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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4년도 6월 4째주 - 영적인 싸움은 진리 전쟁(창3:4-5)
  작성자 : bibleman 작성일 : 2014-06-22
  첨부파일:   영적인 싸움은 진리 전쟁.hwp(48K)
영적인 싸움은 진리 전쟁(창3:4-5)

빨간색 안경을 끼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인다. 파란색 안경을 끼면, 온통 파랗게 보인다. 어떤 안경을 썼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이를 세계관이라고 하는데, 세계관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없다는 무신론의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무신론의 증거로 가득하다.

자연이 곧 신이라는, 범신론의 안경을 쓰고 보면, 이 세계는 범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정신보다 물질이 중요하고, 물질이 근원이라는 유물론의 안경을 쓰고 이 세계를 보면, 세계는 유물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자기 세계관이, 진리라고 한다.

나와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될 때, 신기하기도 하고, 충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교회 안에도, 서로 다른 세계관 때문에,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보수는 성경중심 신학을 강조하고, 진보는 사회참여 현실 신학을 강조한다.

보수교단은 제사장적 기능에 충실한 반면, 진보교단은 예언자적 기능에 충실하다. 교회는 물론 두 가지 기능을 다 가지고 있지만, 다만 정도의 차이를 보고,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질 수 있다. 보수는 주로, 위문품지원과 헌금구제사업, 그리고 기도로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친다.

진보는 하나님의 나라를, 근본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민중사회적인 연대투쟁을 실시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부분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조작한다면, 사단적인 모습이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했다.

그런데 거짓의 아비(요8:44)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꿔치기 했다.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했다.

(2-3)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가감했다.

(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렇게 전달되어, 사단의 거짓말은 크게 4가지로 나누어진다. 이 거짓말들은, 잘못된 4가지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사단의 이 거짓말은, 아담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사단은 지금도 똑같이 쓰고 있다. 이것은 사단의 공식이다. 사단은 이 공식을 약간 응용해서 출제한다. 그러면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거짓말에 계속해서 넘어간다. 사단의 4가지 거짓말은 무엇인가?

1. ‘인간이 결코 죽지 않는다.’는 불사영생의 신비주의(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죽음은 인간이, 마지막에 직면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마지막에 풀기 원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계관들이, 여기 저기 나타났다. 도교는 장생(長生), 불노(不老), 불사(不死)를 꿈꾸어 왔다. 죽지 않는 경지에 이른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로 승천한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변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금을 갈아서 먹었다.

금이 소화가 되지 않자, 체내에서 합성작용이 일어나, 금이 되게 만드는, 금단이란 환약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금단은, 수은과 유황으로 만들었기에, 영원히 살려고 소원했던 사람이, 금단의 열매를 먹고, 오히려 수은중독에 걸려죽었다. 진시황의 죽음도 수은중독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단전에 기를 쌓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단전호흡의 기원이다. 요즘 단전호흡이, 건강차원에서 상당히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단전호흡의 목적은, 단순한 건강 추구가 아니라, 영원히 살고자 하는 데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없이도 ‘수행’이라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영생을 추구하는 인본주의 술수이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할 수 있지만, 악령은 건강차원이라 해서, 봐주지 않는다. 단전호흡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은, 매우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이다.

단전호흡을 하다가, 정신병과 신체적 병에 걸린 사람도 있고, 악령 들린 사람도 있다. 단전호흡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도, 사기가 침범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단전호흡은 사단의 가르침에 근거한, 영생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영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실천하면, 성령님이 역사한다. 그렇지만 사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귀신이 활동하게 된다. 사단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교두보로 삼아 역사한다. 우리 안에 교만이 있으면, 교만의 영으로, 의심이 있으면, 의심의 영으로 역사한다.

이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진리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영원히 살고, 죽는지 몰랐다. 인간의 타락으로 죽음이 왔다. 죽음의 원인이 죄인 줄 모르고, 물질적으로 접근했기에, 영생하는 방법도 지극히 물질적이다. 먹는 것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다. 선악과 안에 죽는 성분이 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시 살기 위해서는, 잘못된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불순종했기에 죽었다면, 살기 위해서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 ‘눈이 밝아진다.’는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5上).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눈이 밝아져.’는, 히브리어는, ‘눈이 열린다. 예리하게 관찰하다.’(ח󰙍󰘱, 파카흐)이다. 무지한 상태로부터 깨달아,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17-18C에 서양에는, 깨달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계몽주의’라는 철학사상이 등장했다. 계몽(啓蒙, Enlightenment)의 어원은 ‘밝아짐, 빛’에 있다. 사단의 별명은 (고후11:14) ‘광명의 천사’이다. 루시퍼라는 이름도, 그 어원이 빛과 연관되어 있다. 자랑하다. 빛을 밝히다(헬렐, 할랄)에서 왔다.

이성의 빛이, 진리판단의 절대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으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신학도 이성에 맞게,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초이성적인 사실들을, ‘신화’나 교훈을 위한 ‘예화’로 취급해 버렸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이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물고기 2마리와 떡 5개로 수천 명을 먹을 수 있는가? 그때 많은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왔는데, 모두들 나누어 먹기 싫어서, 도시락을 내놓지 않고, 감추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순수하고, 욕심 없는 어린아이가, 먼저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내놓으면서, 나누어 먹자고 했기에, 어른들이 감동을 받아, 너도나도 도시락을 내놓고 나누어 먹었다. 기적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나눔과, 경제적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자는 말로 설명하면, 매우 합리적이다.

그러나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계시에 대하여 폐쇄적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까지 이성으로 따지고, 이성에 수용되지 않으면, 신화로 돌려버린다. 지금도 이성을 존중하는 정신이,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대한 신뢰를 가져와, 수많은 이성주의와 과학주의를 낳았다. 과학숭배자들은 과학적 깨달음만이, 미래를 밝게 할 수 있다고 한다. 과학, 이성, 합리성이란 말로,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사단의 목적은, 자기 정체를 알리거나, 알리지 않는데 있지 않고, 영광을 가로채는데 있다. 사단은 ‘눈이 밝아진다.’라는 세계관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단은 동산 중앙의 나무 실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는가?

실과를 먹은 후에 (창3:7)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하였다. 눈이 밝아졌는지 모르지만, 오히려 인간은, 두려움과 수치심에 쌓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숨게 되었다.

하나님이 심술이 많아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다. 아직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기에, 먹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전능하지 못한 존재가, 전능하려고 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세 살도 안 된 어린 아기가, 가스 불을 켜고, 밥을 해먹는다고 하면, 그것을 허락할 부모는 없다. 자기 아이를 사랑하지 않거나, 질투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과학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린 아들이게, 왜 가스불이 위험한지, 설명해줄 수도 없다.

그 때는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이다. 아이는 당장 이해할 수 없어도 ‘안 돼’라는 말에 담긴, 부모의 사랑을 믿어야 한다. 사탄에게 속아서, 인간의 눈이 밝아진 결과,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보고 수치심을 느꼈다.

단순히 서로가, 육체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를 인식하게 되어,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아니다. 죄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떳떳하지 못하게 만든다. 거룩함이 사라진다면, 영적인 권위와 당당함도 사라져버린다.

3.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범신론적 합일주의(5中).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사단이 가장 잘 이용하는 전략이다. 사단도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기에, 인간도 동일한 방법으로 타락시키려고 한다.

신천지의 이만희는, 자신을 신격화 시킨다고 오해라고 하면서 (요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나야만, 신의 소생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기록된 말씀은 (시82:6)인데, 재판장들을 가리켜 ‘신들’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재판장들이 신(神)의 시키심을 받아, 재판을 대행한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받으면, 영원한 신들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신과 같은 인물로 가르친다면, 엉터리이다.

박태선(전도관 현 천부교, 참하나님), 조희성(영생교, 하나님의 성회, 재림주), 이만희(신천지교회, 보혜사), 정명석(메시아 예수), 문선명(통일교, 참하나님. 참아버지), (안상홍: 안상홍 증인회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 보혜사 성령), 장길자(하나님의 교회, 어머니 하나님), 이승헌(뇌교육) 라즈니쉬(인도)…

에스겔 28장은, 사단의 타락사건을 잘 묘사해 준다. 사탄의 사상 중심에는, 교만함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논리다. 범신론은 교만으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기에, 사람들이 잘 따른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세계관은 예외 없이, 범신론적 신비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불교는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기에, 누구든지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되고, 우주의 궁극자가 된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곧 신이 된다는 말이다. 뉴에이지는 핵심 내용은 2가지다. 만물은 하나다. 인간은 신이다. 이 2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양하고 개성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한다. 여기에 사단의 음모가 나타난다.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합일주의를 말하는데, 혼동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도 ‘하나 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 됨을 위해 기도했다(요17:21).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함으로 이루지는 합일이 아니라, 연합이다. 사단은 고상한 철학과, 아주 그럴듯한 세계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한다.

사단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흉내 낼 수 없다. 그렇기에 사단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다양성을 부정하게 함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보고자 하는 것으로, 성경은 합일이 아니다. 각자의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하나 되는 연합이다.

4. ‘선악을 알게 된다.’는 도덕주의, 율법주의(5下).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죄는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는 생각과, 결정과 가치관과 행위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의 법과 기준에 맞는다면, 자신이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문제는 인간들은 타락해서, 양심이 부패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절대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법과 기준은 상대적이다. 부패한 양심은, 하나님의 절대 기준을 상실하였다.

그런데도 양심을, 절대 기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자기 기준으로는 선과 악을 구분한다. 이것이 바로 교만과, 자기 의의 출발점이다. 자신이 생각할 때, 선한 동기면, 선이라 주장하고, 자신이 생각할 때, 선을 행했기에 천국 간다고 생각한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자신에 둔다.

예를 들어서, 미국이나 일본에는 간통법이 없으니까, 불륜이 죄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으로 볼 때, 간음은 죄이므로, 어느 나라에 살고 있든, 아무도 불륜을 저지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용납하는 문제도,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된 것은 마음이라…”고 했다. 따라서 타락한 우리 양심이, 구원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 타락한 양심을, 구원의 출발점으로 삼은 사람은 “내가 무슨 죄인이냐? 도둑질을 했냐? 강도질을 했냐? 나만큼 양심적으로 살은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나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라고 한다. 양심이 무뎌지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 흉악한 죄를 짓고도, 전혀 양심에 거리낌 없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때때로 본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기 죄를 깨달을 수 없다.

나아가 자기 의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 선악에 대해서 판단하고, 죄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만 있다. 자신의 기준에 비춰, 스스로를 의롭다 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함이, 바로 도덕주의이고, 율법주의이다. 도덕주의는 믿음으로 구원받음이 불공평하다고 한다.

이들은 자기 주변의, 어떤 사람들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 사람은 무질서하고 난잡하게 살다가, 예수님을 믿었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이, 단지 예수를 믿었다고 구원받을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대로, 간디같이 탁월한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행위로 구원받음은 공평한 일이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인가? 깊이 생각을 해보자.

지금 제가 행위로, 구원받는 종교를 만들었다. 그래서 구원의 교리를 세우기 시작한다. 선행을 하면 구원받는다고 정했다. 그런데 선행에는,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기준을 횟수로 정했다고 하자. 선행을 100번 이상 한 사람은 구원해 주고, 100번 미만은, 구원해주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당장 문제가 생긴다. 어떤 사람이 선행을 99번했다. 그 사람이 나는 정말 억울하다고 항의한다. “이럴 수 있습니까? 나는 딱 한 번 모자라는데, 구원해주지 않으면, 불합리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마음이 약해져서, 기준을 90번으로 낮췄다. 그러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가?

이번에는 89번 선행한 사람이, 와서 항의한다. 다시 기준을 80번으로 낮추자, 79번 선행한 사람이 와서 항의한다. 이 종교는 시작부터 무너진다. 행위로 구원받음은, 기준이 애매하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용납할 수 없다. 또 선행은, 환경이 유리한 사람이, 베풀기가 더 쉽다.

돈 많은 사람이 구제하기 편하지, 먹고살기도 힘든 사람이, 구제하는 것이 더 편한가? 또한 건강한 사람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자기 몸 하나도 추스르기 힘들기에, 남들에게 선행을 베풀기가 어렵다.

남에게 지식을 나눠주는 선행도,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그냥 자기가 가진 실력으로 남을 가르쳐주면 되지만, 하나를 들으면 열 개가 헷갈리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너무나 불공평하다.

마지막 때에, 마귀의 간계가 더욱 나타난다(엡6:10-13). 마귀는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도록, 유혹하며 의심하게 한다. 마귀의 최대공격은,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한다.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목사를 미워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싫어하게 만들면, 아무리 좋은 설교도, 들리지 않는다. 사단은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든다.

교회에 실망하게 만들어,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잃어버린다. 거짓의 아비 마귀를 이기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다. 말씀을 듣고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받아들일 때, 우리 주위를 맴돌던 마귀는 떠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올바로 배우고, 말씀을 잘 듣고, 믿음을 키우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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