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 6월 3째주 - 침례의 중요성(마3: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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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ibleman |
작성일 : 2014-0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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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의 중요성(마3:13-17)
오늘 장면은 예수님이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는 모습이다.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 이때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막1:4)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다.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증표로 침례를 받았다(막1:5).
4복음서에는 모두 예수님이, 침례를 받았다고 했다(막1:1-8, 눅3:1-18, 요1:19-28). 침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혀주는 말씀이다. 유언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침례를 받으라고, 유언으로 남기셨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고 했다.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로, 침례를 받으라 했다. 제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다. 따라서 침례의 대상자는, 반드시 믿는 신자라야 한다.
유아나 불신자는 침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침례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신자의 첫 순종이다. 이 명령은 온전히 지켜져야만 한다. 침례를 너무 중요하게 여겨, 천주교는 침례를 ‘영세’로 바꾸고 “영세는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며, 중생을 주입시키고 보존한다.”고 했다.
그리고 미신적 수단으로 바꾸고, 머리에 물을 붓거나 뿌리는, 이방종교 형태로 바꿨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약500년이 되는데, 아직까지 침례를 행하지 않고, 세례를 행하는 천주교회의, 잘못된 구습을 따르는 교회들이 있다. 세례와 침례는, 형식만 다를 뿐, 내용이 같다고 말한다.
1. 침례(浸禮)와 세례(洗禮)는 같은가?
(1) 예수님은 침례를 받고, 침례를 주라고 했다. 세례는 머리에 물을 뿌린다. 물 뿌림은, 란티스모스(‘ραντισμός), 동사는 란티조(‘ραντίζω)다(히9:13; 19, 21-22). 물을 붓는 것은, 엑케오(ἐκχέω)다.
그런데 몸이,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는 밮티스마(βάπτισμα), 동사는 밮티조(βαπτίζω)로서 ‘침례를 베풀다.’이다. 밮티조는 밮토(βάπτω)에서 파생됐는데, ‘물에 완전히 잠그다, 옷감을 염색하기 위해서 잠근다. 하나 되다, 멸망시키다’라는 뜻이다.
한글성경에 세례로 표기한 원문은 ‘란티스모스’가 아니고, ‘밮티스마’다. 따라서 바르게 번역하려면, 침례로 번역해야 한다. 일본어 성경은 ‘밮트스마’가 그대로 사용되어 있고, 영어성경도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뱊티즘(baptism)이라고 했다.
(2)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다(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라고 했다. 예수님은 침례(βαπτίζω)를 받았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하나님께 헌신과 복종을 하기 시작했다. (마28:19)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고, 침례를 베풀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우리들도 예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려면, 침례를 받아야 한다. 침례는 예수님의 명령이기에, 신자의 첫 순종 행위임을 강조한다(마28:18-20).
예수님을 구세주요, 주님으로 믿는, 제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침례를 통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침례를 받지 않는 분들이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으로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제자가 스승의 첫 번째 명령을, 거역하는 모습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침례의식을 행한다. 이 의식을 א(미크베)라 한다. 미크베는 ה(카바)라는 말에서 왔다. ‘함께 묶는다.’ ‘…의 도움을 기대하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는 말이다. 명사는 ‘하나가 됨, 소망, 연합’이 된다.
유대인들은 물이 안 닫는 곳이 없도록, 손가락도 벌리고, 겨드랑이도 완전히 붙이지 않고, 완전히 잠겼다가 나온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침례를 소중히 여겼고, 마지막 유언 지상명령에서도, 침례를 주라고 했다.
사도들도 침례를 강조했다. (행1:21-22) 초대교회는 가룟 유다 대신 사도를 뽑는 조건으로, 침례를 받은 자라야 했다.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며, 회심한 자에게 침례 받으라고 했다.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침례를 받았을 때, 믿는 자로 여겼고, 주님의 제자로 인정을 받았다.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침례를 받아야 한다. 퀘이커교도나 구세군은, 침례를 포기한다.
2. 세례와 침례의 내용적 차이
어떤 부분에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세례의 ‘洗’자는 씻을 세자다. ‘죄에서 깨끗이 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뿌린다(기독교강요).
그러나 침례의 의미는, 하나 되었다(연합)는 뜻이다. 세례와 침례의 의미를, 예수님께 대입해보자.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에서 돌아서겠다는 의미로 받는다. 그렇기에 죄인에게 필요한 의식이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이, 죄를 씻는 세례를 받았다면, 예수님도 죄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이 죄가 있다고 한다면 이단이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 받으려고 하실 때(13),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오시나이까?(14)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고 하셨다. 그래서 요한이 허락하고,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침례를 받았나? (15)에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의를 이룬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침례를 통해, 잘 설명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 되어, 우리 죄를 짊어진 사건이, 침례를 통해 나타났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이튿날 나오시자, 요한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선포했다. (요1:29)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의 죄를 짊어진 속죄제물을, 구약에서는 어린양이라고 했다. ‘어린양’(암노스)은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이다. 구약 시대에는 죄진 사람이 어린양에게, 자기 죄를 짊어지게 하고, 그 양을 죽였다. 요한은 그 제물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으신 분이다. 그러나 침례를 받으심으로, 인간과 하나가 되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공식적인 제물로 죽으셨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했다. 예수님은 이처럼 대속물이 되려고, 침례를 받으셨다. 우리가 죄가 그냥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속죄양 되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주님과 연합되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함께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다. 이렇게 침례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한다.
물속에서 올라올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부활하였다. 그러므로 침례는, 복음의 핵심이다.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한다. 물속에서 올라올 때,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부활한다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침례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복음을 확실히, 몸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세례로 할 때, 죄를 씻어 깨끗함을, 죄에 대하여 장사했다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1차 의미인, 연합이라는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가 아니라, 침례를 써야만 마땅하고, 그렇게 행해야 한다.
침례는 나와 연합된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르고, 죽었다가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음을 선포하게 된다. 나를 위해 죽고, 부활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구원에 이르게 된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를 청산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행2:38).
신자의 침례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충실하도록 권고하는 원리이다.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할 때까지, 아무도 개종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신자들의 연합과, 그리스도께 순종함을 상징한다.
또 침례는 교회의 연합을 상징한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과의 연합을 포함하고 있다(고전12:13). 교회는 그 머리에 응답할 때, 다양한 지체들과 기능들 속에서, 조화롭게 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침례를 받는 시간이 얼마나 복된 시간인가?
침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3. 침례가 왜 세례로 바꿨는가?
성경은 침례를 가르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다. 초대교회도 침례만을 베풀었다. 2C에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자,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하여,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나타났다.
로마가톨릭의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또 ‘죄사함을 받게 하는 침례’(막1:4)라고 하였기에, 침례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요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을 침례로 생각했다.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 침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이나 병자들에게는, 침례를 베풀기가 곤란했다.
그래서 2세기에 쓰인 디다케(12 사도들의 교훈서)를 보면, 침례를 실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물을 부으라고 함으로, 비성경적인 침례를 가르쳤다. 3C의 씨프리안은, 죄를 씻는 것은 물의 양의 문제가 아니니, 세례도 좋다고 하며 세례를 허용했다. 그러나 8세기까지의 교회들은, 주로 침례를 실시했다.
8세기 중반에 로마교회의 법왕 스데반 3세가 영을 내려, 침례 대신 세례를 줘도 좋다고 정식으로 공포했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 모인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을 실시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하여 많은 성도들을 핍박했다. 그 후부터는 세례만 실시되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고집했다. 그들을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도 성경에는 침례로 되어있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했다. 아직도 세례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다.
성경적인 침례에서 벗어나자, 침례교도들은 회개했다는 표시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고 하면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싸웠다. 성경이 말하는 침례는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한 자는, 그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았다(막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포하는 선언이다. 쉽게 생각하면 침례식은 결혼식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는 아니다. 초라하게 해도 결혼식을 치렀어도, 호적에 올라가면 결혼이 성립된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지 않아 결혼사진이 없다면, 의심받을 수 있다.
따라서 진심으로 사랑하면, 결혼으로 자기 사람임을 인정하듯,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죄로부터 분명히 돌아서는 회개하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를 인정한다는 말은,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침례교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자, 천주교회와 일부 개혁교도들에게, 자신이 받은 유아세례를 무시한다고, 무참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유아세례는 없다. 침례의 대상은, 반드시 믿는 신자라야 한다. 그러므로 유아나 불신자는 침례의 대상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일은 없지만, 만일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침례를 더욱 받아야 한다. 세례와 침례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구속을 위한 길이 열렸기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구원받았음을 침례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선포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음성이 있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3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1) 하늘이 열리고, (2)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그 위에 임했다.
(3)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하셨다(16-17).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신 때부터, 공생애가 시작된다. 예수님을 진정 믿는다면, 사랑은 고백되어야 한다. 그 고백이 진실이라면, 반드시 침례로 표현되어야 한다.
침례는 주님과의 연합을 말하기에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식을 행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읽어 보라. 많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변화되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로, 침례에 생명을 걸었다. 아랍 진영에서는 침례를 행하면, 공격을 한다. 요즘 옛날에 결혼식을 잘 못하거나, 결혼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겠다면서, 앙코르 결혼식을 행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의 고백이나,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나, 침례를 받았다면, 믿음의 고백과 구원의 확신을 다시 가지고, 행하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첫 걸음이 바로 침례다.
(눅7: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침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불순종의 모습이 침례를 받지 않은 모습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감격과 기쁨을 느끼는, 분들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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