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 7월 4째주 - 성령 충만한 생활(행2:4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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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ibleman |
작성일 : 2014-07-27 |
첨부파일: 성령 충만한 생활.hwp(23K) |
성령 충만한 생활(행2:42-47)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했을 때, 무리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들었고, 타오르는 불이, 혀처럼 나타나서, 각 사람들 위에 머무른 것을 보았으며,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도들이 각각 다른 말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이어서 베드로는,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오순절 사건은,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죽였던 예수님이, 부활하였고, 승천한 이후에, 성령을 보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이라고 했다.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말씀을 받아들여, 침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3천이나 되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이 교회에 임하여 일어난, 아름다운 열매들을 소개한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제자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 지체가 되었다. 또 그들에게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혔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하여,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1. 성도들의 영적생활(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성령님의 인도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적생활을 말씀했다.
(1) 가르침을 받음(42上).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한 후에, 예루살렘에서는 말씀을 배우는 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 교사들은, 예수님이 세운 사도들이다.
‘사도의 가르침’은 원문에는, ‘사도들의 그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① 사도가 ‘복수’로 되어 있다. 당시에, 베드로만 성도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도들도 함께 가르치는 일에 동참했음을 보여준다.
② ‘그 가르침’은 단수다. 사도들은 성령으로부터, 각자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성도들을 가르쳤지만, 그들이 가르친 내용은, 통일성을 유지했다는 말이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가르쳐 준 말씀이며(행5:42, 20:35, 28:31),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서 행한, 놀라운 일들이었다.
이 학교에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믿고, 침례를 받은, 3.0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 학생들은, 신비적 체험을 경험하고, 지성을 멸시하거나, 신학을 경멸하지 않았다. 성령님은 말씀을 배우는 일을 막지 않고, 오히려 진리의 영이기에,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도록 만들었다.
초기 성도들은, 성령을 받았기에, 인간 교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령을 받고, 말씀의 굶주림을 느꼈으며, 적극적으로 말씀을 배우는 일에 참여했다. 당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신약성경에 기록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또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2) 서로 교제했다(42中).
“…서로 교제하고…” ‘교제’(코이노니아)는 ‘동료, 참여자’를 의미하는 ‘코이노노스’에서 나온 말이다. ‘참여, 나누어줌, 교제, 기부금’을 말한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함께, 2가지로 교제를 나누었다.
①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하나님과 예수님, 또한 성령님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를 함께 누렸으며, 이를 통해 온갖 귀한, 하나님의 영적 축복들을, 누릴 수 있었다.
② 이웃과 나누는 일에, 함께 참여했다.
하나님과 교제를 계속했고,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얻은 복을, 이웃을 섬기고, 함께 나누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했던 연보를 ‘코이노니아’라고 했다(고후8:4 ‘참여함’과 9:13 ‘연보’).
‘코이노니아’는,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돕기 위해, 자기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흔쾌히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누가는 계속,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자기 소유를 흔쾌히 나누는 일을 언급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드렸다. 교회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위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옆으로는 어려운 형제들과 이웃을 섬기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이웃과의 섬김과 교제가, 성령 충만한 교회에 나타난, 두드러진 열매 중에 하나였다. 성도들과 나눔이 없다면, 이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3) 예배했다(42下).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섬기고 나누어 주는 일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여, 예배하는 일에도 힘썼다.
떡을 떼는 일은, 성만찬이나, 성도들의 공동식사 애찬을, 의미한다(2:46, 20:7, 고전10:16, 11:23-25).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기서는, 떡을 떼는 것과, 음식을 먹는 것을 구분하여 언급했다.
떡을 떼는 것은, 성만찬을 의미하고, 음식을 먹음은, 성도들의 공동식사, 애찬을 의미한다. 그들은 성만찬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일에도 힘썼다. 초대교회에서 성만찬과 기도는 예배였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날마다 성전에 모였고, 그 후에 다시 각 가정에 모여, 성만찬을 들고, 기도에 힘썼다.
성령을 받고 그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이고,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모였다. 집에 모여서 떡을 떼면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성전 모임 후에, 다시 각 가정에서, 자발적인 모임이 있었다.
여기서 떼는 떡은, 각 가정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성찬과 애찬을 의미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넓은 공간이 있는 집을 선택해서, 하루씩 돌아가면서, 모였을 것이다. 그들은 기쁨이 넘쳐서, 성전에 모인 후에, 다시 이집과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모임을 갖고 음식을 나누면서 교제를 나누었다.
이러한 모임은, 성전에서 할 수 없던 일들을, 보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부족한 부분을 가정모임을 통해, 스스로 보충해 나갔다. 공식행사와 개인행사를 병행했다. 공식 예배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그러므로 가정 모임을 통해, 이런 요소들을 채워나간 일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오로지 힘썼다.’는 말은, 미완료 과거다. 미완료는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행동을, 전심을 다했다는 의미다. 그들은 성전 모임을 가지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가정에서 모이는 일에도 힘썼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잠시 동안만 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 가졌다. 가정에 모여서, 함께 성만찬을 들었으며, 함께 기도했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자발적인 모임에 힘쓰는 교회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공식적인 예배에 힘써 참여할 뿐 아니라, 예배 후에도 계속 자발적인 모임을 가졌다.
2. 성도들의 삶의 모습(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과, 그 반응을 말씀한다. 성령 충만한 자들은, 신앙과 삶이,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1) 사람마다 기사와 표적으로, 두려워하였다.
성령으로 충만 하자, 신적권위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공포는, 두려움은 공포심이 아니라, 신적권위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두려움의 근거는, 사도들로 인해,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권능과 기사와, 표적들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언하였다. 성령님은 다시 사도들을 통해, 기사와 표적들을 나타냈다. 이러한 기사와 표적들은, 사도들의 사역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증언했다.
성령님은 사도들을 통해,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여,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기사와 표적은, 사도들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며,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이 된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고, 기사와 표적이라는, 성령의 증언이 함께 나타났다.
(2) 어려운 형제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줌(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성령 충만의 또 다른 열매는, 영적인 은사만 아니라, 물질을 나누는 일이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었다는 말은, 가정을 버리고, 공동체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같이 있었다.’는 미완료 과거로, 신자들이 늘 계속 모였다는 의미다. 가정을 버리고, 공동체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자주 모였다. 그들은 이전에, 구약시대의 규례를 준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함께 모였다. 성령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속되게 만든다. 성령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영적교제를 누릴 수 있게 만든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같이 사용했다.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하나 되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쿰란 공동체 지도자들은,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쿰란 공동체 규칙에 따르면, 모든 회원들은 어디에 살든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 그리고 이방인을 구제해야 했다. 그러나 수도원에 살면서, 공동체생활을 하던 회원들은, 훨씬 더 엄한 규율을 따랐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회계를 맡은 사람에게, 양도해야 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모범 삼아, 지금도 교회가 이러한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요구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모든 성도들이 자기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많은 논란이 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결코 모든 성도들에게, 재산을 다 포기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말은, 공산주의처럼 강제로, 모든 재산을 공유한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제도에 의해, 강제적으로 재산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만 자발적으로, 재산을 내놓았다. 그들 중에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사유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공산 공동체는, 사람들이 원하던 이상향만 있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
그들의 이상향은, 원시 공동체의 생활과 유사했지만, 성령의 공동체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결속된 신적 공동체다. 이런 현상은, 성령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만 일어났고, 다른 지역에서는 일어나 않았다.
따라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강하게 역사했는지를 보여주는, 특별한 현상이었다. 후에 바울을 통해 생긴 교회에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방인 교회에서는, 서로 통용하는 흔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전11:21-22).
그렇지만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자발적으로 자기 재산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내놓았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자기 재산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된다.
어려움을 당한 형제들을 보고, 돕지 않는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성령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따라서 교회는,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전도했던 이방인의 교회 역시,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자발적으로 많은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 이처럼 성령은, 이웃을 돕는 사랑을 넘치도록, 만들어 준다. 성령의 역사는 교통(코이노니아)에 있다(고후13:13).
(3) 찬미와 전도(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함께 모여 만찬을 들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에도 열심을 냈다.
①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각 가정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했다.
그들은 이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귀중한 축복을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러한 찬송은,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자발적인 찬송은, 성령 충만한 성도에게 나타나는 열매다. 성령의 열매로 인해,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든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이러한 초대교회 분위기는, 총독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랴안(Trajan)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박해를 피해, 비밀리에 모이는 기독교공동체를, 은밀히 조사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을 가리켜 “그들은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했다. 이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윤리적으로도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라고 할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았기에, 온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② 성령 충만한 교회의 마지막 열매는, 성도들의 증가다. 그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부흥의 주체였음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구원받는 사람들은’ 수동태 분사다. 수동태로 기록함은,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예수님으로 인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더하게 하셨다.’(프로세티데이)은 미완료 과거로, 계속 더하게 했다는 뜻이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성령에 의해 믿는 사람이, 증가하게 되어 있다.
현대교회는 인위적으로 부흥을 꿈꾼다. 그것이 교회성장학이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좋은 시설로 확장하면 교회가 부흥한다고 하지만, 타락만 시켰다. 성령님은 세상에 복음을 증언하여, 세상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래서 성령은 계속 반복해서,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도록 인도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역동적인 전도와 선교의 활동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성령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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