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내용
•홈  >  말씀과찬양  >  설교내용
  제  목 : 2014년도 3월 1째주 - 범죄와의 전쟁(마5:29-30)
  작성자 : bibleman 작성일 : 2014-03-02
  첨부파일:   범죄와의 전쟁.hwp(25K)
범죄와의 전쟁(마5:29-3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7계명의 간음을, 육체적인 불법 성행위로 제한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계명을 가정을 창조하신, 창조질서의 원리에서 해석했다. 육체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순결까지도, 요구한다고 말씀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계명을 범하면, 땅에서 재판받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명을 범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재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되면서, 온갖 성적인 부패로 신음하고 있다.

예수님은 거룩함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죄의 세력이 있음을 아셨기에, 범죄와의 전쟁을 말씀했다. 강력한 죄의 세력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 죄짓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죄를 두렵게 생각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1. 실족하게 만드는 죄(29上).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30上)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실족하다’는 (스칸달리조)인데, ‘죄를 범하다, 넘어지게 만든다, 믿음을 거부하게 만들다.’는 말이다.

스캔들(scandal)이 여기서 나왔는데,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나 소문’이 되었다. 그러나 죄의 세력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만들어, 결국에는 구원을 잃을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철저히 죄에 대해, 대비하지 않으면, 죄의 세력에 무너지게 된다.

그런데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고, 오른손이 실족하게 한다.’고 했다. 죄를 짓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신체기관을, 오른쪽으로 표현했다. 고대 사람들은 같은 신체라도, 왼쪽보다 오른쪽 기관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죄를 범하게 만들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앞쪽은, 해가 떠오르는 동쪽이고, 뒤쪽은 서쪽이 된다. 오른쪽은 남쪽이고, 왼쪽은 북쪽이다. 그러므로 우편은, 밝기에 좋은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반대로 왼쪽은 가장 어둡다. 따라서 왼쪽은, 어두움을 이야기하며, 모든 좋지 않은 것들이 온다는, 개념이 되었다.

그래서 좌편을 금기시하는 풍습은, 중동 문화 가운데,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예를 들어, 왼손으로 악수를 청한다든지, 왼손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행위는, 상대방을 모욕하는 행위다. 따라서 오른 눈과 오른손을 등장시켜, 실족하게 한다는 말은, 지금 내게 옳고,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우리를 음란에 빠지게 하는 죄의 세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욕은 너무 강해서, 항상 옳게 여겨지게 만들고, 우리의 의지를 꺾어, 우리를 음란과 부정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과 음란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오늘날 신문과 방송을 보면, 많은 음란한 행위에 대한 소식을, 매일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성폭행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고, 간음죄를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며, 동성애나 온갖 비합리적인 성적 행위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행되고 있다.

친한 친구나, 아는 사람들을 통해, 죄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밀려들어온다. 신천지와 같은 세력을 보라. 얼마나 교묘하게 들어오는가! 학생들과 청년들이 왜 죄에 빠지는가? 또래 집단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만든다.

이러한 일은 사람들이, 너무도 죄의 세력을 가볍게 여기고,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러한 죄의 세력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 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순결을 지켜야 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죄는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졌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외면했다. (마27:46下)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무시하면 안 된다.

2. 죄의 세력을 제거하라(29中).
“…빼어 내버리라…” (30中) “…찍어 내버리라…”했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을 극복하는 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빼어(엑사이레오)는, 엑크(밖으로) 하이레오마이(취하다, 선택하다.) = 뽑아내다, 빼내다.’는 말과 ‘내버리다’(발로)는, ‘던져버리다’는 말이다. 찍어(엑콮토) 엑크 + 콥토(때리다, 치다) = 잘라 버리다, 부수어버리다. 내버리라(발로)이다. 뽑아내고, 찍어서 던져버리라는 말이다.

지금 ‘내게 옳고,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하여, 걸림이 된다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죄와 전쟁을 선포하고, 전투하듯이 싸워야 한다고 말씀했다.

만일 오른 눈이, 죄를 범하게 만들면, 그 눈을 빼버리라고 했다. 또 오른손이 죄를 범하게 만들면, 그 손을 찍어 버리라고 했다. 예수님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그 길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길이다.

어리석은 눈이 범죄 하게 만들면, 눈을 빼버리고, 손이 범죄 하게 하면, 손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빼고, 손을 잘라도, 죄를 끊을 수 없다. 예수님의 명령은, 정말 수족을 자르라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단호하게, 죄에 대해 전쟁을 하라는 의미이다.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생사가 걸린 싸움이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살아 죄를 이기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님보다, 육신을 더 의지하다가, 죄의 세력에게 굴복하게 되면, 사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목숨을 걸고 싸워라. 이렇게 할 때, 강력한 죄의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다. 예수님은 강력한 죄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죄의 세력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스스로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에 들어가서,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기름을 안고, 불 속에 들어가면서, 화상을 입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음란한 영상이나 글, 또는 음란한 생각을 일으키고, 우리를 부적절한 성적관계로 인도하는 모든 환경을 피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육신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님의 요구를 버리고, 정욕에 이끌려 갈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육신은, 음란한 환경을 좋아하고, 악한 영들은 강력하고 교묘하게, 부정한 길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빼고, 손을 잘라 버리는, 비장하고 과감한 마음으로, 음란한 환경을 피해야만 한다. 가장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죄를 범하게 만든다면, 그 장소를 피해야 한다.

또한 음란한 말이나, 표현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음담패설을 하고, 그것을 은근히 즐긴다. 때로 이러한 말들을 유머로 생각하고, 할 때도 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살전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명하고 있다.

(2)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
죄는 사악하고 강력해서, 언제 우리를 넘어뜨릴지 알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연약해서, 죄의 세력을 이길 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죄와 싸울 때, 기도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는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잤다. 그 결과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고 말았다.

(시119:9-11)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정결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성령 충만함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것으로, 마음과 영혼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것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3. 죄는 지옥에 던져지게 만든다(29下).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下)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다. 신약성경의 지옥은, 살육의 골짜기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게벤 힌놈’이다. 골짜기를 뜻하는 게(א󰖾󰕀)와, 벤(ן󰔲은 아들) - 힌놈(ם󰘊󰕙, 애곡)이 합성되어 ‘애곡의 골짜기’라는 말이다. 불길이 타오르는 지옥을, 성경이 지칭하는 용어가 된다.

지옥으로 소개된 게엔나는, 예루살렘동쪽에 있는 계곡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몰록’에게 자기 자식을 인신공양한 장소이다. 후에 처형장으로 변했고, 짐승의 사체와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로, 오물과 구더기가 들끓고, 항상 악취가 풍기는 고약한 곳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게엔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적한 악인들과, 불신자들이 심판 날에 최후로 형벌 받는 장소의 상징이자, 꺼지지 않는 불로, 몸과 영혼이 영원한 고통을 받는 기독교적인 지옥의 이름이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은, 지옥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자녀를, 말을 안 듣는다고, 지옥에 보낼 수 있는가? 말한다. 그러나 (마25:41下)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했다. 지옥은 사람을 보내려는 곳이 아니라, 마귀를 보내려는 곳이 지옥이다(마25:41).

그런데 마귀에게 속아서, 사람이 지옥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가지 말라는 말이다. 성경을 통해, 지옥에 관한 모든 정보를, 모두 다 얻을 수는 없지만,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옥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장소이다.

(1) 지옥은 불타는 고통이 있는 곳이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묘사 중에, 가장 쉽게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불타는 고통이 있다. (계19:20) “유황불 붙는 못”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지옥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부자가,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눅16:24)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말했다.

부자는 너무 목이 말랐지만, 그는 물 한 방울도 구할 수 없었다. 그는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13:42)에는 ‘풀무 불’이라고 했다. 풀무 불은 완전히 갇혀서, 바람만 통하기에, 실제보다 몇 배는 더 뜨거워진다고 한다. 성경에서 지옥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있다.

지옥은 불타는 곳인데 (벧후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 온통 불천지인데, 어떻게 어두운 구덩이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지옥에도, 등급이 있음을 말한다. 불의 색깔은, 온도에 따라서 변한다.

불의 온도가, 가장 낮을 때는 빨강 색이다. 그 다음 단계가 주황, 노랑, 파랑, 흰색 순이고, 온도가 가장 높을 때, 검정색으로 변한다. 타락한 천사들이, 지옥의 어두운 구덩이에 들어간다는 말은, 가장 뜨겁고, 고통스러운 장소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태양의 표면 온도는, 약6,000도다. 중심부의 온도는 1,500만 도이다.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면, 흑점이 있다. 과거에는 태양의 흑점이, 태양에서 온도가 가장 낮은 곳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태양의 흑점이, 다른 부분보다, 훨씬 온도가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 지옥은 영원히, 고통 받는 곳이다.
성경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말한다.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말한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셋째 사망은 없다.

둘째 사망을 당하여, 지옥에 떨어지면, 더 이상 죽음도 고통도 끝없이 계속된다. (막9:48)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다. 인터넷에 실린 글을 보니, 구더기가 생존할 여건이라면, 높아봐야 40도 전후니 “지옥의 불은 견딜만하다.”는, 황당한 이론을 제시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라는 표현은, 지옥의 불온도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로 낮다는 말이 아니라, 고통이 영원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도 꺼지지 않는다.’했다. 구더기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 죽을 수 없는 곳이 지옥이다.

가스불에 데면, 몇 초를 견디지 못하지만, 지옥불은 가스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고통스런 곳이며 그 고통은 영원하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사고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화상이라고 말한다. 지옥은 타지도 않는, 끔찍한 화상으로, 영원토록 고통당하는 곳이다.

(3) 지옥은 아무 소망이 없는 곳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면, 천국과 지옥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왕래가 불가능하다. 한번 결정되면, 고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우나 안이 뜨거우면, 나오면 되지만, 지옥은 그럴 수 없다.

지옥판결은 피해야 한다. 일단 결정되면, 영원토록 고통당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소망이 전혀 없다. 지옥의 불 못은, 잠시의 휴식도, 취할 수 없는 곳이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대신, 불과 유황으로 영원히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단 한 사람도, 탈출할 수 없는 곳이다. 지옥에는 소망이 없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라고 했는가? 죄가 우리를, 파멸과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따르는 이유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를 따르면, 반드시 사망을 거두고, 죄가 결국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고 경고했다.

죄의 세력은 은밀하고, 교묘하게, 우리를 망상에 빠지게 하고, 우리의 자제력을 무너지게 만든다. 죄는 마침내 우리를, 지옥 불까지 끌고 들어간다. 다윗은 한 순간의 정욕을 다스리지 못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의 남편마저 죽이고 말았다. 그 결과 그의 영혼과 가족을, 파멸로 이끌고 말았다.

죄는 일평생 다윗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그의 집에서는 살인과, 부정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물론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지만, 그가 죄를 지은 후부터, 그의 가정은 반역과 살인과 음행이, 끊이질 않았다.

이 일로 인해 말년을, 험악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후에 다윗은 이 일을 생각하고, 베개를 적시며,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다윗의 사건을 통해서, 죄의 세력에 무너지면, 사망을 열매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후에 다윗은,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을 발견하고 (시51:5)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했다!”고 고백했으며, 하나님께 (시51:11) “성령을 거두지 말라 달라!”고 호소했다. 이처럼 죄는 우리를 파멸로 끌고 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에 대해 전쟁을 하듯이, 최선을 다해, 대처하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천국백성들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말은, 죄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큰 희생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한 후에, 자신이 버림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우리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마음과 육체를 정결하게 지킬 수 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되면서, 온갖 성적인 부패로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서, 음란의 영이 물러갈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며,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과, 진리의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다.

 "

  이전글 : 2014년도 2월 4째주 - 간음하지 말라(마5:27-28)
  다음글 : 2014년도 3월 2째주 - 이혼에 대한 가르침(마5:31-32)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