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 3월 3째주 - 맹세에 대한 가르침(마5:3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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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ibleman |
작성일 : 2014-03-16 |
첨부파일: 맹세에 대한 가르침.hwp(24K) |
맹세에 대한 가르침(마5:33-3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할 때, 자기를 자랑하고,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율법의 정신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례들 중에서, 잘못된 예를 6가지로 제시하고, 바리새인의 그릇된 율법해석을, 교정해 주신다. 우리는 이미 3가지 사례(살인, 간음, 이혼)를, 이미 생각해 보았다. 이제 4번째 사례, 즉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거짓말 해본 경험이 있지요? 우리는 크든 작든, 거짓말을 하고 살아왔다. 전문적으로 혹은 본의 아니게, 또 기술적으로 들키지 않게 거짓말을 해온 것이다. 맹세와 거짓말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사람은 어떤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곧잘 맹세를 하기에,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때론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맹세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말을 잘 믿어 줄 것 같지 않으니까, 절대 권위를 빌려서 맹세를 하게 된다. 거짓이 난무한다면, 불행한 사회다.
1. 맹세에 대한 가르침(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지만, 구약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된 곳이 없다.
이는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율법학자들이 회당에서 가르친 내용을 인용했다. 율법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맹세의 내용을 발췌하고, 그것을 연결해서, 이런 교훈을 만들어내었다. 이 가르침과 관계된 구약성경은, 다음과 같다.
① (출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3계명인데,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아주 귀하게 여기신다. 따라서 맹세하고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을 망령되게 만드는 일이다.
(민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서약을 깨뜨리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하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게 살라는 말씀이다.
② (레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해야 했다. 당시 맹세할 때,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맹세는 히브리어로 거룩한 숫자 ‘7’과 같은 단어 쉐바(ע)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맹세에 대한 규례를 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말과 행동을, 금지하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후에,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게 된다. 따라서 맹세하고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게 된다.
③ (신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전혀 거짓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라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언제나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이따금씩 맹세를 했다.
(창22:16上)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맹세했다. 하나님보다 더 위의 존재가 없기에,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했다. 하나님이 신실한데, 왜 그냥 말씀하지 않고, 맹세를 했는가? 신앙을 더욱 북돋워,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돈을 빌린 후에, 언제까지 돈을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로 인해, 그가 정한기간 내에, 그 돈을 갚지 못했다. 이 경우에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별 수 없네!” 하면서, 하나님을 욕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신의 신실하지 못한 행위로,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욕을 돌린 셈이 된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일을 금하라고 명했다.
하나님이 이런 규례를 주심은, 죄로 인해 사람들의 진실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이러한 일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부패한 마음에서, 부패한 말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말을 한 시간만, 녹음해서 들어보면, 우리가 얼마나, 과장과 거짓말을 좋아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마음과 언어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또 남을 속이지 못하도록 금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일에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되, 반드시 지킬 것을 원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소한 문제까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곤 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다가, 상대방을 설득하기 어려우면, 설득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의 맹세는,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기를 원했다. 만일 맹세를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친히 벌하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맹세는 해로울 지라도,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다.
2. 맹세에 대한 바리새인의 가르침(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했다.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살펴볼 때,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3가지 원칙을,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① 그들은 우선, 맹세의 원칙을 무시했다.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남발하면 안 된다.
② 맹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다. 맹세는 지극히 엄숙한 것이다. ③ 맹세하고 나면,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고,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증인되신 하나님이, 친히 벌하기 때문이다.
(1) 헛맹세를 위증죄로 제한함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헛맹세를 정신보다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헛맹세는 재판에서 하는, 위증으로 해석했다. 재판에서 하는 거짓 증언을, 중범죄로 간주했고, 거짓 증언을 하는 자를 문책했다.
그러나 재판정 밖에서 행해지는 거짓맹세나, 신실하지 못한 말들은, 제재하지 않았다. 재판정에서 위증만 하지 않으면, 거짓맹세에 대한 율법을, 지킨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거나, 신실하지 못한 말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성도들이 교회에서만 거룩하고, 교회 밖에서는 거룩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해석이, 분명하다.
(2) 반드시 지킬 맹세와, 지키지 않아도 될 맹세를, 인위적으로 구분함.
(마23장)에, 잘 드러난다. 성전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에 있는 금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다.
(마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또 성전 제단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예물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해석을 하는 율법학자들을 책망했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물론 성전의 금보다,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 더 중요하다.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도다.” 그래서 예수님은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예물보다,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은, 성전보다 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예물을,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금과 예물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하고, 성전과 제단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
(20-22)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예수님은 무엇을 가리켜 맹세하든지, 다 지켜야 하며, 지키지 못할 맹세를, 처음부터 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잘못된 해석을 지적한 후에, 하나님이 헛맹세에 대한 율법을 준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헛된 맹세를 금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그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많이 비슷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죄에 대해서만 금하고, 일상생활에서 하는, 신실하지 못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금하지 않았다.
또 하나님의 이름에 해를 끼치는, 악한 말과 행동을 자주 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현대교인들은,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기독교인은,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헛된 말과 거짓맹세를 버리고, 진실한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우리 힘만으로는 하기 어렵다. 우리 힘으로 이런 삶을 살려고 하면, 실패하고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돕기 위해 보내주신, 성령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3. 거짓 맹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34-3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바리새인들은 하늘, 땅, 예루살렘, 그리고 머리를 가리켜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가리켜서도, 맹세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맹세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퀘이커 교도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어떠한 형태의 맹세도, 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법정에서도, 맹세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맹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에게,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지시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종에게 지시한 대로, 모두 행할 것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예수님을 심문하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마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때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책망하지 않았다. (64上)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사도 바울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맹세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후1: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이처럼 성경은, 맹세를 제한하고 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허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모든 맹세를 금하고, 심지어 재판에서 하는 선서마저 거부하는, 퀘이커교도들의 가르침은, 바람하지 않다. 그러면 맹세를 금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도는 무엇인가?
(1) 맹세나 저주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함을 금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영어 표현을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욕이나 저주에 자주 등장함을 볼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니, 이렇게 사용하지 말자.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을, 이렇게 반문하는 분들이 있다. ‘요즘은 염색약이 발달해서, 흰 머리카락은 얼마든지, 검게 물들일 수 있고, 검은 머리카락도, 빨갛게 물들일 수 있고, 노랗게 물들일 수도 있어요.’ 물론 그렇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흰 터럭은 노인을 상징하고, 검은 터럭은 젊은이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수명은, 자기가 임의로 단축하고, 늘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하든지, 다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 있다.
(2)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켜서, 맹세하는 일을 금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꼭 지키지 않아도 될, 맹세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성전의 금으로 한 맹세는 지켜야 되지만, 성전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또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한 맹세는, 지켜야 하지만, 제단을 가리켜서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자기 입으로 한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해서, 자기 입으로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님은 성전과 제단, 예루살렘과 하늘,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가리켜서도,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이는 이러한 모든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이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3)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맹세하는 일을 금했다. 바리새인은 법원에서, 위증만 하지 않으면, 맹세에 대한 모든 율법을 지킨 것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법원에서의 위증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말에서, 거짓으로 맹세 하는 일을 금했다.
우리는 이야기하거나, 토론할 때에 맹세할 때가 있다. 또 필요에 따라, 과장된 표현을 사용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다.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대화가 과장되거나, 축소되지 않고, 단순하고 진실하기를 원했다. 또한 맹세는 꼭 필요한 때에만 하되, 일상적인 대화에서, 맹세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맹세는 사실을 과장, 또는 축소하기 위해, 사용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맹세를 금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할 필요가 있다. ① 거짓말을 금하고,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매사에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해야’한다.
그러나 삶 속에서, 진실하게 말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 자주 말을 과장하거나 축소한다. 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기도 하고, 때로 여러 가지 이유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특히 싸움이 났을 때,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골라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릴 때가 많다.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실을 왜곡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의 언어는, 언제든지 정직하고 단순해야 한다.
②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선한 말을 해야 한다. 맹세를 금하라는 말에는, 적극적으로 선하고 유익한 말을 하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한 말을 하려고 힘쓸 때에, 거짓말로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혀를 적극적으로, 선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힘을 쓰자.
③ 말에는 책임이 따르니, 책임의 중요성을 배우자. 남을 비판하고 도망가지 말라. 남을 선동해 놓고 도망가면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이 아니다. 올바른 말이라면, 그것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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