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차이(마5:21-26)
예수님은 구약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고, 성경을 완전하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다.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해석과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났음을 아셨다.
그래서 당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그릇된 율법 해석과 가르침을, 바로 잡아 주었다. 많은 사람이 전통적인 해석을 무조건 따랐지만, 예수님은 그릇된 율법 해석에 대한, 몇 가지 사례들을 제시하고, 이를 바로 잡았다. 우리도 바로 알고 믿기를 바란다.
1. 살인에 대한 가르침(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율법학자들은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해설해 주었다.
(1)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① 살인을 ‘고의로 사람을 죽이는 일’로 해석했다. 타인의 생명을, 고의로 죽이지만 않으면, 계명을 지킨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계명에 포함된, 원래의 정신이 빠져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존엄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법은 선을 장려할 수는 있지만, 처벌규정으로 강제할 수 없기에, 최소한의 행동으로, 규제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구제하라! 구제하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법을 규정할 수는 없다.
만일 법이 이런 명령을 하면, 많은 사람이 처벌받게 된다. 법은 사회질서와 안녕을 무너뜨릴 만한, 최소한의 행위에 대해서만, 규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규정에는 원래, 이웃을 사랑하라는 기본정신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② 살인에 대한 심판을 ‘치안판사의 재판’에만 국한시켰다. 여기서 ‘심판’(21)은, 지역재판소의 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살인금지는 원래,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지역 재판소의 판결뿐 아니라, 살인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도, 포함되어 있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 명령을 어겼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자기형상을 가진,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자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살인에 대한 심판을, 재판소로 국한하고, 하나님의 심판은 강조하지 않았다.
(2) 예수님의 가르침(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살인을 고의로, 타인을 죽이는 일에 제한하지 않았다. ‘형제에 대한 분노, 모욕, 멸시감에 대한 표현이나 태도’도, 살인에 포함시켰다. 결과만 중요한 보지 않고, 마음의 동기까지도, 중요하게 보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학자들인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크게 달랐다. 그 이유는,
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보다, 정신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6계명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음을 잘 알았다. 인간의 생명의 하나님이기에, 아무도 생명을 멸시하거나, 해칠 수 없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성경은 힘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착취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은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억압하면, 직접 약한 자의 편이 되어, 그들을 억압하는 자를, 심판하겠다고 경고했다.
②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창9:6).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기에, 생명을 해치면 안 된다.
부모는 자신을 닮은 자녀를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긴다. 하나님도 자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멸시하거나, 해치는 일은, 큰 죄가 된다.
③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는 살인이다(22中).
“…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면,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 심판이 있다고 했다.
예수님은 어떤 죄가 더 크고, 어떤 죄가 더 큰 벌을 받을 것인지,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깨뜨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살인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미움이 가득 차 있었다.
로마사람을 미워했다. 사마리아사람도, 원수처럼 생각하며 미워했다. 세리와 창기들을 죄인시하며 얼마나 무시했는가? 또 다른 사람들을, 쉽게 비판하고 정죄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고서, 돌로 쳐 죽이려고 했다. 심지어 죄와 아무런 상관없는, 예수님마저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살인하지 않은 자라고, 계명을 잘 지키는 자라고,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의 외식적인 의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외적인 면에만 신경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2.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근본 취지(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살인을 설명한 후, 제사보다 화해가 먼저라고, 삶에 적용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다. 이 제사는 속건제(레6:1-6)다.
위의 명령에 근거하여, 만약 피해를 입힌 상대방이,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어떤 제물들을 가져온다 해도, 하나님께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기에, 먼저 그 사람의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예수님은 형제와 화목 하는 일을, 예배보다 긴급한 일로 간주했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 제물을 하나님이, 결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형제의 인격을 멸시, 모독, 저주함으로, 형제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면, 그 형제는 하나님께 호소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그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해결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시편기자의 고백은, 이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시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실 것이라!”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미운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그를 찾아와, 그의 죄를 지적했다. (창4:7下)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권했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권고를 듣지 않고,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따라서 심판받고, 하나님 앞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드리는 제사
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예배드릴 때가 있다. 형제를 노엽게 하고, 형제에게 노하고, 멸시하고, 저주하면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다.
어떤 사람은, 남의 것을 불법으로 탈취하고, 가난한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한다. 또한 고아나 과부, 장애인
과 같이 연약한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한다. 또 어떤 사람은, 부자나 권력자에게 뇌물을 받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 억울하게, 멸시와 착취를 당한 사람은, 원한을 갚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 호소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착취한 자를 벌하게 되니,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형제의 피를 흘린 채 드리는 예배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이 받을 수 없는, 가증한 예배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를 억울하게 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에, 다시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했다. 하나님은 예배만 드리면, 기뻐하지 않는다.
예배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마음으로 예배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삼상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배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혹시 생각나면, 즉시 가서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때, 하나님이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고, 그들과 화목하게 살기 원한다. 형제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웃을 멸시하거나, 저주하지 말아야 하고,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형제를 멸시하고, 상처를 입히면, 그들이 우리를 축복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기 원한다. 이 시간 이웃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고, 만일 그러한 일이 생각나면,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자.
3. 화해는 긴급한 일이다(25-26).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유노에오, 유(좋은) + 누스(마음, 이해) = 좋은 마음을 가져라. 화해하다, 일치하다)라고 권고했다.
만일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한 사람과, 급히 화해하지 않으면, 고발하는 자가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또 그 재판관이 그를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한 사람이, 길에 있을 때에, 그와 급히 화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비를 가리기 위해, 법에 고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재판관,은 시비를 가리기 위해,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두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재판을 통해, 모든 죄 값을 지불할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26) ‘한 푼’(고드란테스)은 로마화폐다. 로마화폐로, 일반노동자의 하루임금은, 한 데나리온이었다. 그런데 한 고드란트는, 1/64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만일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10만원으로 계산하면, 한 고드란트는 약1,560원 정도 되는,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해를 입힌 형제와, 급히 화해하지 못하면 고소당해, 판사가 부과한 벌금이나, 형별을 모두 지불해야 하기에, 더 큰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이 어렵게 되기 전에, 빨리 해를 입힌 형제와, 타협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지혜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재판은, 세상 재판뿐만 아니라, 더 높은 하늘의 재판도, 포함하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만 하는 생활이 아니다. 반드시 주님 나라에서도, 선악간의 상급과 심판이 있다. 이를 무시하면, 신앙생활이 아니다.
헌금을 해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과, 억지로 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신다. 이를 인정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일조를 말씀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돈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벌을 주고 죽이는 하나님으로 만든다면, 이는 정말 잘못된 모습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형제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또 그들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때가 많다. 또한 입이 좀 거친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해서, 심한 욕설이나, 저주가 담긴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우리의 이웃들이, 많은 상처와 원망을, 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또 피해를 입은 이웃과, 화해하는 일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작은 사과와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돌이킬 수 없는, 큰 문제가 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말 한 마디 실수한 것을 사과하지 않다가, 문제가 커져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음에 받은 멸시와 모독에 앙심을 품고, 살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먼저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혹시, 성령님이 우리의 실수를, 마음에 깨닫게 해주면, 지체하지 말고 즉시 상대방을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어서, 사과하거나 적절한 보상을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찬송이, 하나님께 상달 되지 못할 수 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시급하다고 말씀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교훈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혹시 이웃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이웃의 인격을 멸시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그들이 하나님께 호소하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때로 이러한 일을 하고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혹시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일 성령님이, 잘못한 일을 가르쳐 주시면, 즉시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급히 그 사람을 방문하거나, 전화해서, 그에게 용서를 빌고, 화해를 요청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상처 입힌 형제가,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 호소를 듣고, 그 모든 일을 다 해결할 때까지, 징계하실 것이다.
이 시간 이웃을, 억울하게 한 일이 없는지 살펴보고, 그 일을 해결할 힘을 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하자.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가 행한 잘못을 가르쳐 주고, 또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너와 나와의 화목만이 아니고, 화목의 지경을 넓혀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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