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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4년도 10월3째주 -위기 중에도 계속된 교회성장(행5:12-16)
  작성자 : 이건기 작성일 : 2014-10-19
  첨부파일:   위기 중에도 계속된 교회성장.hwp(75K)

위기 중에도 계속된 교회성장(5:12-16)

초대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를 통하여, 시험과 시련이 찾아왔다. 사탄은 그들의 마음속에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켜, 그들을 통해 초대교회 공동체에, 거짓과 속임의 영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사탄이 겉으로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다 도망갈 것이기에,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는다.

사탄은 천사로 가장해서, 그럴듯한 합리성으로, 말씀을 변질시킨다. (3: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했다. 의혹을 갖게 만든, 아주 그럴듯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바꾸어 미혹했는데, 이 말에 하와가, 걸려 넘어졌다.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인지, 구분하기 정말 어렵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바꾸는 사람을, 조심하기 바란다. 거짓을 조심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이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거짓과 속임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인, 하나님과 베드로의 행동이, 너무도 지나치다고 비난한다. 왜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여야 했나?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죽인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주님의 영을 시험하고 속였다.

그들은 거룩한 교회공동체를 멸시했다. 그들은 교회에서, 거짓과 위선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짓과 위선은, 거룩한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하나님은 교회 안,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제거해야 했다.

또 주님의 음성을 끝내 거절했다. 주님은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회개를 요청했고, 또한 베드로를 통해서도, 회개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주님을 통해 들려오는 회개의 소리를, 그들은 묵살하고, 끝내 거짓말로 일관했다. 그들을 제거함으로, 주님의 음성을 끝까지 거부한, 큰 죄임을 보여주었다.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징계가 필요함을 그 예로서 보여주었다. 만일 하나님의 교회가, 죄를 계속 범하도록 나눴다면, 교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에, 시범 케이스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위기 중에 교회는, 오히려 부흥했다.

1. 위기 뒤에 오는 부흥(12-13).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일어났던, 수많은 표적과 기사에 대해 소개했다. 위기 뒤에 부흥이 왔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에,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했다. 그래서 사탄의 계획이 좌절되었고,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사와 표적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일어났다(디포). 사도들이 행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다. 사도들은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성령님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게 했다. 표적과 기사는, 사도들이 효과적으로, 복음을 증언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매,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에게네토, 과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우리 주님이 행한 일이다. 예수님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온전하게 해주었다. 기사와 영적 부흥은, 우리가 일으켜 보겠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사와 부흥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일어나지 않는다. 현수막을 내걸었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홍보와 광고를 통해, 신유집회를 열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이 올바로 전달될 때, 그 곳에서 하나님이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 우리는 이런 부흥을 기대해야 한다.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의 복음전도를, 하나님이 보증한다는 의미이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했다. 예수님이 구세주와 주님이 된다는 증거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이 일어났다,

믿는 성도들은 모두,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미완료). 계속해서 반복해서 모였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이런 행각에 계속 반복해서 모여서, 집회를 가졌다. 그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기도했다. 힘들수록 더욱 모였다 이 모임은 교회의 공식집회였다. 마음을 같이 했다.

공식집회는, 뿔뿔이 흩어지기 쉬운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해주었다. 모일 때 힘이 생긴다. 한국교회의 힘은, 모이는 교회였다.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또한 마음을 같이하여, 모였다. 어려움 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집회에 참석했다. 그 당시 유대당국자들이, 교회를 박해하려고, 애쓴 점을 생각하면, 공식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유대당국의 표적이 될 위험이 있었지만,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다’(13). ‘그 나머지는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제자들과 상종하지 않았으나, 칭송했다. 제자들의 훌륭한 삶을 찬양했다. 믿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제자들과 상종하지 않았다는 말은, 2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교회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사도들과 논쟁할 용기를 잃고, 그들을 멀리했다는 뜻이다. 교회의 반대파들은, 사도들을 통해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적들로 인해, 그들을 반대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멀리 떨어져 지냈을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과 깊이 관계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았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유대 당국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나는, 수많은 표적들과 기사들을 보았다.

백성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적들을 보고, 교회를 칭송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참여하기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2. 핍박으로 기도하여 삶이 변하여, 기사와 표적으로 칭찬되자, 예수님을 믿는 무리가 많아졌다(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어려움은 기도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오히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졌다. 핍박이 부흥을 만들었다.

표적과 기사는, 어려움 가운데 나타났다. 이상하지 않는가? 이처럼 능력이 나타나는데, 왜 핍박이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 충만함과 핍박, 고난과 이적은, 어울리지 않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로 확장되어 갔다.

(8)을 보면, 핍박 때문에 사람들이 흩어졌다. 사람들이 이쪽 저쪽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핍박 때문에 흩어졌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이다. 온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는 디아(사방으로) + 스페이로(뿌리다)는 말의 합성어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핍박으로 흩어진 불쌍한 무리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사방에 뿌린 씨였다. 만일 초대 교회에 핍박이 만일 없었다면,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어려움 중에 기도함으로 변화되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칭송을 받았기에, 믿는 무리가 많아졌다. 믿는 자들이 칭송받은 이유는, 그들의 신앙생활 때문이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말씀에 대한 실천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어려움 속에서, 주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빚진 자의 의식이, 주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이 가능하게 만든 것은, 사도들이 선포한 메시지의 능력이었다. 사도들의 주된 메시지는 주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러므로 은혜 받은 자의 특징이,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믿는 사람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니, 말씀을 실천하여, 칭찬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가 부흥하려면, 둔산동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칭찬을 들어야 한다. 정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칭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칭찬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교제로 나타났다.

옳은 것은 언제나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언제나 틀린 것이다. 아무리 합리화하고 감춰도, 옳은 것이 틀릴 수 없고, 틀린 것이 옳을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하면, 언제나 불안과 위기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들이 되자.

성도들이 칭찬받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예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점차적으로 교회가 하는 일에, 동조하였다. 성령님은 더 강력한 증거로, 믿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초청했다.

성령님의 강력한 초청으로 인해, 중간 지대에 서 있던 사람들이, 교회로 나아오기 시작했다. 사실 유대인들이, 그 동안 믿던 종교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일어난 예수교를 따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성령님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사실임을 알리려고, 전무후무한 증거들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성령님의 강력한 증거들로 인해, 초대 교회는 선교에서, 큰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살아계신 성령님의 거룩한 임재는, 믿기를 주저하던 사람들을 설득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물론 유대인들 중에는,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뒤로 물러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왔다. 누가는 이때, 예수님을 믿고 돌아온 남자와 여자가 큰 무리를 이룰 정도로 많았다고 소개했다. 초대교회가 은혜가 충만하고, 능력이 충만 하자,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다.

3. 이적으로 나타난 부흥(15-16).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들은 주 예수의 부활을 전했고, 말씀에 따르는 많은 기사와 표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부활과 치료의 능력이 있다.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어려움은 말씀을, 사모하게 만들었다. 어려움은 말씀에 대한 확신과 사모함으로 나타난다. 말씀에 대한 확신은, 말씀에 대한 실천으로 나타난다. 말씀에 대한 실천은, 말씀에 대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사도들의 손을 통해, 허다한 기적이 나타나게 되자, 희한한 광경들이 연출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식구와 친척과 친구와 이웃 중에서, 병이 든 사람들을 메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병자들을 침대 위에 눕게 하고, 베드로가 그 곳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원했다.

그들은 베드로의 그림자만 덮여도, 병자가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무리의 행동은, 다소 미신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행위를 반드시 정죄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옷자락만 만진다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을, 책망하지 않고, 고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면, 미신이 된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말씀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 말씀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미신이 될 수 있다. 그들은 베드로가 행하는 일을 보았고, 베드로를 통해서,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베드로가 자신들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기대했다. 그들은 믿고 교회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은영 중에 베드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병든 자들을 길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기 원했다.

여기에서 그림자가 덮인다.’(에피스키아쎄, 가정법 과거), 일회적인 행동을 말하는데, 누가복음에 2차례나, 하나님의 임재가, 덮이는 것으로 묘사할 때에 사용했다. 따라서 베드로의 그림자가 덮이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간주했다.

성령님은 베드로와 동행하면서, 그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기사를 보여주었다. 그 후에 예루살렘 근처의, 마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을 사도들에게 데리고 왔다. 그리고 누가는 그들이, 모두 다 나음을 받았다고 소개한다.

병자들이 오면, 모두고침을 받았다. 귀신들린 사람이 모면, 깨끗해졌다. 복음의 능력이다.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다.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기 원한다. 교회와 사도들이 얼마나, 권세가 있는 모습인가? 또한 우리는 얼마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는가?

사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내부로부터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성령님은 위선과 거짓을 행하는 두 사람을 제거하고, 강력한 표적과 기사로서, 교회가 더욱 더 확장되도록 만들었다. 초대 교회는 박해에 이은, 사단의 두 번째 공격, 거짓과 위선을 극복하고, 계속 복음을 증언했다.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했던, 비결을 말씀드렸다. 어려움 가운데, 날마다 모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체험되어, 서로 돌아보는 사랑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고 나누는 곳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 교회는 성장했다.

어려울 때 기도하는가? 아니면 실망하는가? 실망하지 말고, 기도하기 바란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가? 아니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데, 어떻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한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가? 아니면 현실만 보이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병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지금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살아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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