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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4년도 8월 2째주 - 이적의 원인과 결과(행3:11-18)
  작성자 : bibleman 작성일 : 2014-08-10
  첨부파일:   이적의 원인과 결과.hwp(23K)
이적의 원인과 결과(행3:11-18)

베드로 성전에 들어가면서,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을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고, 그 걸인이 일어설 수 있도록, 오른손을 그를 붙잡아 주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다.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이, 발과 발목에 힘을 얻게 되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얻자, 즉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때 백성들은, 나면서 못 걷게 된 걸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았다.

그 무리들은 그가 원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았기에,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 놀라운 이적은, 예수님이 직접 행하신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이적이었다. 이 이적으로,

1. 무리들이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나은 사람이 고침 받은 후에,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

‘붙잡았다(크라테오의 분사)’는 말은, 계속 붙들고 늘어졌다는 말이다. 걷지 못하던 자가, 사도들에게 붙들고 늘어진 이유는, 사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때 이를 본 무리들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 행각으로 모였다.

솔로몬 행각은, 대중 집회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초대 교인들이 종종, 집회를 가진 장소이다(5:12). 예수님도 이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다(요10:23). 이적으로 인해 수많은 군중들이, 솔로몬 행각에 몰려들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모이라고, 종을 치는 역할을 한다.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모인 무리들을 향해, 증언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했던 설교에 이어, 두 번째 설교이다. 베드로는 그 무리를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중요한 말을 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율법과 약속을 받은, 선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못 걷는 사람이, 나은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보지 말라.’는 말이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 사람을 고친 것을 보고, 무리들은 놀랐지만, 자신들이 고친 것이 아니니, 자신들을 주목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걷지 못한 자를 낫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는 주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베드로는 성령님이,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행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적을 행하도록 만든, 능력의 근원이 되는 예수님을 증언했다.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내가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참된 이적은, 개인의 능력이나, 경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인격수양이나, 정신수련을 통해, 이적과 능력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 종교이며, 범신론 사상일 뿐이다. 이적은 인간이 정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도를 닦아서 생기지 않는다. 인간이 수양한다고, 선해지지 않는다. 산에 가서 금식하며 산다고 해서, 신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역시, 죄를 범하는 인간이다. 참된 이적과 구원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진정한 이적 중의 이적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도를 닦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으로 된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이적이 나타났다(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였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냈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출3:15-16). 이렇게 하나님을 소개한 이유는, 베드로의 말을 듣는 무리와, 하나님이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조상들에게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 “자기의 종이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소개했다. 여기서 ‘종’(파이스, 아들, 자녀)은,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의미한다(53:1-1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영광의 자리를 떠나, 종의 몸으로 와서, 거부와 멸시를 다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디 변명이나 저항도 없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려죽었다. 자기 목숨을 바쳐서, 인류구속을 완성했다(2:7).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이, 종인 예수님을 영화롭게 했다. 영화롭게 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고난당하고, 부활승천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어서, 이적을 일으켰다는 말이다. 놀라운 이적들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고,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간접적으로 증언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했는지 이야기했다. 예수님을 이방인, 즉 로마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유죄판결을 내린 후에, 사형허가를 받기 위해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후에,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 풀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빌라도의 제안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다.

난처해진 빌라도는, 유월절 관습을 따라,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한 사람을 특사로 풀어주겠다고 했다. 빌라도는 백성들이, 죄 없는 예수님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을 포기하고, 빌라도를 특사로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 후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원했지만, 무리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폭동을 두려워한 빌라도는, 할 수 없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했다. 베드로의 이러한 설교를 통해, 유대인들이 잘못한 일을, 깨우쳐 주었다.

(14-15)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유대인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고 베드로는 추궁했다.

‘거룩하고 의로운 자’는 구약에서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막1:24, 눅1:35, 요일2:20)말한다. ‘의로운 자’는 모든 불의를 떠나, 온전히 공의로운 분이다. 유대인들이 이와 같이, 거룩하고 의로운 메시아를 거부했다고 책망했다.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님을 거부하고, 살인자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하였다(마27:15-16).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요(마27:16),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했고(막15:7), 강도였다(요18:40).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했다.

‘생명의 주’는 ‘생명을 주관하는 자, 생명의 근원’을 말한다. 바라바는 살인자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으로, 생명과 구원을 주는 분이다. 유대인들은 살인자를 살리고, 생명의 주를 죽였으니, 그 죄가 정말 컸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렸다. 이 말씀은

(1)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고 (2) 예수님이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며 (3) 부활로 죄의 사망의 세력이 무너지고 정복되었고 (4)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베드로는 여기까지 말한 후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또한 승천을 직접 목격했다. 걷지 못하던 자를, 낫게 한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일이다. 베드로가 행한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나타난 증언이었다.

3. 무슨 이적인가?(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걷지 못하던 자를, 온전히 했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언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걷지 못하던 자가, 온전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자신이 그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병자를 낫게 했다고 말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지금도 믿음을 통해, 계속해서 역사한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자기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항상 그들과 동행해 주셨다. 여기서 ‘예수로 난 믿음’이, 누구의 믿음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된다. (1) 걷지 못하던 자의 믿음이다. (2)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이다.

(3) 두 사도들과, 걷지 못하던 자의 믿음이다. 걷지 못하던 자를 고친 사건은, 처음에는 두 사도의 믿음이, 주도적으로 작용했지만, 고침 받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을 보면, 그에게도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기에,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적절하다.

성경은 믿음을 강조한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믿음은 이렇게 중요하다. 하지만 믿음 자체가, 구원은 아니다.

오직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이 오는 것이지, 믿음 자체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 자체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믿으면 된다. 창조적인 믿음, 적극적인 믿음, 긍정적인 믿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 믿음이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가, 중요하다. 나로부터 나온 믿음인지,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믿음인지의 출처가 중요하다. 진정한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다. 다른 믿음은 가짜다. 예수님을 통한 믿음이, 완전히 낫게 하였다.

(17-18)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베드로는 무리들을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베드로는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이제 부드러운 어조로 무리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다. 무리들의 죄를 지적한 후에, 부드러운 말로,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면했다. 이러한 죄를 지은 것은,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랬다고 했다.

베드로는 그 동안, 유대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양심에 난 상처를, 싸매고 위로했다. 베드로는 청중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려고, 너희가 알지 못해서, 그러한 죄를 범했다고 위로했다. 그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위로했다.

일반 백성들만 아니라, 관리들 유대 지도자들도 무지해서, 죄를 범했다고 했다. 예수님을 시기하여 백성들을 선동했던 지도자들은, 일반 백성들의 죄보다 더 컸지만, 베드로는 그들의 죄도, 무지했기에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무지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선지자들이 한 예언을 성취했다고 설명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죄인으로 몰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고난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했다면서 위로했다. 이는 성경 말씀에 예고된 말씀이다.

옛날에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종으로 팔아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인들의 손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성취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인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의 죄는, 큰 죄지만, 한 편으로 이 일은,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다. 무지한 백성과, 지도자의 손을 통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되었으니, 자신의 무지로 인해 저지른 죄에 대해, 지나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언급과,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표적인 예언이, 선지서와 시편에 등장한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손을 통해, 이러한 예언들을 성취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말로 주님을 거부하고 죽인,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뉘우치고,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뻔뻔하고 교만할 뿐만 아니라,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나 성경을 통해, 이러한 죄인을 위해, 창세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했음을 알 때, 교만하던 우리 마음에서 회개가 터져 나오고, 감사가 넘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회개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나오면, 하나님은 더욱 더 귀하고 아름답게 쓰신다. 우리 영혼이 주님을 몰랐을 때의 모습을 보고,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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