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10월1째주 - 핍박 속에서 나눔(행4:32-37)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4-10-07 |
첨부파일: 핍박 속에서 나눔.hwp(76K) |
제자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사건을, 다윗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 다윗은 시편에서 열방과 족속들이 연합해서, 메시아를 대적할 것이라 예고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언과 같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연합해서, 하나님이 기름 부은 거룩한 종,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예정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하나님께 대적들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굽어보시옵고 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핍박을 통해 제자들은 열심히 기도했고, 그 결과 아름다운 열매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핍박이 오히려 좋은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핍박을 허락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까지 많은 핍박이 나타난다. (마24:9-10)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라고 했다.
핍박은 저주가 아니다. 핍박은 하나님의 뜻이 있다. 기도하게 만들고, 성령 충만하게 만든다. 진짜 믿음임을 보이라는 하나님의 신호이다. 따라서 핍박 속에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말고, 승리하여 참 믿음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1. 기도로 나타난 열매인 구제(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핍박을 통해 기도함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했다.
‘믿는 무리’는, 같은 신앙을 가진, 공동체를 말한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공동체였다. 핍박은 그들을 ‘한마음과 한 뜻’이 되게 하였다. ‘한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말은, 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었다는 의미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요, 성도들은 각각 다른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성령 충만한 결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통용했다는 ‘쉰’(함께)에서 유래되었다. ‘함께 나누었다.’는 뜻이다. 그들 중에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각 사람들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사용했다. 사람들은 각기 자기재산을 갖고 있었지만,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든지 공동체가 필요로 하면, 자기 재산을 기꺼이 드릴 수 있을 정도로 헌신되어 있었다. 본문을 보면, 공산주의에서 실현하고 싶었던, 모습을 보여 준다.
공산주의의 최대이념은 ‘공동생산, 공동소유’이다. 이러한 이념을 가지고, 소련(소비에트 연방)은 공산주의의 대부로서, 수많은 나라를 공산화시켰지만, 공산주의 혁명은,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 무너져 내렸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구소련이 추구하던, 공산국가는 없어졌다.
그러면 왜 공산주의가 실패했나? 공산주의가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인간의 죄성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공산주의 국가는,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니, 공산주의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처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나눌 수 있었음은, 성령 충만으로 일어난 결과였다.
여기서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성을 보여준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핍박은 기도하게 만들었고, 성령 충만의 결과로, 믿는 무리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다르지 않다. 목적이 다를 뿐이다.
물질에 대한 마음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기에, 한마음이 되기가 참 어렵다. 부부라도 돈 쓰는 것이 다르다. 남편은 세상일에, 아내는 하나님 일이, 우선이 될 수 있기에,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더욱 더 어렵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 되었다.
그들의 머리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물질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성령 충만의 결과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그들 중에서,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통용했다.’(코이나)는 ‘친교, 교류, 분배’라는, 다양한 뜻을 가졌다. 이 말은 사람들의 재산을 필요에 따라,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각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을 갖고는 있었지만,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공동체가 필요로 하면, 자기 재산을 기꺼이 드릴 수 있을 정도로, 헌신되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 됨은, 성령 충만으로 일어난 결과였다.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인생관, 세계관이 변할 뿐만 아니라, 물질관도 변한다. 성령이 임하면,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이상하게 돈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자유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성령이 임하면, 전도가 일어나는데, 또 구제와 함께 일어난다. 구제하며 전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게 된다. 구제는 강요로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진정으로 성령님이 임했는지, 임하지 않았는지는,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지만, 특히 선교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구제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도움을 주고 싶어진다.
진실한 교회는 선교와 구제에 힘쓰게 된다. 어떤 교인을 보면, 말만 많이 하고, 헌금이나, 구제나, 봉사에는 아주 인색한 사람이 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하는 이유는, 자기가 선교와 구제하지 않는 변명에 불과하다. 성령의 사람은, 선교와 구제에 힘쓰게 된다. 성령은 독점이 아니라, 나눔을 만든다.
2. 성령 충만은, 큰 권능과 부활의 소망을 갖게 했다(33-35).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들은 핍박 속에서 기도했고, 성령이 주신, 큰 능력을 받고 담대히,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 ‘증언하다’(아페디둔 토 마르튀리온)는 ‘돌려준다, 빚을 갚는다., 법적 채무를 이행했다.’는 뜻이다. ‘빚진 자의 마음, 목숨을 걸고 전했다’으로 전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마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갚아 주셨다. 그래서 사도들은 빚진 자가, 빚을 갚는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했다.
사도들은 복음을 맡은 사람으로서, 복음을 증언할 책임이 있었다. 따라서 복음을 증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 빚을 갚는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했다. 사도들은 유대인이 정죄하고 죽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부활을 믿을 때, 천국에 대한 소망과 은혜로, 구제할 마음이 생긴다. 선교와 구제는 강조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담만 생길 뿐이다. 따라서 먼저 은혜를 받고, 믿음이 생겨야, 선교와 구제가 이루어진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을 이야기했다. 은혜를 받아야 선교도 나눔도 생긴다. 소의 젖을 억지로 짜면, 염증이 생겨서, 고름만 나온다. 문제가 생긴다. 소의 젖을 많이 나오게 하는 방법은, 풀과 사료를 잘 먹어야, 젖이 넘쳐흐른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은혜 받고, 충만해야 한다. 기쁨과 감격이 넘쳐야 한다. 그때 선교와 구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마귀가 교회와 성도가 망하게 만드는 방법은,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만들면 된다. 그래서 마귀는 산헤드린 회원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무리들은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들은 은혜를 받고서, 재산을 함께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교회 안에는, 궁핍한 자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 중에 일부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밭과 집을 팔았으며, 그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다. 여기서 ‘팔았다’(폴룬테스)는, 현재 능동태 분사로, 계속적인 진행의 뜻을 가진다. 이 말은 성도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드렸는데, 궁핍한 사람들이 있을 때마다, 계속적으로 팔아드렸다는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드렸고, 그들은 잠시 재산을 맡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자기 재산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했고, 언제든지 하나님이 필요로 할 때에, 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그 재물이 교회에 속했다는 의미다.
당시 어떤 소유물을, 발 앞에 두면, 소유나 처분권을 일임한다는 의미요, 법적 행동이다. 성도들은 필요에 따라,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드렸으며, 사도들은 그 재산을 받아 관리하고, 필요를 따라 분배해 주었다.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없어졌는가?
사람들이 자신의 밭과 집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다. 하늘 문이 열려서, 돈이 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선교와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돈이 있어야 한다. 그 응답이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우리 마음과 통장을 열게 했다.
제 삼자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통장이 열리기 바란다. 인류에게 주신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다면, 지구상의 모든 가난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몇 사람이 부를 독차지하기에, 무능하고 능력이 없으면, 굶게 되고, 죽을 수도 있다.
3. 모델이 되는 바나바의 헌신(36-37).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여기서 특별히, 자기 재산을 교회에 드렸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셈플이 되는 사람이다.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인, 요셉이란 사람이다. 당시에 구브로에는, 소수의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다. 그는 구브로에 땅이 있었다. 아마 은퇴하고, 말년에 쓰려고 두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밭이 있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위로자)라고 불렀다. 말과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인물 중에서, 가장 인격이 뛰어난 사람이다. 마치 여호수아의 그늘 밑에, 갈렙이 있었던 것처럼, 바나바는 사도 바울의 그늘 밑에 있었다.
바나바의 이름은, 2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1) 문자적으로 바나바는 바(아들) + 나바(예언자)로 ‘예언자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는, 바나바를 ‘선지자’로 기록되기도 했다(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고 했다.
(2) 이 이름은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36). 누가는 바나바를 이런 의미로 소개했다.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예언),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했기 때문이다. ‘권위 한다.’는 말(파라클레시스)은 ‘잘못했을 때, 바로 잡아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나바를 모델로 소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바나바는 자기 소유를 팔아, 교회에 내어 놓음으로, 큰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내놓은 재산이, 힘든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② 바나바는 교회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그러 인하여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하여지니, 얼마나 사도들에게 큰 힘이 되었는가? 우리도 목회자에게 큰 힘이 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③ 그는 기독교인이 된, 첫 번째 레위인이며, 복음에 대한 유대인의 편견을 허문 사람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물질적으로도 부유했던 바나바는, 자신의 물질을 자신이 쓰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다. 그의 겸손을 읽을 수 있다. 우리도 위로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초대교회가 부흥한 이유는, 핍박받을 때 기도함으로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은혜 받은 것은, 사도들의 말씀을 들을 때다. 사도들의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조금도 부끄럼이나, 거리낌 없이 전하였던 말씀 속에,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내 삶 가운데 차고 넘칠 때, 자신의 욕구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때보다, 자신이 도움을 줄 때,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기쁨을 맛보기 바란다. 조그만 것이라도, 냉수 한 잔이라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은혜는 고통이 올 때, 기도함으로 이루어진다.
특별히 바나바의 이름을 거명되는 이유는, 이 바나바를 통하여, 사도 바울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어렵게 하던 사람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바나바가 그의 사정을 듣고, 사도들에게 화목하게 만들어 준다.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행9:26-30)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은 다소에서 숨어서 13년 동안이나 살게 된다. 이 정도 되면, 인생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을 데려다가,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서, 사역을 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주님을 위해 살게 된다. 늘 은혜를 사모하며, 은혜 속에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전글 : 2014년도 9월2째주 -핍박과 기도(행4:23-31) | |
다음글 : 2014년도 10월2째주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과 죽음(행5:1-11) | |
이전글 다음글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