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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5년 3월 29일 -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5-03-29
  첨부파일: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hwp(39K)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26:69-75)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보낸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잡혀갔다. 예수님을 잡아가서, 심판하는 과정은, 모두 다 불법이었다. 대제사장과 공회(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님을 칠 죄와, 거짓 증거들을 찾았다. 그러나 거짓 증인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 증거를 얻지 못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침묵하다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냐?’는 질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고 밝혔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고,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고, 자기 옷을 찢었다.

신성모독 하는 말을 직접 들었기에,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신성모독한 말을 한 예수님을, 어떻게 판결할 것인지 물었다. 자비의 정신으로 신중하게 진행해야 할 재판 분위기를, 강압적이고 선동적으로 몰아갔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비로워야 할 재판을, 무자비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때 산헤드린은, 예수님의 사형판결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러한 판결은, 유대판결 법을 어긴, 명백한 불법적인 판결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서,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었다(58).

살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자리로 들어가기에, 수모를 당하게 된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가서, 거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앉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도 하고, 저주까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자리에 함께 하기 바란다.

1. 베드로의 부인(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심문받고 있는, 대제사장의 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집 바깥뜰에서, 대제사장의 종들과 앉아, 산헤드린 판결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 곳 문을 지키던, 한 여종이 있었다. 그 여종은 베드로가, 집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았다(18:17). 그 여종은 이렇게 말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갈릴리, 지리적, 문화적으로 우월감에 젖어 있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멸시하는 용어였다. 다른 복음서들은,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었다고 했다. 불을 쬐고 있을 때, 베드로의 얼굴을 환하게 비쳐져, 분명히 베드로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그 여종은,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제자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한 여종이, 자기를 아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예수님을 심문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런 곳에서 자기 신분이, 노출된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1) 베드로의 첫 번째 부인(알네오마이),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그는 위기를 피하기 위해, 그 사람들 앞에서 즉시, 자신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알다(오이다) ‘보다, 생각하다. 쳐다보다.’이다. ‘나는 쳐다본 적도 없다는 말이다. 베드로는 하찮고, 연약한, 어린 여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할 정로도 비겁했다. 여종(파디스케)의 질문에, 모든 사람 앞에서, 분명히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했다.

이러한 모습은, 기독교 교회의 초석을 놓은 베드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분명히, 예수님 앞에서 (26:35)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위기가 오자, 즉시,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면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다.

그 때 베드로는, 여종이 던진 질문을 듣고, 당황하면서, 사람들을 피했다,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항상 계속 반복된다.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는 급히 앞문까지 나아갔다. ‘앞문은 가야바의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불빛이 흐린 출구로 보인다. 베드로는 자기 신분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해서, 어두운 앞문으로 피신하려고 했다. 앞문까지 나가서, 그 곳에서 잠시 머물면서, 자신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곳도 베드로에게,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다른 여종이, 베드로의 발목을 잡았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즉시 베드로를 알아보았다.

(2) 베드로의 두 번째 부인(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베드로는 자신이 이번에는 사람들 앞에서,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극구 부인했다.

여기 언급된 맹세(홀코스, 서원)’, 어떤 일을 고백하기 전에,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맹세였다. 이러한 맹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베드로의 부인은, 질문이 거듭되면서, 더욱 더 적극적이 되었다.

그는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스승을 그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그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러한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은, 인류를 위해 당당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말소리(랄리아)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베드로의 예수님을 두 번째로 부인하고, 조금 후에, 겉에 섰던 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폭로했다(델로스, 폭로하다, 확실하다).

그가 입을 열었기에, 일이 더욱 꼬이게 되었다. 차라리 베드로가 침묵했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잘 마무리하려고 할수록, 더 꼬이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적인 방법, 인간적인 신앙은,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베드로의 말소리가, 너도 갈릴리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북쪽 갈릴리 지방의 말과 발음은, 잘 다듬어진 남쪽 유대의 말과 달라서, 쉽게 구별되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히브리 알파벳 중에서 알렙, 아인, , 헤트'같은 후음 문자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했다. 또 그들은 으로 발음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에, ‘사람’(이쉬)이란 말을 이씨라고 발음했을 것이다. “아니 로 요데아 하 이쉬.”가 아니라, “아니 로 요데아 하 이씨.”라고 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사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12: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사사시대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쉽볼렛씹볼렛이라고 했기에, 그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3)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로 인해 다급해진 베드로는, 또 다시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두 번째는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카타나데마티조, 완전히 소멸시키다)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의 위선과 거짓말은 반복되면서, 점점 가속도가 붙고 강력해졌다. 진심은 아니지만, 점점 더 말이 강해졌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자신이 예수님과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다. (26:35)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했지만,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진실을 말하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을 보고, 남의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베드로의 일은, 시험을 앞에 두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시험을 앞에 두고, 기도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베드로와 같이, 연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베드로는 이러한 치욕스러운, 영적 패배를 한 후에, 큰 교훈을 얻게 되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 더 이상 자신이, 남보다 뛰어난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더 이상 신앙을, 자랑할 수 없었다. 예수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진정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성령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건은 베드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베드로의 회개와 통곡(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셨다.

(1) 예수님은 미리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3, 부인할 것이라 예고해 주셨다. 그리고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예수님의 예언이 생각났다.

예수님은 이러한 예언을 통해서,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도록, 미리 조치해 주셨다. 닭 울음소리는 두려움으로 무너져버린, 베드로의 영혼을 일깨웠다. 그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영혼이 더 이상, 흔들거리며, 그 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게 되었다.

닭이 우는 순간, 예수님 말씀이 생각난 것이다. 전능하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배신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보았다.

(2) 예수님은 넘어진 베드로를 위해 또 한 가지 조치를 취해 주었다(22:61-62).

주께서 돌이켜(스트레포, 반대로 돌려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바로 그때 예수님이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다. 여기서 본다.’(에네블렙센, + 블레포)뚫어지게 바라보다, 관찰하다.’는 뜻이다. 상대방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보았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함으로, 베드로를 일깨워 주셨다.

또한 그 일이 성취된 순간에,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봄으로, 그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고, 둘려싸여 있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베드로를 잊지 않았다. 베드로가, 완전히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했고, 베드로가 넘어지는 순간, 그를 붙들어주었다.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은, 예수님이 모든 사건의 주도권을 갖고 계심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비록 체포된 몸이었지만,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셨다. 예수님이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 순간 베드로는, 더 이상 넘어진 채로, 휘청거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신 것은, 넘어진 베드로에게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의 변절에 대한 예고가, 성취되었음을 알았다. 그 순간, 넘어진 베드로를 일으켜 주려고, 돌아서서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 보셨다. 사단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눈으로 격려해 주셨다.

바로 그 순간, 베드로의 눈은,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말없는 정적이 흐르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수많은 말이 오고 갔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음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속히 일어나서 회개하고 굳게 서라고, 권면해 주었다. 베드로는 즉시 밖으로 나가서, 통곡하며, 회개했다.

베드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어둠의 세력에, 무참히 무너져버린,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완전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다. 그 말씀과 눈빛을 기억하고, 가슴을 찢으면서,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래서 더 이상 넘어지지 않고, 제자의 자리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베드로는 유다처럼 연약하여 예수님을 배반했다. 예수님의 배려로 인해,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 자리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며칠 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의 사도직을 회복시켜 주셨다.

또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대중을 향해서 담대히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다(2:14-). 베드로의 실족은, 그의 신앙인격에 큰 약이 되었다. 잘못했을 때, 회개하면, 베드로가 될 수 있지만,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계속 가면, 가룟 유다가 된다.

우리 영혼을 보게 하는 소리, 우리를 깨닫게 하는 소리가 필요하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잘못했을 때, 자신의 영혼을 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또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시선에 맞추어, 내 영혼을 깨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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