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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4년도 3월 5째주 - 믿음은 보복이 아니라 배려(마5:40-42)
  작성자 : bibleman 작성일 : 2014-03-30
  첨부파일:   믿음은 남을 배려하는 정신.hwp(23K)
믿음은 보복이 아니라 배려(마5:40-42)

우리는 나에게 악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보복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당한만큼 갚아주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기에, 어떻게 상대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동해보복법을 말씀했다.

동해보복법은 과도한 사적보복을 금하고, 법적절차에 따라서, 공의를 시행하기 위해, 재판장에게 주어진 법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법을, 사적보복을 권하는 법으로, 해석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 갚는 일을 금하고,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다.

그리고 그 예로, 예수님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라고 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원수의 영혼을 구원하거나, 하나님이 직접 악인을 심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악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는, 또 다른 실례들을 말씀한 내용이 본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악한 자들을, 대적하려고 하지만, 결코 악으로는, 악을 이길 수가 없다. 함께 점점 더, 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선대한다. 예수님은 8복에서 말씀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다.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을,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악한 자를 대적하려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까지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준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선으로 악을 이기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다시 한 번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기를 바란다.

1. 속옷과 겉옷(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히브리인들이 입고 다닌 겉옷에는, 613개의 율법을 상징하는 옷단 술(찌찌트)이 달려 있었다.

이 옷단 술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 옷단 술을 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표시가 되며, 하나님과 그 사람 자신과의 관계가 그 옷단 술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히브리인들은 아침과 저녁에, 쉐마를 낭송할 때는 반드시, 이 옷단 술이 달린, 겉옷을 두르고 낭송하게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이란 속옷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하면, 아무리 채권자라고 할지라도,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때에는, 저녁이 될 때에 돌려주라고 한다. 그만큼 겉옷은, 몸을 보호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하기에, 법적으로도 빼앗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 속옷을 가지려고 고발한다면, 그냥 빼앗길 사람이, 어디 있는가? 법적으로 대응해서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당한가? 그런데 예수님은,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는데, 겉옷까지 주라고 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이 매우 귀할 때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밤중에 잠을 잘 때, 덮고 자는 담요와 이불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겉옷을 전당잡더라도, 해지기 전에는 반드시, 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다. 그만큼 겉옷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재판해서, 값이 나가지 않는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말고, 더 값이 나가는 겉옷까지, 주어버리라는 것이다. 빼앗으려는 삶을 살지 말고, 주면서, 베풀면서 살라는 말씀이다. 관대한 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계셨다. 한참 걷다 보니, 할머니가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 걷지를 못했다. 이를 본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업고 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등에, 업혀가는 것이 좋긴 하지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영감, 내가 좀 무겁지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 머리, 얼굴은 철판, 심장은 강심장이라 정말 무거워.” 이 말을 듣고, 할머니 마음이 상했다. 얼마쯤 올라가다가, 이번에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업어 주겠다고 했다. 업고 가는데 할아버지도 미안했던지, “할멈, 생각보다 가볍지?”라고 했다.

할머니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럼요, 가볍지요. 머리는 든 것이 없고, 허파는 바람만 잔뜩 들었고, 속은 텅 비어서 엄청 가벼워요.” 우리는 당한 만큼, 되돌려준다. 우리는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억울하게 만든 사람에 대해서, 되갚아 주려고 한다.

사람들은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재판을 하게 된다. 악인들은 재판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하며, 거짓말도 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런 경우에, 그들과 같이 다투면, 법정은 치열한 싸움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무보다 권리를, 더 요구하는 경향이 많다. 노조는 적게 일하고, 더 좋은 작업환경과 임금을 얻으려고 한다.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집단적인 투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업주는, 적게 주면서 더 많은 일을 시키려고 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의무보다 권리를 더 주장하게 되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회도 의무보다 권리를 더 주장하는 일이 많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회는 투쟁과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 겉옷도 가지게 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원수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라고 했다. 부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을, 대적하지 말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양보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개인에게 준 것이지 국가나 사법기관과 같은, 공적 기간에 준 것은 아니다.

판사는 부당하게, 남의 것을 탈취하려는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한 처벌을 할 책임이, 당연히 있다. 예수님은 국가나 사법부가, 공의를 행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성도에게 개인적으로 원수 갚지 말고, 그들이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양보하라는 말씀이다.

2. 오 리를 가게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당시의 정부는, 나라의 일로, 짐을 운반할 때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을 선발해서, 그 짐을 옮기게 할 권리가 있었다. 이 법은 정복한 나라가, 정복을 당한 나라의 국민들에게, 요구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다. 유대백성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었다.

로마 관리들은 필요한 경우에, 1마일 내에서 사람들을 선발해서, 국가의 짐을 운반하도록 명할 수 있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진 일을 읽을 수 있다. 이때 로마 병정은,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을 불러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그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다.

이러한 일도, 강제부역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강제 노역법에 대해서, 로마에 분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로마의 관리가 강제로 짐을 지우고, 오 리를 가게 할 때에, 거부하지 말고, 십 리까지 짐을 지고 가라고 말씀했다.

점령국 관리에 의해서, 강제로 부역 당하게 되면, 적개심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해주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공동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개인적인 행동이다. 천국 백성들이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역사 속에 개입시킬 수 있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행동하던 로마는, AD 313년에 기독교국가가, 되고 말았다. 죄악이 승리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역사는 뒤집어지고 말았다. 로마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한 것도, 독립군이 싸워 이긴 것이 아니다.

또한 국가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대개 백성들은, 국가에 내는 세금을 적게 내려고 노력한다. 기독교인은 국가가 요구하는 세금은 물론이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때,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직장인은 직장에서, 가능한 적게 일하고, 더 많이 받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회사에서 받은 월급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회사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해줌으로, 회사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직장을, 하나님이 주신 일자리로 알고, 회사의 기대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 이러한 원리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부의 경우에, 서로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은 많은데, 자신이 해야 될 일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배우자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힘을 준다.

이처럼 상대방이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할 때, 비로소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 가정 상담자의 말에 의하면,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 사이에, 제일 어려운 문제가 상존하는 분노라고 한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남편과 아내의 마음에, 계속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노를 일컬어, ‘얼어붙은 분노’라고 한다. 얼어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 날카로워져서, 서로 갈등하고, 상처를 주고, 독한 말로 상대방의 감정을, 뒤집어엎기도 한다.

부부 사이가 굉장히, 살벌해진다. 그렇기에 서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록 그 요구가 무례하고 불합리하다고 할지라도, 돕겠다는 심정으로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3.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자기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반대로, 더 많이 갖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서, 돈을 꾸어달라는 대로 다 꾸어주면, 누구나 망하게 된다.

기독교인은 많은 것을 움켜쥐고, 탐욕스럽게 살지 말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유익만 아니라, 이웃의 유익도 함께 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웃이 도움이 필요할 때,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웃이 어려움을 당할 때, 기꺼이 자기 것을 그들을 위해,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려운 사람을 보고도, 인색하게 굴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이 자녀는, 아버지 하나님과 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의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소유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러운 사람이 아니라, 위대해지기를 원하기에, 이렇게 말씀했다. 복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공의 복이요, 하나는 위대해 지는 복이다. 성공을 남보다 잘되는 것이라 한다.

많은 사람이, 성공을 생각하며, 울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예수님을 뒤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을 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복을 주셨다. 섬김과 베푸는 것은, 위대해지는 길이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이 비유에 나오는 강도는 ‘정당하게 일하지 않고 부당하게 남의 것을 탈취하는’ 불법자들이다. 그들은 정당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하지 않고 폭력과 불법을 통해서, 남을 해치고 위협한다.

사회에 이러한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혼란하고 무질서해질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는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또 남이 어려울 때에, 도와주지도 않다.

그들은 자신이 번 것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쓰는 것으로 만족한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내 것도 필요하면, 네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타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웃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기꺼이 그들을 도와준다. 그는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이웃을 도와준다고 생각하기에, 자랑하지도 않는다.

현대는 강도,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득실거리는 시대다. 현대에는 불법으로 남의 것을 탈취하고, 또 자기만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을 오해하면 안 된다. 주었는데 더 악해진다면, 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은, 사기꾼이나 직업적인 거지, 또는 술주정뱅이나, 마약 중독자를, 무조건 도와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기꾼에게 속아서, 귀중한 재산을 날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술주정뱅이에게, 더 많은 술을 마시도록, 돈을 주어서도 안 된다.

여기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웃이 도움이 필요한 때, 그들을 외면하지 말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이웃이 도움을 요청할 때,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그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해, (요일3:17-18)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천국 백성들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의 요구에 귀를 막으면 안 된다. 어려운 이웃을 관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남을 도울 때에, 그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성실하게, 어려움을 만난 이웃을 도와주면,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성경은 있는 자에게, 주라고 하지 않고, 없는 자에게, 주라고 한다. 항상 자비와 긍휼을 베풀면서 살라는 말씀이다. 작은 배려가 가장 따뜻한 손길일 수가 있고, 가장 많은 돈일 수도 있다. 배려는 그 사람의 편이 되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과 함께 천천히 걸어주고, 작은 시간을 내 줌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을 때 가능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기 위해 오셨기에, 이 일이 가능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이 말은 쉽게 성취된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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