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침(행3:1-10)
성령으로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영적이었고,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었다.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았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어려운 형제를 돕는 일에 힘썼다. 성전에 모여 모임을 가진 후, 다시 각 가정에 모여 만찬을 들고, 기도하며, 찬미하는 일에 힘썼다.
온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자, 그 교회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증가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태어난 교회는, 성령의 바람을 받으면서, 돛을 올리고, 선교의 항해를 떠날,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이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1. 성전에 올라간 베드로와 요한(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앞에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많은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2:43).
본문은 성령의 표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 즉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고친 일을 기록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교회는,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유대 당국자들의 박해를 불러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때, 오히려 박해가 일어날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9시(오후3시) 기도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3번, 즉 3시(오전9시), 6시(12시), 9시(오후3시)에, 꼭 기도했다(단6:10, 9:21). 그러나 강제적인 규율이 아니라,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었다. 9시는, 오후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다(출29:39).
3시와 제9시에는, 어린 양을 드리는 순서가 있었다(출29:39). 따라서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역사가 요세프스는 말했다. 우리는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요, 함께 사도직을 받고, 예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은 동료였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을 때도, 함께 행동했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 동역자였다(행8:14). 베드로와 요한은, 성격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든 면에서 함께 행동했다. 그들은 12제자 중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여기서 ‘성전에 올라갔다.’는 말은, 미완료 과거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두 사도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 또한 성전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을 수도 있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때 사람들은, 나면서 못 걷게 된 한 사람을, 그 곳에 메고 왔다.
이 사람은 중간에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고, 날 때부터 하체가 마비된, 선천성 장애자였다.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에, 구걸로 살아갔다. 절망 속에 살아가는 자였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지만,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구걸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기도시간에, 성전 문 앞에 데려다 주었다. 유대교는 구제를, 큰 미덕으로 여겼기에,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거지에게 동냥을 잘 해주었다. 그러므로 당시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는, 구걸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걸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성전 문 앞이, 동냥을 위한, 최고의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날마다, 그 걸인을 기도 시간에,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데려다 주었다. ‘미문’은 아름다운 문인데, 외관상으로 장엄하고 화려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3-5)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걸인은, 성전 문 앞에 있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그들에게 적선해 달라고 요구했다.
(5下) ‘하거늘’(에로타, 찾다, 살피다, 조사하다.)은 미완료 시제로 ‘계속 손을 내밀어서, 구걸했다.’는 의미이다. 그 걸인은 간절하고, 이루어질 때까지, 두 사도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 그 걸인을 주목했다.
여기는 베드로가 요한보다,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대변자 역할을 해왔다(마16:13-16).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걸인을, 자세히 주목했다. 그에게는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다.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느끼고, 구걸하는 걸인을 주목하면서, ‘우리를 보라!’고 했다.
사도들은 그 걸인에게, 귀한 선물을 주기 위해, 우리를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 걸인은, 그의 말을 듣고, 두 사도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바라보았다’(에페이켄, 에페코, 굳게 잡다, 못 떠나게 붙들다)의, 미완료 과거로, ‘주의를 집중해서, 떠나지 못하게, 두 사도를 계속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말씀을 떠나지 않도록, 굳게 붙잡음이 믿음이다. 보통 사람들은, 몇 푼 던져주고, 성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두 사도가 멈추어 서서 ‘우리를 보라.’고 하자, 그 걸인은 무언가를 얻을 기대감으로, 사도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두고, 하나님을 기도하고, 바라보면,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한다.
2.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 걸인이 두 사도를 바라보았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베드로는 그 걸인이 원하는, 은과 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청빈한 삶을 살았으며, 혹 물질이 있었다 해도, 교회에서 공동으로 관리했다(행2:44-45). 그러나 꼭 사도들이 물질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돈이 있어도, 그 걸인에게 더 귀한 것을 주려고,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교회도 세상처럼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세상의 문제를 구제로, 교육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구제와 교육이 중요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한 후에, 곧바로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준다.’고 했다. 베드로는 은과 금보다 더 귀한, 하늘의 선물을 주려고, 걸인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다.
여기서 세상 사람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세상이 갖고 싶은 것과,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원하는 보화, 예수님과 천국을 얻었다.
베드로는 그들과 동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그 걸인에게 주었다. 그는 부활하고 승천하여, 온 우주를 다스리는 왕의 이름으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하여 ‘일어나 걸으라!’고 명했다.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에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일으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걸으라!’(페리파테이, 페리파테오)는, 시작과 계속의 뜻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러한 베드로의 명령은, 우주의 왕의 이름으로 선포된, 권위 있는 명령이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 승천하신 분이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다. 그 걸인은 베드로가 외치는, 권위 있는 명령에 순종하였으며, 바로 그때에, 성령의 큰 능력이 그 걸인에게 임하게 되었다.
걸으라는 베드로의 명령이 떨어지고, 순종하려는 순간, 성령님은 그 걸인의 영혼을 움직여주었다. 40년간 말라붙었던 그의 하반신에, 생명의 능력을 불어넣었다.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여기에 베드로의 놀라운 위대함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한 후에, 그 걸인이 힘겹게 일어서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말한 후에, 즉시 그의 몸을 굽혀서, 장애자의 오른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 장애자가 명령에 순종하여, 일어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붙들어 주었다.
걸인은 수십 년 동안, 일어나 걸어본 적이 없었기에, 일어서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오른 손을 붙잡아 일으켜 준 베드로의 행동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바로 그 순간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게 되었다.
누가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치유된 사건을 묘사하면서,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을 사용했다. 의사였기 때문이다. ‘발’(바세이스)은 ‘바이노’(걷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발목’(스퓌라)은 ‘복사뼈’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두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사용된 의학용어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그 동안 걷지 못한 것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하는 순간, 성령님이 그의 발과 발목에,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마른 발과, 발목에는 근육과 힘이 생겼다.
회복이 너무도 강력하고 신속했기에,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즉시 자기 발로 일어설 수 있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다. 오랫동안 다리를 다쳐서, 쓰지 못하는 사람은, 근육이 약해져, 발이 나은 후에도, 근육에 힘이 생길 때까지, 한동안 물리치료를 해야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순간에 40년 동안 서서,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일어나서 걸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놀라운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는, 상식과 과학을 뛰어넘는다.
3.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함(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일어서서 걸었을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뛰기까지 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는 (계속) 뛰고 있고, (계속) 걸어서 돌아다녔다.”로 번역할 수 있다. 뛰고(분사) 걸으며(미완료형)를 사용함으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나은 후에 계속해서 걷고 뛰는 행동을 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너무 기뻐, 사슴같이 뛰어다녔다. 이러한 일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1)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름으로, 선포한 말이 즉시 실행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자, 역사가 나타났다(요15:7). 살아계신 우주의 왕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선언한 베드로의 말을, 즉시 이루어주었다.
(2) 이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이다. (사35:6上)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3)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이, 신적권위를 입증해 주는 이적이었다. 예수님은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보여주었다.
40년 동안 불구가 되어서, 침상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은, 이제 고침을 받고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고침 받은 후, 사도들과 함께 기뻐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가 걸을 수 있게 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에 들어간 일이었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구걸하면서, 자신도 몸이 건강하면,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걸을 수 있게 된 후에, 즉시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성전에 들어가, 계속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고쳐주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 모습은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라!’ 한, 이사야의 예언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뛰기도 하며’(할로메노스, 할로마이) 날뛴다는 모습이다. 그는 다리를 다쳤다가 나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었으며,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 걸인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능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후에, 감사와 기쁨으로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어 있다(히13:15).
(9-10)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그때 기도하러 성전을 찾아왔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서 걷고, 뛰며,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했기에, 성전을 종종 찾아오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냥을 위해 손을 내밀던, 걷지 못하던 걸인이, 온전해졌음을 보고, 크게 놀랐다. 여기서 ‘심히 놀랍게 여기며’(담보스, 말문이 막히다.)는, 어떤 행위를 보고, 크게 감탄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보고 놀라, 두려움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놀라니라.’(엑스타세오스, 엑스타시스, 당황, 황홀, 경악)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나, 마음의 평정을 잃고, 망연자실했다는 말이다. 무리들은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치유 받고, 걷고 뛰면서 찬송하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를 본 사람들은 놀랐다.
나면서 못 걷던 자 인 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분명히 그가 걷고 있고, 찬송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백성들이 충격을 받았다. 이처럼 한 사람의 분명한 변화가, 많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렇기에 한 사람인 내가, 변하됨이 중요하다. 내가 변할 때, 세상이 변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내가 변하면 변한다. 이 사람은 많이 배우고, 돈도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별 볼 일 없는 존재였지만, 그 한 사람의 변화로, 초대 교회는 세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 성도들은,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자. 말씀에 집중하자. 그러면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아무 쓸데없는 자가, 변화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일군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일에, 내가 쓰임을 받도록, 성령님이 역사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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