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 3월 4째주 - 보복에 대한 가르침(마5:3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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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ibleman |
작성일 : 2014-03-23 |
첨부파일: 보복에 대한 가르침.hwp(25K) |
보복에 대한 가르침(마5:38-39)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에 (출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는 말이 나온다. (레24: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 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신19: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당한만큼 똑같이 ‘형벌을 부과하라.’를 ‘동해보상법, 동해보복법’이라고 부른다. 라틴어로는 ‘lex talionis’(렉스 탈리오니스), 곧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당하면, 보복(報復)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報는 ‘갚다, 알리다’이고, 復은 ‘뒤집다, 돌려보낸다.’는 말이다. 따라서 보복은, 내가 당한다면, 뒤집어 갚는다는 말이다. 복복하며 사는 세상은, 참 무섭고 잔인한 사회이다.
(창4:23-24)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누구든지 자기를 해하면, 자기는 그에게 칠십 칠 배로, 되갚아주겠다는 뜻이다. 인간의 복수심이 그렇다. 예를 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한 마디 욕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만 해주면 직성이 풀리지 않고, 두 마디, 세 마디 해야지 풀린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심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개인적으로는 갚도록 하지 않고, 반드시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하도록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의의 이름으로 보복이 행해지고, 자기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며, 민주화의 이름으로,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사악함을 보아야 한다. 잘못된 욕심과 동기를, 멋진 이론으로 합리화하면, 안 된다.
1. 동해보상법(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를 입은 만큼 갚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1) 지나친 보복을 막기 위해서(창34장)
어느 날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땅의 딸들을 보러나갔가,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한다. 후에 추장 세겜은, 야곱에게 디나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 누이를 성추행한 일로, 크게 분노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겜 족속을 속여서, 할례를 받게 했고, 모든 남자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죽였다. 이 일로 야곱의 가족은, 크게 몰살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야곱은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지나친 보복을 금하고, 법으로 공정한 형벌을 부과하도록 지시했다. 하나님은 이런 경우에, 상처를 입은 자가, 보복할 경우에, 재판을 따라, 공평의 원리를 따르게 했다. 눈을 다치게 했으면, 그 눈만 다치게 하되, 과도한 그 이상의 보복은, 금하도록 했다.
(2) 재판의 공의의 기준(출21:22-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여기서 하나님이 개인이 아니라, 재판장에게 주신 법이다. 율법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은 경우에, 개인이 직접 보복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율법은 이런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재판장에게 나아가도록 명했다. 재판장은 그들의 말을 다 듣고, 법에 따라, 공정하게 형벌을 부과하게 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재판장에게, 가해자에게 그가 피해를 입힌 만큼, 사적 보복을 금하고, 공정한 형벌을 부과하는 역할을 했다.
동시에 힘없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힘없는 사람은 해를 당해도, 보복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따라서 억울하게 해를 입어도 보복하지 못하고, 반대로 힘이 많은 사람은, 작은 해를 입고도, 큰 보복을 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힘없는 사람이나, 힘 있는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공정한 형벌을 부과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피고인이 가난해서, 변호인을 고용할 수 없는 경우에는 국선변호인을 두어, 변호할 수 있도록, 약자를 보호하고 있다.
(3) 죄의 예방
능지처참은, 대역죄나 패륜을 저지른 죄인에게, 가해진 극형이다.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 느끼면서 죽어가도록 하는, 잔혹한 사형방법이다.
대개 팔다리와 어깨, 가슴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였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포를 뜨듯 살점을 베어, 한꺼번에 많이 베어내서 출혈과다로 죽지 않도록, 조금씩 베어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형벌이다.
이렇게 가혹한 처벌을 한 이유는, 사람들이 이런 잔인함을 보고, 동일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점에서 동형보복법도, 죄를 예방하는 기능을 갖는다.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은 이 법을, 글자 그대로 시행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에게, 똑같이 보복했다.
이웃이 손을 다치게 한 경우에, 실제로 가해자의 손을 잘랐다. 이러한 가혹한 형벌은 어느 정도, 죄를 예방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율법은 이런 방법을 통해, 이웃이 나와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준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내 눈도 저렇게 상하게 되겠구나.” 생각이 들게 된다.
따라서 이런 법을 통해, 다른 사람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는 법을 배우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의 생명을 자기 몸처럼, 귀하게 대하기를 원했다. 남에게 해를 입히면, 자신도 같은 해를 당하게 됨을 통해, 사랑을 배운다.
하나님은 부자라고, 형벌을 가볍게 하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형벌을 많이 부과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했다. 아브라함 당시에, 우리가 잘 아는, 함무라비 법전이 있었다. 함무라비 법은, 사람을 평등하게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모세의 법이, 함무라비 법전보다, 훨씬 더 앞선 내용이다.
2. 동해보상법에 대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긍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너희가 잘못 들었다면서,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무엇이었나? 바리새인들은 동형보상법을 어떻게 가르쳤나?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① 보상법을 잘못 적용했다. 보상법은 개인에게 준, 법이 아니라, 재판장의 판결원리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래서 모든 개인에게 적용해서, 피해를 입으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보복해도 된다고 가르쳐서, 사적보복을 막기 위해 주신 법을, 사적보복을 정당화하는 법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원들이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사실만으로도 아주 원통하게 생각했다.
로마는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려고,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에돔인이었다. 이방의 에돔인 헤롯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니, 유대인들이 얼마나 분개했겠는가?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로마인들에게 당연히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그들이 열심당이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고,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하기에, 로마 군인들을 대해,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다.
로마 군인들이,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즉시 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말았다.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조장되었다. 사회는 점차적으로 질서를 잃어버리고, 잔인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② 보상법 정신도 무시했다. 이 법을, 사랑의 정신으로 보지 않고, 글자 그대로, 문자적으로 보았다. 보상법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준 법이, 보상법이었다. 성경 어느 곳을 찾아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다.
원수를 갚으라고 한 말씀도 없다. 오히려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온다. (신32:35上)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에게 선대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책임이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잠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했다. 악한 자를 대적하여 갚으라는 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바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완전히 망각해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대신 미움을 심어주었다. 용서 대신, 복수를 심어주었으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악해졌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세대를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여!”(마12:39, 16:4)라고 탄식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낮은 수준의 의를 가지고,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되겠다고 할 수 있느냐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했다.
3. 보복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나는 너희에게 이른다면서, 예수님은 이 법을, 어떻게 가르치셨나?
(1) 예수님은 먼저, 해를 입은 경우에, 개인적인 보복을 금했다.
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피해를 입은 개인이, 피해를 입은 만큼, 가해자에게 꼭 보복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개인이 보복하는 일을 금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보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톨스토이는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가해자에게 보복을 가하는 군대나 경찰, 또는 치안판사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군대나 경찰, 판사를 통해서, 악인을 처벌하는 것도, 비기독교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또한 어떤 형태든지, 악인을 대적하는 것은, 기독교적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영토를 침범한 나라를, 군대가 공격하는 일이나, 판사가 죄인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경찰이나, 치안판사는 필요하지만, 군대를 통한 전쟁이나, 범죄자에 대한 극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악인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나?
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주신 명령이다. 이 명령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과 함께 하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사는, 천국 백성에게 주신 명령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불신자에게까지 적용함은, 비현실적이다. 옳지 않다.
②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적 보복을 금한 것이지, 법적 처벌을 금한 것이 아니다.
이 명령은 동형보상법을, 개인보복을 정당화 하는 법으로, 잘못 해석하는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율법 해석을, 바로 잡기 위해 주어졌다.
이 법은 개인적인 보복을 금하고, 정식적인 법적절차를 따라, 형벌을 부과하게 하기 위한 공적인 법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근거로, 군대나 경찰, 그리고 재판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옳지 않다. 성경은 오히려 재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재판장에게 법을 통해, 공의를 시행하라고 명한다.
(2)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라(39下).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예수님은 내게 해를 입힌 자에게, 개인적으로 보복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먼저 이웃이, 나의 뺨을 때린 경우를, 예로 들어 주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뺨을 맞으면, 분노해서 본능적으로, 되받아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복수심을 가라앉히고,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돌려대는, 여유를 가지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뺨을 맞게 되면, 인격적인 모욕감과 분노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경우에, 뺨을 때린 자에게 보복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라고 말씀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때린 사람에게, 이렇게 해야 하는가? 원수를 갚는 일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수치와 모욕을 당했을 때,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개인적으로 보복하지 말라 말씀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악인을 회개하게 만들거나, 공정하게 심판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모독한 사람에게, 보복하기 위해, 우리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
①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기고, 대적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원수의 마음을, 변하게 하실 때가 있다. 옛날 영국에 ‘빌리 브레이’라는 권투선수가 있었다. 그가 선수로 있을 때, 영국에는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전에, 그에게 패배했던 사람이,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원수를 갚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빌리 브레이를 찾아가서, 갑자기 주먹으로 그를 쳤다. 그리고 빌리 브레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때 빌리 브레이는, 그를 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너를 용서해 주기를 원한다!” 그 사람은 빌리 브레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빌리 브레이가 자기를 치면, 기독교인이 남을 친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창피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빌리 브레이가, 자기에게 맞고도, 아무 공격도 하지 않자, 당황했다. 그 일로 인해서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의 사랑과 용서하는 모습을 통해, 불신자들을 구원하실 때가 있다.
② 하나님께 원수 갚는 일을 맡기고, 대적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를 심판할 때도 있다. 바벨론 왕 다리오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총리를 3사람 임명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총명함을 보고, 그를 3사람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때 바벨론 관리들은,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자신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되자, 시기했다. 그러므로 다니엘을 모함하려고, 기회를 엿보았지만, 고소할 흠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 그가 믿는 하나님을 이용한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도, 절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법을 알고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말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대적들에게, 항변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순종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주셔서, 사자들이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게 지켜주었다. 다음 날 새벽에 다리오 왕은, 걱정이 되어 일찍 일어나, 다니엘이 있는 사자굴로 갔다. 왕이 다니엘을 불렀을 때에, 다니엘은 살아서 왕에게 문안인사를 했다.
왕은 아직 다니엘이 죽지 않음을 알고, 즉시 신하들에게 다니엘을 끌어올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왕은 다니엘을 모함했던 관리들을, 사자굴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직접 나서서 원수들을 심판하실 때도 있다.
그러므로 관대한 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다. (40-42)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받아들이기에, 힘든 말씀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순종은, 비굴한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임을 말한다. 말씀을 내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이, 교만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능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을,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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