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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4년도 5월 1째주 - 예수님과 어린 아이들(눅18:15-17)
  작성자 : bibleman 작성일 : 2014-05-04
  첨부파일:   예수님과 어린 아이들.hwp(23K)
예수님과 어린 아이들(눅18:15-17)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만져주신 이야기는,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복음서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마태와 마가의 경우에는, 어린아이들을 만져주신 이야기가, 이혼에 대한 가르침 뒤에, 기록되어 있다(마19:1-12, 막10:1-12).

조그만 이익과 오해로, 서로 해어지지 말고, 끝까지 온전히 믿고 따르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뒤에, 기록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했다.

또 마태와 마가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안수하고, 아이들을 만져주심을 기록했지만, 누가 복음에는 이 내용이 생략되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의 경우는, 어린아이들(파이디아, παιδία)이 언급되었지만 누가 복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나, 젖먹이 유아’(브레페, βρέφη)들이 언급된다.

누가는 파이디아 대신, 브레페란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의, 겸손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는 보물로 보았다. 그런데 과거에 어린아이와 여자들은, 천대를 받았다. 소유의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면서, 여성과 어린이의 인권이 존중되었다.

기독교 특징은,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귀하게 여긴다. 그 이유는,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아이를 학대하는 가정은, 바로 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할 수 없다. 어린아이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는, 미래를 잃어버린 교회와 같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어린이들을 사랑하며, 귀히 여겨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이 주일로 지킨다. 그리고 헌아식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우리도 그렇게 살기 바란다.

1. 어린 아기들을 만져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어린 아기들까지도(카이, 역시), 역시 만져 주기를 바라며, 데리고 왔다.

어린 아기(브레페, βρέφη, 블렢호스, 중성복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나, 젖먹이 유아’들이다. 젖먹이는 엄마 품에서, 젖을 먹고 자라는, 갓난아기들이다. 젖먹이는 산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무기력한 존재다. 어린 아이들은 아무 힘이 없으며, 그의 생명은 전적으로, 산모에게 달려 있다.

이 사건 앞에 기록된, 세리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마을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서, 저마다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여기서 ‘데리고 오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이다. 그러니까 계속, 반복해서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어린 아기들을 만져 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린 아기들의 병을 고쳐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마19:13) 말씀처럼, 예수님이, 자기 아기들에게 안수하고, 기도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에페티메산, 에피티마오, 책망했다, 경고했다.)

물론 이때 제자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 아기들이 아니다. 어린 아기들은, 꾸짖음을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꾸짖은 대상은,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어른들이다. 제자들은 문밖에서,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과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들을 꾸짖는 제자들의 언성도 높아졌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을까? 아마 사람들이 자기 아기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귀찮게 만들고, 방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어린 아기들을 하찮게 여겼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물론 예수님은, 아주 엄한 모습을 보였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다 내쫓았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며, 상을 엎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할 때는, 무서울 만큼 혹독했다. 가차 없이 그들을 정죄했고,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 지옥의 자식이라고 부르며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대할 때는 완전히 달랐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린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귀하게 여겼다.

(막5장)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그 어린 딸을 살려주었다. (요4장)에는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의 어린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께 나와, 아들을 살려주실 것을 간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병들어 죽게 된, 그 어린 아이의 병을, 즉시 고쳐주셨다.

또한 (막9장)에는, 한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그의 아들을 예수님에게 데려왔다. 예수님은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쫓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했다. 뿐만 아니라 (막9:33-34)을 보면, 한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 사이에, 서로 누가 크냐하는 쟁론이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품에 안고,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며,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함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며, 어린 아이들을 귀하게 여겼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믿고,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늘 함께 하면서 이 사실을 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다.

2. 어린 아이들을 맞이하신 예수님(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앞에 나오는 어린아이들은(브레페)는 간난 아이이고, 뒤에 나오는 어린 아이들(파이디온)은, 7세 미만의 아이들이다. 불렀다(프로스칼레오마이) 프로스(가까이) + 칼레오(부르다), 가까이 부르다 초청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했다.

용납하고(아피에미, 보내다, 곁에 두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막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아이들을 불러서,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그 어린 아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메 콜뤼에테, 현재 명령형)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당장에 그만 두라는 말이다. 우리도 어린아이들을 소홀히 여길 때가 많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의 뜻과는 멀다. 예수님은 그 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주변에 있던,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만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기와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 이때 부모들이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아이들은, 주로 젖먹이들이었다. (신1:39)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또한 (욘4:11)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좌우를 분변하지도 못하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학자들은, 어린아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 못할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할리 없다. 또 지옥에 갈 아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할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바로 그 날 죽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이런 모습을 한 자들이 천국에 간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학이다.

재 반격을 한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가 한 아이를 낳았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하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다윗의 죄는 사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했다.

그때 다윗은 금식하면서, 그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울면서 간구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말씀처럼 일주일 만에 죽었다. 신하들은 다윗이 상심할 것을 걱정해서, 그 사실을 알리기를 두려워했지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다윗이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왕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차려 먹었다.

그 때 신하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다윗에게 그처럼 다르게, 처신하는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다윗은 (삼하12:23下)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선악을 분별하고, 좌우를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아이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있을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삼하18장)에,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의 광경이 나온다.

압살롬은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서 나라를 빼앗고자, 군사를 일으켜 다윗을 반역했다. 그러다 결국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다. 다윗이 압살롬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자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속 울고, 또 울었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싸움에서 이기고도, 마치 싸움에서 패한 것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와야 했다. 자기의 어린 아이가 죽었을 때, 다윗은 슬퍼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하나님의 나라로 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은 계속해서 울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지 못했고, 그와는 영영, 이별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겔16:20)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자녀를 우상에게 불살라 제물로 바쳤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자녀를 가리켜서, ‘나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었다.

따라서 비록 그 아이들의 부모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더라도, 또한 비록 그 아이들이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더라도, 그 아이들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로 갔음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 아이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다.

자녀가 어릴 때에, 곁을 떠나갔는가? 그 아이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가있다.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것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복음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잘못하면, 낙태를 방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신학의 어려움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그래서, 어려서 죽은 자들이 가는 어떤 장소(림보)라는 곳이 있다고 하지만, 성경에 없는 창작품이다.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이 조심스럽게, 이런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교리로 내세울 수는 없다.

3.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같이(호스)는 관계대명사이다.

요즘 학자들은 예수님은, 두 종류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있음을 밝혔다고 한다. 먼저 본문 15절 말씀과 같이, 어린 아이가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고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아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함 받아 일찍 죽은 것으로 본다.

또한 17절 말씀과 같이, 성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성인이 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데코마이, 영접하다)만 한다. 그래야 성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성인이 받아들이지 않고는, 갈 수 없다.

어린 아이가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어린 아이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그 어린 아이가 그대로 받는 것뿐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말씀했다.

이른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웠다. 자기는 토색도 불의도, 간음도 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의 공로를 자랑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또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한대로, 그 바리새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처럼 인간의 의나, 인간의 공로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반면에 세리는 기도하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다. 자기에게 무엇 하나,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만 말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밝히신 대로, 그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기에 그 세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세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로지 은혜로 주어졌다. 그 세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그대로 받았을 뿐이었다. 여기 나오는 세리도,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 아이도, 사정이 똑같다. 그들에게는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합당하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다.

어린 아이와 같다(호스)는 말은, 전적으로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신자들을 의미한다. 어린 아이는 부모님의 뜻을 의심하지 않고, 주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부모님이 주는 것이, 좋은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의 힘으로 살 수 없기에, 전적으로 부모님에게 의존한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기를 위해, 필요한 것을 채워 줄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제공해 주는 구원과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복음이 선포될 때, 어린 아이처럼 믿고 받아들임을 말한다. 어른들은 사람들의 말을 의심하고, 그대로 믿지 않지만, 어린 아이는 사람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올 때,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한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와야 한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의심하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말자.

그리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받아, 그 곳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란다. 구원파와 같이, 좋으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죄를 범하는 곳에 사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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