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남(눅24:13-32)
Love와 Like에는 차이가 있다. 등산가는 산을 사랑하지만, 광산가는 산을 좋아한다. 등산가는 산을 사랑하기에 아끼고 가꾼다. 그러나 광산가는, 산에서 금을 캐고 나면, 산을 버리고 떠난다.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은, 썩어서 냄새나는 무덤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방부제를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좋아했던 제자들은, 어려움이 오자,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까지도 사랑했지만, 본문의 제자들은 실망하고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도들이 목사님을 Love하지 않고, Like하면, 목사님이 힘 있게 일할 때는 돕다가, 목사님이 쓰러지면 떠나게 된다.
1.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3-14).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여인들은 제자들과, 성에 있는 사람들에,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다.
그 날에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에, 어떤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한적한 시골, 엠마오(따뜻한 샘)로 내려가고 있었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로,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큰일을 한다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에, 죽고 말았다.
이 일로 모든 소망을 잃고,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약10km) 떨어진, 엠마오로 가면서, 그 날 두 사람은 지난 며칠 동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하며 가고 있었다. 예수님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과, 여인들이 전해 준, 빈 무덤에 대해 말했다.
(15-16)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그들과 동행하지 않고, 그들이 길을 가던 도중,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눈이 가리어져서,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① 예수님이 변형된 모습으로, 두 제자들에게 나타났기에,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막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부활 후의 예수님의 몸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② 예수님이 부활한다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그들은 아마, 예수님과 비슷한 사람이, 자신들과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알아보지 못했다. 성령님이 눈을 열어 주실 때만,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의미다.
(1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그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너희가 길을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두 사람은,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깊은 좌절 가운데 멈추어 섰다.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글로바라는 사람이었다. ‘글로바’(클레오파스, 클레오파트로스, 명성, 영광)가 누구일까?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보인다. 어떤 사람은, 글로바(요19:25, 클로파스)는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초대 예루살렘교회 감독인, 시몬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삼촌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글로바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누가가 그의 이름을 언급함을 보면, 누가복음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글로바와 함께 걸어가던, 다른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유월절 행사 때에, 함께 참석한 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글로바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요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다는 것이, 글로바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사건이, 당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만큼, 큰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2. 글로바의 잘못된 기독론을 교정함(19-20).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님은 아무 일도 모르는 것처럼, ‘무슨 일이냐?’고 글로바에게 물었다. 이 질문을 통해,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오해를 바로 잡아주었다. 글로바는 그들이 그 동안 나누었던 대화는 ‘나사렛 예수의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다고 소개했다. 이 견해는 당시 대중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눅9:19). 예수님은 능력으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에게, 선지자로 인정받은 사람으로 생각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는, 능하신 신적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는 알지 않았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죄 없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아, 사형선고를 하고, 로마군인의 손을 빌려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고, 글로바는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빌라도가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했다.
(21上)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글로바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속량(구원)할 분으로 알고 있었다.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유대 중심의 세계적인 나라를, 세울 것으로 기대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됨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죽게 되자, 당황하고 크게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글로바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일도 말했다. (21下-24)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글로바는 오늘이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어떤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다.’고 말했다. 여인들 중 몇 사람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한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일은, 제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천사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한 말은, 믿지 않았다. 글로바는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 즉 베드로와 요한이,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했다.
두 제자가 무덤에 가서, 여인들이 말대로 보니까,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그러나 무덤을 찾아간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다고 했다. 글로바는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예수님이 살아났음은 믿지 않아, 실망에 잠겨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할만한, 영적인 안목과 믿음이 없었다. 예수님이 예고하신 죽음과 부활을 믿지 못했다. 예수님은 오해로, 좌절에 빠진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시고, 이렇게 책망했다.
(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미련하다’(아노에-토스)는 아(아니다) + 노미조(법에 따라 행하다. 포괄적으로 생각하다. = ‘바보같이 무지하다.’는 뜻이다. 그들의 생각이, 미련하고 무지하다고 책망했다. ‘선지자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서서히) 믿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믿음이 있지만, 온전히 믿지 못했다. 조금만 믿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부활하여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성경에 예언되었다고, 가르쳐 주셨지만 깨닫지 못했다.
글로바와 그 일행은, 인간적인 소망을 붙들어서,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모든 소망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죽은 후에, 부활하여 영광에 들어감이, 당연한 일임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서, 모든 성경에 쓴 바, 자신에 대해 기록한 모든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 후에 영광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모세의 글은 율법(토라)이고, 선지자의 글은 ‘예언서’(느비임)요, 모든 성경(타나크)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잘못된 기독론(그리스도론)을 교정해주셨다. 우리의 죄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내용이지, 다른 사람들과 내용을, 증언하지 않는다.
(28-29)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마침내 글로바 일행은, 그들이 가려던 마을에, 도달하게 되었다.
마침 날이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을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여행하려고 했다. 두 제자들은 목적지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마을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 곳이 목적지가 아니었기에, 계속 걸어가려고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 곳에 유해달라고 강권했다.
‘강권하여’(파라비아조마이)는 ‘간청하다, 강제로 하게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에, 몇 번 사양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사양을 했지만, 예수님을 붙잡고 함께 머물러 달라고, 끈질 지게 간청했다. 예수님의 그들의 간청을 받아주어, 함께 머물렀다.
3. 두 제자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됨(30-31).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은 두 제자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여, 그 마을에 머물며, 그 날 저녁 두 제자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이 저녁식사는 글로바 일행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식사를 한 곳이 그들이 갈릴리 사람임을 생각할 때, 아마 그들이 머물렀던 곳은, 여관이나 민박집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저녁 식사 시간에, 떡을 들고 축사한 후에, 떼어 주셨다. 이러한 모습은 오병이어의 이적(눅9:10-17)과, 유월절 만찬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눅22:14). 최후의 만찬은, 12제자들과 함께 했기에, 글로바 일행은, 그 만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한,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앞에 계심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동안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영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16).
그러나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나누던 중,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밝아졌다’(디아노이크세산)는 디아 + 아노이고(열다) = ‘철저하게 열다.’이며, 수동태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 눈이 열렸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눈이 철저히 열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글로바 일행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됨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하기 전까지, 예수님을 훌륭한 성경학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만찬을 들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지만, 우리 눈이 닫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켜 준다. 우리 마음이 성령과 말씀으로 감동이 되면, 우리 마음에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이 일어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고, 우리와 함께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하게 된다.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며, 마침내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과 말씀이,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은 소원을 주며, 교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순간,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지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① 이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만난 일은, 두 제자에게 있어, 환상이 아닌 생생한 체험이었다.
②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글로바 일행에게, 함께 여행하는 나그네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는, 평범한 동산 관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후에 제자들에게는, 어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예수님은, 언제 어디든지,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우리와 교제할 수 있으며, 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모습으로, 찾아올 수가 있다.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두 제자들은 만찬을 들던 중에, 자신들과 함께한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음을 깨닫고 나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예수님이 해석해 주시는 성경 말씀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성령님은 성경을 풀어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설명할 때,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킨 것은, 성경 말씀과 성령의 감동 때문이었다. 성경을 풀어주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구약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쉽게 설명해 주셨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웠다. 뜨거웠다(카이오메네)는, ‘타다, 불을 붙이다, 비추다.’는 말이고, 수동태 분사이다. 계속 타오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을 연구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불타는 뜨거운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
고 연구하며, 뜨거움을 회복하고, 영광스런 모습을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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