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 9월1째주 -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사도들(행4:13-2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4-09-14 |
첨부파일: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사도들.hwp(39K) |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사도들(행4:13-22)
이스라엘의 최고 결정기관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도들을 재판정에 세우고 ‘누구의 이름과 권세로, 이 일을 행했느냐?’고 심문했다.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어떻게 나며서 걷지 못하던 자가,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병자를 건강하게 만들어,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다. 예수님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만들었다고 했다.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며 담대히 선포하자, 그들이 할 말을 잃었다.
1. 할 말을 잃은 이유(13-14).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사도들이 ‘담대히 말했다.’고 행함을 보고,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담대히 말했다는 ‘솔직히 숨김없이, 죽으면 죽겠다는 태도로 말했다.’는 말이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하자, 사도들의 말에 놀랐고, 이상히 여겼다. 충격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① 사도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하게 말해서 놀랐다. ‘담대하게 말했다.’(파르레시안)는 파스(모든) + 흐레오(말하다)가 합쳐져 된 말이다. 예수님에 대해 모두 남김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했다는 뜻이다. 성령의 지혜를 가지고, 사도들은 막힘없이, 예수님을 증언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자들도, 잡아들이기 원했는데, 이를 일을 알고도 담대하게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자신 있게 예수님을 변론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이는 예수님에게 구체적으로 배웠고, 또한 성령님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할 말이 없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아야 한다.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있으면, 귀신과 이단이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귀신과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귀신은 신앙적인 방법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속인다. 또한 우는 사자처럼, 천사의 모습으로 와서, 신앙적 방법으로 와서, 우리를 속인다. 정말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예수님과 깊은 관계에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다면, 거짓말로 속이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간다.
② 사도들은 예수님과 전부터, 함께 있었던 자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도들은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 살아생전에, 함께 지냈다. 베드로가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어부 인데, 메시아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말할 수 있겠느냐며 놀랐다.
사도들은, 랍비학교에서, 전문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흠잡을 수 없도록, 온전하게 말할 수 있었기에 놀랐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베드로가, 자신들의 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산헤드린 회원들의 질문에 대해, 놀리적으로 말했다.
성령님이 그와 함께 하며, 입에 할 말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문의 능력은 알았으나, 성령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세상은 세상 전문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에 핍박한다. 그들은 베드로의 증언에 대해, 반박할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눅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예수님은 살아계셔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이 대적들에게, 온전한 말로 답변할 수 있도록 했다.
③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가, 온전하게 되어서, 그들 앞에 당당히 서 있으니, 강력한 증거가 있기에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말에 대해서,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렇게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마28:20下)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증언하지 못하는가?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한다는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머리에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간증이 없기 때문이다.
2. 회유와 협박(15-16).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산헤드린 회원들은, 일단 사도들을, 공회에서 나가도록 했다. 사도의 변증에 대해, 답변할 대답을 찾지 못했기에, 자신들끼리 모여, 대책을 의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도들을 밖으로 나가게 한 후에, 심각하게 의논했다. 여기서 ‘의논했다’(쉬네발론, 쉽발로)는 미완료 과거다.
산헤드린 회원은, 회의를 따로 소집해서, 계속 의논했다 말이다. 판결을 내리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들이 사도들을 함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었다.
① 사도들로 인해, 유명한 표적이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이를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표적’은, 잘 알려진 표적이란 뜻이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온전하게 된 사건이다. 예
② 이 일은 모든 예루살렘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행해졌기에, 그들도 이 일을 은폐하거나, 숨길 수가 없었다. 성령님은 이같이, 명백한 표적을 나타냄으로, 사도들이 담대히, 복음을 증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17-18)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산헤드린 공회는, 분명한 증언으로 인해, 사도들을 정죄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협박해서,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이 극단적으로 사도들을 해치지 못함은, 표적을 본 유대 백성들의 비난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진실보다는 민심의 동향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과, 죽음에서 살아난 분임을 분명히 보고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회개할 줄 몰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들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양심이 마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참 많다. 진리에 대항하고 진리를 감추려고 하는가? 이런 사람은 진리를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까봐, 그렇게 행동한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자신들이 결정한 잘못된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즉시 밖으로 나가있던 사도들을 안으로 불러들어, 이후부터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나서,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3. 산헤드린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음(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들은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의 위협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며, 그들은 담대하게, 공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큰 권위와 비중을 두었다. 우선순위를 두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우선주의요, 하나님 제일주의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행복 십계명을 발표했다. ‘타인을 개종시키려 하지 말라.’ 그들의 믿음을 존중하라. 행복하려면 전도하지 말라는 말이니, 정말 안타깝다. 물론 교황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억지로, 강압에 의해 전도하려고 하니까,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전도하지 않으면, 너는 너대로 평화를 누리고, 나는 나대로 평화를 누리니, 행복해 지려면, 전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은, 어떻게 말했는가?
산헤드린과 교황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현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교황이 옳다고 본다.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복음을 모르면,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기에,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천주교의 십자군 같이,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들과 같이, 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처참하게 죽이는 일은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핍박을 받더라도, 핍박하지 않으며,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며, 겸손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롬12:14).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순교자의 모습이다. 전도가 없으면, 순교는 없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믿음을,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②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가? 내 직업과 건강, 불안과 염려, 내 미래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가? 오늘 교회에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필요해 나왔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왔는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것은, 있지 없고, 하나님보다 더 옳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법은 상대적이다. 시대적이다. 목회에도 사람 중심의 목회가 있고, 하나님 중심의 목회가 있다. 사람 중심의 목회를 ‘인본주의’라고 하고, 하나님 중심의 목회를 ‘신본주의’라고 한다.
사람 중심의 목회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이다.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설교들만을 골라서 한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야기를,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회는, 다르다. 우리 힘을 모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다.
사람 중심의 목회는, 사람에게 영광 돌리는데 있다. 그래서 어떤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거나, 개인 우상 사상으로 변질된다. 복음은 이론이나 논리나 철학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다. ‘우리는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믿음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해야 한다.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예수님과 만나는, 진정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진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으면, 남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예수님을 체험한 자는, 말하게 되어 있다. 내가 체험한 예수님이 있는가? 없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성경공부를 하고, 퀴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해도,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사도들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이러한 담대함과 용기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도들은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일으킴은, 낫는 표적을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있음을 확인했다.
부활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확신했기에, 이처럼 대담한 행동할 수 있었다. 이런 그들의 믿음은 (히11:35中)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했다. 또 (히11:38上)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이었다.
②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다. 그러므로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산헤드린 회원의 그릇된 판결을, 들을 수 없다고 담대히 선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산헤드린 회원들의 양심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의 말 중에서, 누구의 말을 따르는 것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중부정으로, 예수님을 계속해서, 증언하겠다고 강조하는 말이다.
그들은 동사(보고 들은 것)과 주어(우리)를 바꿔 쓰면서 강조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부활사건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인간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충돌할 때, 하나님의 권위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이러한 순종이, 그들의 말과 행동에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만들어냈다. 사도들은 생명을 걸고, 자신들이 본 일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끝까지 증언하겠다고 선언했다.
(21-22)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민심을 잃지 않으려고, 사도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가 걷는 표적을 목격한, 군중들의 열기는 대단했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만일 사도들을 처벌하는 경우에는, 그들은 백성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사도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그들은 경고를 무시한 사도들에게, 재차 위협을 가했다. 더 이상 조치를 취할 수 없어서, 결국 사도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진리보다는, 교권 유지를 위해서, 대중을 더 무서워했다.
그날 사도들을 통해, 병이 나은 사람은, 40여세나 되었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40년이 넘도록 걷지 못하는 자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긴 세월동안 장애인으로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전하게 되어,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일을 목격한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성도가 되자. 핍박을 두려워 말자. 핍박하는 자가 아니라, 핍박받는 가운데, 믿음을 지키는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사도들의 모습을 본받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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