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 11월 3째주 - 일꾼의 선출(행6:1-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4-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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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의 선출(행6:1-7)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가, 사도들을 해치려고 하자,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했다. 사도들이 전하는 사상과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회원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옳게 여겨, 사도들을 죽이지 않고, 채찍으로 때린 후에,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놓아주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됨을 기뻐하면서, 공회의 금령을 따르지 않고, 날마다 예수님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다.
사단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간교한 방법으로 공격했다. 내적공격(위선)과, 외적공격(박해)이 실패하자, 이제는 관심을 다른 곳(사회사업)으로 돌려, 본질적인 일(기도와 말씀전파)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 오늘 말씀까지 예수님이 승천한 후, 성령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되고, 확장된 일이다.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유대와 각 지역으로 전파된다.
1. 초대 교회에 일어난 원망의 문제(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교회는 박해가 계속 있었지만, 계속된 전도로, 제자들이 계속 증가했다.
사도행전에는 ‘제자’(마테스)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제자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좇는 헌신된 사람을 말하나, 때로는 본문처럼,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평신도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이 만든 말이다. 부흥은 참 기쁘고 좋은 일이지만, 원망 불평으로 기쁨이 반감되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디아코니아, 도움, 봉사)에서 빠졌기에,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 ‘히브리파’는 이스라엘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유대인으로, 히브리 문화에 깊이 젖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람어를 사용했고, 선민의식에 젖어, 다른 민족에 대해, 배타의식이 강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각처에 흩어져 살다, 이스라엘에 돌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헬라문화에 익숙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다른 민족에 대해서, 개방적이었다. 유대문화 안에, 두 집단이 경쟁해왔다. 이런 경쟁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존재하기에 비극이다.
그 당시 유대교의 빈민구제는, 2종류였다. ① 그 지역에 사는 극빈자에게, 매 금요일마다, 14끼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했다. ② 방랑하는 낯선 빈민들에게 음식을 담아서, 나누어주는 구제였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구제는, 유대교와는 다른 구제였다. 공동체 내의 사람들에게, 매일 행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스스로 생계를 꾸리지 못하고, 도와줄 친척도 없는, 과부의 생계를 담당했다. 헬라파 과부들이 원망한 동기는, 일용할 식량과, 생필품을 지급받을 때에, 히브리파 과부에 비해 푸대접을 받았거나, 구제에게 누락되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헬라파 과부들의 불평이 높아졌다.
히브리파와 헬라파 유대인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기에, 끼리끼리 모였고, 그때마다 불평들이 제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해결하려고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사도들은 말씀사역을 소홀히 하고, 구제와 사회사업에 몰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다. 사도들은 사회사업이, 목회사역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회사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일을 매우 귀중함을 알았지만, 예수님이 맡긴 복음사역을, 소홀히 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문화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지 않고,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우선순위의 문제였다. 과부들의 원망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소명이, 사회사업보다는 목회사역에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2. 사도들의 문제 해결책(3-4).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함께 의논하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 곳에 모인 제자들에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일곱 사람을 택하라.’고 했다. 여기에 집사라는 말도 없고, 장로라는 말도 없다.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해 주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영적인 중간지도자로 세웠다. 우리는 그들을, 초대교회의 집사라고도 하고, 장로라고도 부른다. 그들이 선택한 기준은, 세상적인 기준과는 달랐다. (1) 성령 충만했다. 교회의 일꾼은, 성령 충만해야 한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절대 순종한다. (2) 지혜가 충만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별력이 있다. 사리판단을 옳게 할 줄 알고, 조직을 이해할 줄 안다. 앞뒤를 가릴 줄 알고, 할 말과 한 말을 알고, 화해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3) 칭찬 받는 사람이다. 달란트가 있고, 큰 사람이 아니라, 칭찬을 받아야 한다. 칭찬을 들을 정도면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빛은 숨길 수 없다. 모두 드러난다. 스스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그가 가는 곳에는 칭찬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런 사람을 선택해야, 문제가 없다. 이미 자격이 된 사람을 뽑았다. 앞으로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을 뽑았다. 사도들이 뽑지 않고, 제자들이 뽑았다. 사도들은 사회사업과 교회행정에 관한 일을 그들에게 위임하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와 말씀사역에 힘쓰겠다.’고 했다.
제자들이, 크게 증가했기에,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해야 옳다고 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전파를 함께 언급했다. 이 2가지 사역은, 한 쌍을 이룬다. 기도 없이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말씀 없는 기도 역시, 온전하지 못하다. 항상 2가지가 동반될 때,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다.
(5-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교회는 사도들이 한 말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무리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을 세우고 안수했다. 안수는 영적권위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그들은 스데반(면류관), 빌립(필로스 + 힙포스(말) = 말을 사랑하는), 브로고로(프로스 + 코로스, 원형 ‘춤’ = 최상의 춤꾼), 니가노르(니카오, 정복자)와, 디몬(티몬, 댓가, 귀중품),
바메나(파라 + 메노 = 가까이 머문)와 유대교에 입교한, 유대교로 전향한, 니골라(백성의 승리)를 선택해서, 사도들 앞에 세웠다. 스데반과 빌립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사도들처럼 훌륭하게 사역한, 전도자의 탁월한 위치 때문이다.
그러나 ‘니골라’는 니골라당(계2:6-15)을 세운 배교자로, 자세히 소개했다고 본다. 교회는 일곱 사람을 선출한 후, 사도들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기도하고 안수하여, 교회의 일꾼으로 세웠다. 여기에 교회운영의 중요한 원리들이 나온다. 이 원리는 오늘의 교회에도, 필요하다. (
1) 하나님은 성도들을, 교회 사역자로 부르되, 사람들을 각각 서로 다른 사역자로 불렀다. (2) 기도와 말씀을 맡은 사람이,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기도와 말씀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들이 하는 일과, 일곱(집사)가 할 일을, 모두 ‘디아코니아’라 했다(1, 4).
‘디아코니아’는 우리말로 ‘사역, 섬김’이라 번역할 수 있다. 사도들이 맡은 일은, 말씀사역(4), 목회사역이고, 일곱(집사)이 맡을 일은 ‘먹이는 사역’(2), 사회사업이다. 두 사역을 같은 말(디아코니아)로 묘사하였기에, 둘 중에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두 사역은 모두,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섬기는 사역이었다. 이러한 사역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모두 신령한 사람, 즉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두 사역은 서로 다른, 은사들을 필요로 하지만, 교회를 위해 봉사한 점에서는 동일했다.
목회사역만, 유일한 사역이라고 생각함은, 옳지 않다.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단어다. 섬김에 ‘목회적, 사회적, 정치적, 의료적’ 등의 말이 덧붙여질 수는 있지만, 이 말 자체에는 어떤 특성이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제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다, 사역, 즉 섬기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 또 교회 안에서 ‘전임사역’을, 교회 안의 일이나, 선교사역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정부나, 보도기관과 사업, 또 가정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섬김을 위해, 성도들을 부른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런 원리를 실천함은, 건전한 교회성장에, 매우 중요하다. 목회자들은 말씀을 맡은 사람이지만, 사도와 동일한 권리를 받은 것은 아니다. 사도들은 성경을 기록할 권한이 있지만, 목사는 성경을 기록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가르치고, 말씀을 위해, 부름 받음도 사실이다.
사도들이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말씀과 기도사역을 소홀히 하는 실수를 범했고, 이로 인해 교회 안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오늘날 목회자들도, 이러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목회자들은 지금도, 말씀사역을 소홀히 하고, 행정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이런 일은, 목회자의 잘못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성도들의 잘못된 요구로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떤 목회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성도들은 목회자가, 모든 일을 다 하는, 허드레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원인이 누구에게 있든지, 목회자가 다른 일에 몰두하다가, 기도와 말씀사역을 소홀히 하는 것을 옳지 않다. 목회자가 다른 일에 몰두하면, 자연히 말씀을 연구하거나, 기도할 시간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발휘하여, 교회에서 섬기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모든 교회일은, 목회자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수동적으로 예배행사에만 참석한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질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을, 서로 다른 사역을 위해, 각각 불렀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때 목사가 말씀과 기도사역에 집중할 수 있게 할 수 있고, 각 성도들의 은사를 발견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사역을, 개발할 수 있다.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들은 자신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목회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사회사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되었다.
‘왕성하게 되었다.’(에욱사넨)는 ‘자라게 하다, 증가하게 하다.’는 뜻의, 미완료형이다.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에,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말씀의 왕성함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를, 질적, 양적으로 성장하도록 해주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결과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도들이 말씀사역에 전념할 때, 말씀이 왕성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교회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졌다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제사장들도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일이 일어났다. 제사장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사실은, 예루살렘에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치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당시 일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18,000명 정도였으며, 그 중에 8,000명 정도가 제사장이었다.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한 기간은, 3대명절과, 그 외에 1년에 2주간 정도였다. 나머지 10-11개월에는, 고정된 수입이 없었기에, 다른 직업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당시 제사장들은, 어려운 생활과, 종교지도자의 부패로 인해, 많은 회의를 품고 있었기에 생명력을 가진 기독교에, 호감을 품고 용기를 내서, 개종했을 가능성이 많다. 사도행전에서 말씀과 함께, 교회가 성장한 일을, 여섯 번 기록했다. 이 6개의 언급 중에, 가장 먼저 나온 사건이다.
이런 언급들은, 복음전파의 과정에서 결정적인 시점에 나타난다. 이 언급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기로 선언한 후(6:7). ② 이방인의 사도가 될 사울이, 회심한 후(9:31). ③ 최초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회심하고,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은 후(12:24).
④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끝나고, 예루살렘 회의가 열린 후(16:5). ⑤ 바울의 2,3차 선교여행이 끝난 후(19:20). ⑥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28:30-31). 이러한 여섯 개의 언급들은, 모두 다 말씀이 전파되었거나, 교회가 성장했다는 말이 나온다. 때로 어떤 경우에는, 두 말이 함께 언급된 경우도 있다.
이런 언급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계속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켰음을 말한다. 인간과 사단은, 교회의 성장과, 하나님의 말씀의 확장을 막으려고,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을 모두 다,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역자로 불렀다. 나의 할 일은 무엇인가? 찾기를 바란다. 무위도식하려고 하지 말라. 서로가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로 놔두지 않고, 가족으로 불렀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돌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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