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 4월 12일 - 열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요20:19-23)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0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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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요20:19-2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 지냈을 때, 제자들은 실망에 잠겼다. 실망에 잠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여 나타났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했다.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기쁨을 회복했다.
기쁨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란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가 누구이건 기독교인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믿도록 역사해야 믿어진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진다면, 이미 복 받은 사람이다.
믿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들 중에 최고의 복이다. 이 시간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살펴볼 때, 부활의 영광과, 그 은혜를 더욱 누리며, 승리의 기쁨 가운데, 이웃과 세상에 부활의 예수님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저녁때에 10제자들에게 나타남(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다. 제자들은 당시에, 위험한 예수님을 추종자하는 자들로, 혐의를 받고 있었기에, 은밀한 곳에 숨어 있었다. 산헤드린 군사들을 피하기 위해, 한 곳에 은밀히 모여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났다.
그 동안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자신을 나타냈지만, 이제 10제자들에게, 동시에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 동안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 글로바 일행은 개인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부활의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사건은 모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확증한 사건이다.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다. 이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육신의 몸을 가지고 부활했다는 점을 보여줬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문들이 닫힌 상태에서, 방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고,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 방에,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에 가졌던 몸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원하기만 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몸으로 변화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했다. 이러한 인사가 (19-20)에, 2번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다. ‘평강’으로 번역된 혤라어 ‘에이레네’는 ‘평화, 화평, 복지’등의 뜻을 가진 말로서, 히브리어의 ‘솰롬’에 해당하는 말이다.
‘솰롬’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말로서, 길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에나(왕하5:21), 헤어질 때(삼상1:17; 행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10:12) 주고받던 인사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말은, 일상적인 인사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평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특별한 평안이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제자들은 산헤드린의 군사들이 두려워서, 은밀히 모여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포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유대인들이 자신들도 잡으러 올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들에게 나타나서, 평안을 선포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일시적으로, 제자들을 근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그들은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하늘에서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도,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포하셨다.
2. 두려워한 이유와 예수님의 책망(눅24:37-38).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영(프뉴마)으로 ‘생각하는지라.’(도케오). 제자들은 자기 앞에, 실체가 없는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이단 중에,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한 이단이 있다. (…처럼 보인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 고대사회의 영지주의 이단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들이 그리스도가, 육체로 왔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이들은 구원자는, 빛으로 나타나는 분인데, 인간의 육체를 가질 수 없으며, 생기를 주는 영이로 믿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면, 그도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단들은, 이런 사상을 따른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죽었던 예수님의 ‘영’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으며, 그 시신이 무덤에 장사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자, 그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문이 굳게 닫혔는데, 가운데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서,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자, 유령으로 생각함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여러 번 부활에 대해, 예고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세 번 이상, 부활을 말씀했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하고 무서워하느냐?’고 책망했다. 그들은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믿지 못했다. 자기 앞에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 유령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십자가에 못을 박았던, 못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고, 예수님의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흉터가 남아있었다. 당시의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 것은 환상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누가와 요한은,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고, 분명히 증언하였다.
제자들이 본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 후에, 살과 뼈를 가지고 나타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기뻐했다. 제자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잃고, 은밀히 숨어서, 목자 잃은 양처럼 슬퍼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했기 때문이다.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크게 기뻐하게 되어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부활한 예수님의 손과 발과 몸을 만져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도 부활을 믿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기쁨으로 예수님을 찬양해야 한다.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이 있는가? (29中)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했다. 따라서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바란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찬양하기 바란다.
3. 부활을 체험한 자의 사명(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은 예수님이 ‘평강’을 기원한 일을, 2번 반복해서 기록했다.
19절의 평강은, 예수님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기원했다. 그러나 21절에 언급된 평강은, 파송 받고 복음을 전할 때, 환난을 받게 될 제자들에게, 담대하라고 하는 평강의 기원이다. 파송의 주제는 매우 종요한 주제다. 아버지가 아들을 파송했다.
요한복음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로부터 인류구원을 위한, 사명을 띠고 파송되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수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수한 후에, 제자들에게도 같은 사명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선언은 제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사도로 임명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인류구원의 사명을 맡긴 것처럼,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구원사역을 완수한 것처럼, 예수님의 뜻을 위해 생명을 바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완수하려 했다.
오늘 교회는,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처럼, 생명을 다해 온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사역을 완수했듯이,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가서, 선교사역을 완수해야 한다. 선교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능력을 주셨다.
(1) 성령을 받으라!(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선언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은 일과 비슷하다. 또 에스겔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타난다. 에스겔은 죽어서, 뼈가 마른지 오래된 시체들을 향해 (겔37:9中)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이처럼 생명의 능력을 부여하는 일이, 바람과 같은 성령의 사역임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전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선교의 명령을 하신 후에,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했다.
사도들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았으며, 예수님은 그들이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셨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능력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폭발적인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행2: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을 것을 선언하신 후에, 계속 이렇게 말씀했다.
(2) 복음 전파와 사죄의 권세(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할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내버려 두는 권세를 주셨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둘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막2:6-7, 10). 천주교회는 고해성사 제도의 근거를, 이 구절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의무적으로 사제들을 찾아가서, 그 죄를 고백해야 하며, 사제들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한 말은, 이러한 고해성사 제도와는 다르다. 죄를 용서할 권세를 주셨음은, 복음전파와 관계된 일이다.
이 말의 의미는 ‘사도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온 세상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를 받게 될 것이.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끝내 거부하는 자들은, 그 죄가 그대로 남아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거나, 그대로 두는 일은, 복음을 듣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게 될 것이며, 이를 거부하는 자는, 그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된다.
(겔3:17-19)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과 교회들은, 천국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에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음을 보여준다.
만일 교회가 복음증언의 사명을 소홀히 하여,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면, 그들이 죽게 된 책임을 교회가 담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책임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교회는, 절대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교회는 최선을 다해, 모든 족속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복음을 듣고 믿든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는 일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교회는 단지 그들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책임에 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받은 죄사함의 권한은, 축복인 동시에 막중한 책임을 수반하고 있다. 다른 것을 전하지 말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전하자. 왜 예수님이 죽으셨고, 왜 부활하셨는지 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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