그곳은 이단이다.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언약한 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능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사건했다.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를 말한다. 사람들은 죄를 지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친히 그들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준비해 주셨다. 복음 안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또 바울은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했다. 그러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다.”는 무슨 뜻인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 즉 하나님의 믿음에서,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새사람이 되는 믿음에 이르게 됨을 말한다. 한 신자가 믿은 후에, 또 다른 신자를 믿게 하고, 연약한 믿음에서, 보다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죄인을 구원해서, 성장하게 만드는, 복음의 능력을 말한다.

바울은 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2:4)의 말씀을 인용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오래 전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라!”(짜딕 베에무나토 이흐예)고 했다. 여기서 믿음(에무나), ‘성실, 진실, 성심, 충성을 말한다. 따라서 의인은 그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이다.

당시에 하박국은, 유다에서 의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불의한 자들이 형통함을 보고, “어찌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지 않느냐?”고 불평했다. 그때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서, 범죄 한 유다를 징계할 것이라 말씀했다.

그러나 하박국은 어찌하여 공의로운 하나님이,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징계할 수 있느냐?”고 불평했다. 그때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한 후에, 바벨론도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박국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유다를 징계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신뢰한 유다인들은 바벨론의 손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범죄 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역시 죄로 인해, 영적 바벨론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할, 새로운 길을 준비해 주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따라, 값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던 유대인이, 바벨론에서 구원받음과 같다.

복음에는 죄인이 예수님 안에서, 값없이 의롭게 되는 길을 보여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계시되었다. 이처럼 복음 안에는, 믿는 사람을 구원하고, 또한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구세주로 고백했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이 나의 주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변해야 한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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