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년 3월 15일 - 체포되신 예수님(마26:47-56)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5-0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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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되신 예수님(마26:47-56)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름을 짜듯, 피땀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했지만 십자가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기도하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을 수 있다. 시험에도 낙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하는가? 기도하면 떨어졌을지라도, 좌절하거나 방황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믿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위기가 찾아옴을 알았기에, 기도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위기를 극복하도록, 제자들을 깨워서, 기도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같은 말씀으로, 3번 기도를 드렸다.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고 기도했다. 기도로 승리했기에, 고난의 길을 걸을 영적준비를 다 마쳤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에 실패했기에, 운명의 시간 앞에, 다른 모습을 보였다.
1.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파송된 사람들(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모였던 곳이다(요18:2). 예수님은 마지막 수난 주간에,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었다(눅21:37). 그러므로 가룟 유다도, 잘 아는 장소였다. 마침내 가룟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와 함께,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
성전을 지키는 자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온 것이다.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훈련받은 가룟 유가가, 그 곳에 나타났다. 예수님이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폭력과 같은 물리적 힘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배신이다.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할 때, 그 상처는 너무 크고 괴롭다. (48-49)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어두움 속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룟 유다와 은밀하게, 예수님을 찾기 위한, 신호를 미리 정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가서,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유다가 다가가서, 입을 맞추는 그 사람이, 예수님임을 알 수 있었다.
가룟유다는, 친밀함을 표시하는 인사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했다. 배신의 입맞춤을 하기 위해, 함께 왔다. 입맞춤은 ‘필레마’다. 필에오에서 파생된 말이다.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말이다. 자신의 배신을 위장하려고, 예수님께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유다가 얼마나 교활하게, 자신을 위장했는지 보여준다.
이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좌절한다. 충동적인 분노를 터뜨리게 된다. 미움과 복수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차분하고 당당하게 행했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님은 대적을 피하지 않고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했다. ‘친구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가룟 유다에 대한 원망이, 전혀 없다. 담담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려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이 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질병과 패배, 고통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2. 베드로의 무력시위와 예수님의 말씀(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대제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댐을 보았다.
그 순간, 제자들 중의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적을 쳤다. 요한은 그때 성급히, 칼을 빼어 친 사람이 베드로라고 했다. 누가는 대제사장의 종의 잘려나간 귀가, 오른쪽 귀라고 하였다(눅22:50). 귀가 잘린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라고 했다(요18:10). 여기서 ‘종’은, 일반적인 하인이나 노예가 아니다.
이 문구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종이라 하고, 엘리사를 엘리야의 종이라 했던 것처럼, 부관, 참모를 말한다. 성전 직위들 가운데, 대제사장의 부관이, 성전 경비대장 직위도, 함께 맡고 있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일을, 대제사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파송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고는 무장하지 않았고, 쉽게 베드로의 공격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행동을 왜 했을까? ①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맥을 보면, 이런 행동으로 볼 수 없다.
② 이때의 상황을 보면, 베드로가 졸다가, 눈을 떠보니, 주위에 많은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서 있었다. 이때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칼을 뽑아, 순식간에 앞에 있는 사람을 내리쳤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본능적인 행동, 충동적인 행동을 한다.
언어 사용에서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사람들이 상처를 받지 않는다. 본능적이고 인간적인 말을 하면, 상대방이 상처받게 된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령에 의한 말을 하면, 상대방이 치료를 받는다. 베드로는 세 번씩 졸아서, 영적인 공백상태에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른 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하다. 베드로의 실수가 여기서 끝이 나야 했다. 계속 더 무서운 결과로, 빠져들어 갔다. 베드로는 드디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데 까지 간다. 무력으로 맞섬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체포되어, 인류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기 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또 예수님은 자기 일로 인해, 제자들이 다치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대적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다가, 체포되거나 다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태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말고의 귀를, 붙여주셨다. 당시에 귀가 떨어져 나간 사람은, 더 이상 성전봉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온전한 자로 만드는 것이었기에, 회복시켰다. 모든 불구자, 이방인들도 포함된다.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반항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시카리’라는 반란 그룹은,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니다, 백성들을 착취하는 자를 암살했다.
①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말했다. 충동적으로 무력을 사용한, 베드로의 행동을, 단호하게 중지시키고, 잘못을 다시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이다. 잘못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돌아서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다.
②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무력을 사용하면, 더욱 큰 무력이 나오니, 결코 평화와 행복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 나라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고, 확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세워지고, 유지되고, 확장되는 나라다.
③ 예수님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다. 그래서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 말씀은, 자신이 체포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 (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자신이 지금 아버지께 구하면, 열 두 군단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불러올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대적들을, 다 부셔버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열둘’은 완전수로, 많다는 의미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로마군대가 주둔했다. 그들은 주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일개 군단은 보통 보병 6,100명과 말726필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열두 군단보다 더 많은 천사’는 매우 많은 숫자다.
성경을 보면, 천사가 종종 등장한다.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를 듣고, 그의 사환에게, 하늘 군사와 병거를 보여주었다(왕하6:15).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사를, 하루 밤에 전멸시켰다(왕하19:35).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천사의 도움을 받았다(눅22:43).
예수님이 대적들에게, 순순히 체포된 이유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힘과 능력은 있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과 능력을 자제하고, 예언된 성경을 이루기 위해, 대적들에게 체포되셨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기에, 충동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마태는 구약성경을 중시하는, 유대인을 위해 복음서를 썼기에, 구약예언의 성취에 대해, 크게 강조하여 기록했다.
3. 너희가 강도를 잡듯이, 검과 몽치로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대적들 앞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행동했다. 자기를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처럼,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고 했다. 성전 경비병들은, 성전을 경비할 때, 커다란 지팡이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들을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기에, 예수님을 잡기 위해, 조직적으로, 치밀한 계획을 짰다. 그 계획이 조금이라도 어긋날 때에는, 가차 없이,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들을,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강도’(레스테스)은 ‘조직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강탈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요셉푸스는 이 말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을 주도한, 당시 혁명가들’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이런 혁명가들처럼, 소수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무력으로 로마나, 유대당국을 전복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혁명가들은, 은밀하게 무기를 숨겨가지고 다니면서, 매국노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혁명가를 체포하려면, 반드시 무장한 군인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과는 달랐다. 예수님은 무기를 숨기거나, 은밀하게 숨어 다니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무력을 반대하고 ‘사랑과 평화’를 가르쳤다. 물론 예수님은, 악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도전했다. 당국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기도 했다. 정권의 전복을 시도하던, 혁명가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성전마당에서, 공개적으로 백성들을 가르쳤다. 만일 예수님이 죄인이었다면, 당국자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벌써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잘못이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다. 군인들이 동원되어, 강도를 잡을 때 사용하는 칼과, 폭동진압용 몽치를 손에 들고 왔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불법임을 증언해 준다.
아무런 죄나, 저항의사가 없는 사람을, 한 밤중에 몰래 칼과 몽치를 들고, 강제 연행한 것은, 누가 생각해도 옳다고 하기 어렵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은 한 밤중에, 자신을 체포하려는 무리들의 의도와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의와, 정의의 수호자로 자처했지만, 의인을 정죄하고, 불법으로 죽인, 사단의 하수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명백한 불법 행위에 대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체포됨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만일 하나님이, 예수님의 체포를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체포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들을 피하거나, 그들을 진멸시킬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에게,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인류의 죄를 지고 ‘범죄자 중 하나’로 간주될 것이라고 예고했다(사53:12).
스가랴 선지자도, 하나님이 메시아를 칼로 치고, 제자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했다(슥13:7).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체포하는 무리들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됨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한 자기를 체포하려는 무리들에게 ‘저항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기에, 저항을 의지를 상실하고,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이러한 일도 (슥13:7)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이 항거하지 못하게 했고, 이로 인해 제자들이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알고, 얼마나 순종하는가?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순전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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