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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4년도 4월 1째주 -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마5:43-44)
  작성자 : bibleman 작성일 : 2014-04-06
  첨부파일: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hwp(45K)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마5:43-4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어떻게 왜곡해 왔는지 제시한 후(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에 계속해서 바로 잡아주었다. 이제 바리새인들의 왜곡된 율법해석을 보여주는 마지막 사례, 즉 ‘이웃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웃 사랑의 가르침은 (레19:17-18) 나온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다.

①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으로도 형제를 미워하지 않기를 원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미움과 증오는 모든 죄악의, 일차적 동기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5:21-22) ‘형제를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 자’로 규정했다.

② ‘이웃이 잘못한 경우에, 반드시 견책하라.’고 했다. ‘반드시 견책하라’(호케악 토키아흐), (야카흐) ‘바로잡다.’를 2번 썼고 절대형이 쓰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범한 경우에, 수수방관하지 말고, 그를 책망하여, 올바로 잡아주기를 원했다.

③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이, 개인적으로 원수에게, 보복하는 것을 금했다. ④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기 민족을 원망하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위의 명령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명령은 이웃에 대한 모든 율법을 포함하는, 포괄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을 잘못 가르쳤다.

1. 이웃사랑에 대한 바리새인의 가르침(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바리새인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또 ‘이웃과 원수’에 대해서도, 왜곡해서 가르쳤다.

이스라엘 민족만 ‘이웃’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이웃인 이스라엘 민족은,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인 이방인들은, 미워해도 된다고 가르쳤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고, 그들과 교제나 식사를 금지했다.

이러한 일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방인에 대한 제사장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다른 민족들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말씀한 곳은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추가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이, 마치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가르쳤다.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의 잘못 된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해, 깊은 증오와, 원한의 벽을, 만들게 되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에 대한 사명을 잊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로마에 나라를 빼앗긴 채, 방황하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 왜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나? 이와 같이 잘못 가르친 데에는,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가나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모두 다 몰아내라고 명령했다(민33:51-52).

(삼상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결혼하거나, 언약을 맺는 것도 금했다.

하나님은 특히, 당시에 가나안에 살던 아모리 족속, 모압 족속, 그리고 미디안 족속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말라고 명했다. 시편에는 ‘저주의 시’가 있다. 이 ‘저주 시’에는, 원수에 대한 저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시58편, 109, 137편 참고).

유대인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형제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해야 하지만, 이방인은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했나? 하나님은 정말, 이스라엘 민족은 사랑하고, 이방인은 미워하라고 가르쳤을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명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
(1) ‘가나안에 사는 원주민을 멸하라!’는 하신 명령은, 가나안 주민의 큰 죄에 대한, 공의를 시행하는 사법적인 명령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와 악에 대해서, 공정하게 처벌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 그 원주민들의 죄악은 극에 달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 이방민족을 들어서 쳤다.

판사가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면, 사형집행인은 정해진 시간에, 그를 처형해야만 한다. 만일 사형집행인이, 그 죄수가 불쌍하다고, 죽이지 않고 놓아주면, 범인 도피 죄로 처벌받게 된다. 실제로 하나님이 죽이라고 한, 아멜렉 왕을 살려 준 사울 왕에게 진노하고, 그를 왕에서 쫓아냈다.

(2) 당시의 가나안 원주민들은, 음란과 우상숭배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결혼하면, 그들의 악한 풍습에 물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주민과 결혼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이방인과 혼인을 금한 것은 아니었다. 혼인을 금한 것은, 특별히 죄를 지은 몇몇 민족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윤리적으로 가증한 일을 저지른 민족이었다. 하나님은 몇몇 주민들과의 결혼을 금했고, 이러한 민족들 외에, 다른 민족들과는 혼인할 수 있었다.

성경을 보면, 모세도 구스 여인과 결혼한 기록이 나온다. 그때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크게 비난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모세를 비난하는 미리암을 징계하여, 나병에 걸리게 했다. 이처럼 모세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과 결혼은 허용되었다.

저주시도 개인 입장에서, 원수들을 저주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악인들을 저주했다. 그들은 개인적인 보복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저주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단의 상징인 악한 민족들을 저주했을 뿐이다. 따라서 저주시를, 이방인을 미워해도 된다는 근거로, 사용하면 옳지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인을 원수로 간주하고, 미워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이방인과 나그네를 차별하지 말고, 선대하라!’고 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것도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고, 모든 민족을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선택하였다(창12:2-3).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저주하기 위해, 선택된 민족이 아니라, 그들을 축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선택된, 제사장 민족이었다(출19:5-6).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선민의식에 빠져서, 이방인을 정죄하고 미워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함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릇된 선민의식을 갖게 만들었고, 이방인을 원수로 간주하고, 대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을 축복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버림받고 나라를 잃고, 방황하게 되고 말았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이유는, 불신자들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이유는, 우리를 통해 모든 민족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고,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만일 이러한 사명을 잊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수치스럽게 살게 된다. 성령 충만하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냄으로, 이웃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2.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UBS3, Aland-Greek New Testament, The United Bible Societies출판, 1975년).

그러나 (Textus Receptus, 흠정역, 공인본문) 사본은, 이렇게 번역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한, 레위기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바리새인은 사적인 보복을 허용했지만, 예수님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또 예수님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을 돌려 대며,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도 주며,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라!’고 말씀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의 명령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구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사법부에서 죄인을 처벌하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다. 이 가르침은, 개인이 사적인 보복을 금하기 위한 것이지, 사법부가 공의를 시행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친히,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징계하셨고, 범죄한 가인도 처벌했다. 또한 하나님은 범죄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했다. 특별히 하나님은 재판관들에게 ‘공의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으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사법부의 재판까지 금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바리새인들은, 형제인 이스라엘 백성은 사랑해야 되지만, 원수인 이방인은 미워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복음을 믿고 구원받을 대상으로 보셨다.

(눅10:25-)를 보면, 어느 날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27)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처럼, 이스라엘 백성만 이웃으로 간주해야 되는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까지, 이웃으로 간주해야 되는지, 질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30-35)를 말씀해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라고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그 율법사는 (37)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부정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는 대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너도 가서 이같이 하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사마리아인을 부정하게 취급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빠져서, 다른 민족들을 부정하게 생각했다.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던 사람들은, 레위인과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를 만나서, 죽게 된 형제를 보고, 도와주지 않고 지나쳤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부정하게 취급받던 사마리아인은, 위험을 무릎 쓰고 최선을 다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돌보아주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마리아인도 돕고 사랑해야 될, 이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를 저주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될 이웃으로 보았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의 가르침과 일치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법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들었다. ① ‘너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담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했다. 우리는 악담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들으면, 더 악담과 저주를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오히려, 축복해야 한다고 말씀했다.

②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했다. 예수님은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고 했다. 우리는 남에게 해를 당하면, 그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그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했다.

③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핍박받으면, 그를 저주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지 않고, 친히 사랑을 실천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나갔을 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예수님은 자신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했다(눅23:34).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기를 원한다.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신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악인에 대해, 똑같이 보복하고, 이웃을 사람을 속이고, 해를 입히고 있다.

오늘 기독교인 중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예수님이 의도하신, 천국 백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롬12:20上)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러나 우리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쉽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로는, 예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성령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러한 외식적인 종교를, 뛰어 넘을 수 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성령님은 능히 이러한 사랑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명예, 지식, 재물, 승진 등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보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는 기도를, 더 좋아한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는 신적인 성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원수에게 노하면, 악에게 지게 된다.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원수를 사랑하면서, 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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