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 8월5째주 -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행4:8-12) | |
작성자 : 이건기 | 작성일 : 2014-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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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행4:8-12)
나면서 걷지 못한 자를, 걷도록 만든 사도들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을 전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매우 싫어,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지만,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공회원들은 이 일로 예루살렘에 모여서, 사도들을 재판정에 세우고, 기세등등하게 물었다. (7中)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고 했다. 베드로는 그들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1.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는다면?(8-9).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베드로는 그때, 성령님이 함께 했다. 성령이 충만해서,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담대하게 대답했다. 성령에 충만하기 전에는, 두려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사렛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당당하게 전했다.
우리는 무엇으로 충만한가? 당시 종교 지도자 마음속에는, 분노와 자기 생각이 충만하여 말했다. 악령이 충만해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했다. 우리는 분노와 자기 생각이 충만해서 말하면 안 되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말해야,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심문받을 때에,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지, 미리 준비하지 말라고 했다. 성령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그때마다 주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한대로 성령님은, 사도들과 함께 해서 가장 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회원들을 ‘백성의 관리와 장로들’이라 불렀다. 관리는 지도자이다. 베드로는 그 당시 지도자를 인정하고, 적절한 존경과,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성령님은 사도들이 정상적인 예의를 깨뜨리지 않고, 예수님을 담대히 증언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었다.
자신이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고쳐 준 일을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하였다. ‘착한 일’(유에르게시아)은, 유(좋은, 잘) + 에르곤(일하다, 행위), 친절하고 잘 한 행위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행한 일이, 착한 일임을 강조했다. 착한 일인데, 재판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걷게 것을, 구원받았다고 설명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이 설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다. 예수님이 하셨다고 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다.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베드로는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먼저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고 선언했다.
이 표현은, 중대한 사실을 말할 때, 자주 사용된 표현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언하기 전에,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이렇게 말했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온전하게 만든 분은, 예수님이라고 증언했다.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2가지로 소개했다.
(1) 그 날 병자를 치유한 예수님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라고 말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간교한 책략으로, 의로운 메시아를 죽이고 말았다. 이런 일을 은밀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성령님은 베드로를 통해, 공개적으로 그들의 죄악을 폭로했다. 베드로는 분명히, 담대하게 말했다. 우리도 세상을 향해, 분명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다른 말을 잘 하면서,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담대하게 말하지 못하면, 참으로 안타깝다.
(2) 병자를 고친 예수님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살려서, 예수님이 의로운 분임을 증언해 주었다.
부활을 통해, 산헤드린 회원들의 결정이, 옳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그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함은, 반발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다.
산헤드린 회원들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 물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회원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었다. 바로 그 예수님이,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고쳐주었다고 증언했다. 너희가 죽인 예수님,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을 말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했다고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자가, 건강하게 되어 그들 앞에, 서게 되었다고 했다. 베드로의 증언은, 명백한 증언이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 받은 병자가, 베드로의 옆에 서있었기에, 그의 말을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말하면 사람들은 좋아한다.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불편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얼마나 좋은 분인가?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 이런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 그 예수는 바로 “네가 죽인 예수다.”라고 하면, 그때는 달라진다. 내가 언제 죽였느냐면서, 기독교를 싫어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말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냥 예수님만을 이야기하면 좋은데, 내 죄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면, 그때는 달라진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나의 죄로, 예수님이 죽였음을 인정해야, 용서받고 다시 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꾸 죄를 감추려고 한다.
죄를 지적하면 싫고, 감추려고 하고, 죽이고 싶은 미운 마음 때문에, 오히려 죄만 커진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싫어지고, 예수님을 전하는 자를, 핍박하는 자가 된다. 인기 많은 설교자들은,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인기가 떨어지기에, 생활설교만 하려고 든다.
2. 집 모퉁이의 머릿돌(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는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며,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했다.
(시118:22)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을 인용한 것이다. 성서 시대에 집을 지을 때는, 4면의 벽을 쌓기 위해, 네 모퉁이에 받치는 가장 커다란 돌을 가리킨다. 집 전체의 하중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돌로, 한 마디로 예수님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모퉁잇돌은 건축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부위다. 이 돌을 기초로,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면을 연결한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성곽이나 건축물들은, 돌을 다듬어서 지었다. 건물을 지을 때, 닦아둔 터 위에, 가장 먼저 머릿돌을 놓았다.
이 머릿돌은 건물 중앙이나, 앞에 두지 않고, 대개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모퉁이, 각을 이루는 곳에, 머릿돌을 둔다. 오늘날 건축방식은, 석축방식이 아니므로, 대게 건물 앞면 중앙 가까이, 기둥 밑에 형식적으로 머릿돌을 표시한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건축은 달랐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가장 먼저 놓이고, 모퉁이의 머릿돌을 기준점으로 하여, 수평을 잡아 나갔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기준이 되어, 각을 정하고, 길이와 넓이를 설계도대로, 측정해나간다. 그러므로 건축물의 모든 돌이, 이 모퉁이의 머릿돌을 기준으로, 연결해야 한다.
모든 돌들의 수평도, 모퉁이의 머릿돌에 맞추어져 있고, 좌우의 선도, 모퉁이의 머릿돌에 기준을 맞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았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죄인,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하나 되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모퉁이의 머릿돌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 누구도, 하늘의 천사들도, 하나님이 놓은 모퉁이의 머릿돌을, 다른 돌로 교체하거나, 움직일 수는 없다.
이단이 누구인가? 모퉁이의 머릿돌에서 벗어나는, 교회와 교단을 말한다. 나의 신앙이, 예수님의 길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게 하며, 내가 머릿돌에 맞추어져 있는지, 살펴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은, 기준과 판단이, 사람들에게 있지 않다.
하나님의 모퉁이의 머릿돌에 연결되어야,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전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고집으로 인해, 모퉁이의 머릿돌에, 맞추기를 싫어한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하나님이 정하신 머릿돌을 버리고, 자기 생각으로, 기준을 만들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밀어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퉁이 머릿돌로 삼았다. 모퉁이 머릿돌이 없으면, 집을 세울 수 없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벗어나 있음은, 하나님의 모퉁이의 머릿돌에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가 버림받는 것은, 머릿돌을 외면하고, 자기 지혜와 자기 생각을 따라, 집을 짓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벗어나게 되는 것도, 머릿돌을 외면하고, 사람의 생각과 지혜로, 성경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판단 기준이, 말씀이 증언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지혜와 자기 생각에서 비롯되어, 하나님의 머릿돌에 맞춰져 있지 않기에, 쓰러지고 넘어지는 문제가 생긴다. 어떤 경우든지, 머릿돌에 연결되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고, 머릿돌에 맞추어져야,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자가된다.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기에, 사람의 생각과 지혜는, 어떠한 경우라도 벗어난다. 머릿돌에 나를 맞추기 위해, 내 앞에 당한, 나와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한다. 말씀을 대적하는 것은, 나와 세상의 이론이며,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가, 바로 타락한 나다.
베드로는 성령에 이끌려, 옛날과는 달리 담대하게, 모퉁이 머릿돌인 예수 그리스도가, 병자를 고쳐주었다고 전했다. 그러니 너희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전했다. 과거의 사람, 미래의 사람, 현재의 모든 사람들은, 모퉁이 머릿돌인 예수 그리스도과 연결되어야, 심판을 면할 수 있다.
3.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구원’(소테리아)은,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를 고친 일로 앞에서는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모르고 지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지는 영적구원도 포함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을, 모두 온전하게 해주었다면서, 산헤드린 회원들에게, 보다 더 담대한 말을 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했다. 이런 베드로의 선언은, 산헤드린 회원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에게 다른 구속자를 주신 일이 없다. 왜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가? 사람들은 모두 다 죄인이기에, 자기 죄의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죄인이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롭고 온전한 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온전한 삶을 살았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을 자격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방법이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 많은 종교들은 하나같이, 좋은 곳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 유교, 천주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도 그렇게 말한다.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같은 이단도, 또한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하다못해 조상을 섬김으로, 내세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그런 사람과, 그런 종교에게, 구원을 주신 적이 없다고 했다. 운전을 하려면 운전면허가 있어야 한다. 비행기를 조종하려면, 역시 면허가 있어야 한다. 면허는 법령상의 용어다. 일반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행위를, 특정한 경우에 허가하거나, 특정한 권리를 설정하는 행정행위다.
이것을 어기고 운전하면, 법의 제재를 받는다. 운전면허 없이, 운전하면, 구속당하거나, 벌금형에 처해지게 된다. 운전하고 싶다고, 면허 없이 자신의 자동차를 끌고 도로에 나가면, 무면허 운전이다.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다고, 면허도 없이 비행기를 끌고 날면, 법의 제재를 받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구원을 줄 수 있는 이름, 면허를 내주지 않았다. 예수님 말고는 면허가 전혀 없다. 다른 사람들로서는, 구원이 없다. 천하에 어떤 사람이,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을, 하나님이 주신일이 전혀 없다. 오직 예수님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리고 그 종교에 심취해 있다. 왜 그런가? 모르기에 그렇게 말한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만 섬겨야 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었다. 성경을 보면, 죄를 범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쫓겨났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에 흩어졌고,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흩어진 1세대나 2세대는, 그래도 여호와를 알만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길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오랜 후에, 하나님이 없이 살면 죄가 번성하기에, 하나님이 필요함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서, 조금 유명한 사람들을, 신으로 섬겼다. 그들의 가르침을, 점점 발전시켰다. 그리고 저마다 내세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동물의 형상이나, 상상한 것들의 형상을 아름답게 꾸몄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화를 만들고, 전설을 만들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그런 것들이, 사람을 구원시킬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예수님 이외에, 면허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는 너무 독선적이라고 하지만,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선교를 한다. 이 말씀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인본주의자들과, 이성과 상식을 존중하는 자들은, 기분 나쁠 수 있다. 이 말씀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미움을 받게 된다.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기에, 우리는 이렇게 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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