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4년도 2월2째주 - 예수님과 율법(마5: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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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ibleman |
작성일 : 2014-0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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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율법(마5:17-20)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행동을 보고, 율법을 폐지하러 온, 율법훼방꾼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은 성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큰 시각 차이가 있었다.
율법을 바로 알지 못하면, 유대인들과 같이, 오류에 빠지니, 아주 두려운 일이다. 유대인은 율법의 본질을 알지 못하여, 율법에 매인 불행한 인생이었다. 자유도 기쁨도 없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해서, 정죄와 심판을 당하며 괴로웠다. 비난과 법이 두려워서, 숨조차 쉴 수 없는, 경직된 사회다.
속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것처럼 가장하려고 하니, 외식이 발달했다. 우리도 율법을 잘못 이해하면 그렇게 된다. 율법을 모르면, 살리는 율법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율법이 된다. 율법을 잘못 대하면, 오히려 큰 시험거리가 된다.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힘만 든다.
1.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았다(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말하는데, ‘나는 구약성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폐하러’(카타뤼사이)는 ‘뒤집어엎다, 파괴한다, 내던지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뒤집어엎거나, 파괴하고, 내던지려고 온 분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무너뜨린다고 오해했다.
(1) 예수님은 보통 교육만 받았다. 율법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은, 율법학자나, 서기관이 아니었다. (2) 침례요한에게 침례받자, 침례요한의 제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례요한보다 큰 분이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비판한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이 정결하게 되려면, 정결예식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씻는다고, 사람이 정결하게 되지 않는다.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정결하게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종교지도자들은, 보이는 십일조 규례와, 안식일 준수만을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종교예식은 강조하지만, 더 중요한 믿음과 의는, 버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죄인과의 교제를 금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의 대명사인 창녀와 세리들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함께 식사했고, 안식일에도 불쌍한 병자들을 치유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 사람은 구약성경을 폐하러 왔는가?’하며,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성경을 뒤집지 않았다. 랍비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계명들을 반대했을 뿐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많은 계명들을 만들었다.
이를 ‘울타리 법’이라 불렀으며, ‘미쉬나’(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렀다. 신약성경은 ‘유전, 전통’으로 번역했다. 그들의 문제점은 이 가르침을, 성경과 동일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성경은 아니라고 했다.
미쉬나는 안식일에, 사람이 갈 수 있는 거리를, 약1,000m로 규정했다. 이보다 더 많이 이동하면,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 했다. 그러나 3km를 800m씩, 나누어 이동하면, 안식일을 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유전들을 반대했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지 않고, 이처럼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랍비의 가르침을 성경의 정신대로, 똑바로 잡으려 했기에, 율법을 페하지 않고, 완성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히 구약성경과 일치했고,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다.
자기 몸을 속죄 제물로 드려, 죄인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완성했다. 율법대로 흠 없는 삶을 살았다. 메시아에 대한 모든 예언을 성취했다. 이처럼,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고 했다. 이는 예수님이, 중요한 사실을 말씀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 율법폐지론자들은, 은혜로 구원받기에, 신약시대에는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법은 완전하기에, 폐지될 수 없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만든 법이기에, 흠이나 부족함이 없다. 완전무결하며 영원하다. 그러므로 천지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법의 효력도 계속 유지된다는 말이다. 우리 성도는, 율법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2. 기독교인과 율법(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구약성경의 율법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의식법 : 각종제사와 종교행사에 대한, 규례들이 포함된 종교예식법이다. 이러한 제사와 예식과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기에, 지금은 의식법이 실행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친히 속죄제물이 되어, 제사규례를 성취했다. 성막도 절기도 예수님의 모형이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이 되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두꺼운 성전휘장이 찢어졌다. 성전휘장이 찢어짐으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길이 열렸기에, 짐승의 피로, 제사드릴 필요가 없다.
② 사회법 : 이스라엘의 민법과 형사소송법으로, 수천 년 전에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상황에 맞추어 제정된 법이다. 따라서 신정국가가 아닌 나라와, 옛날 이스라엘과 다른 환경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은, 이 법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 사회에서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율법은 안식일을 범한 사람, 우상에게 절한 사람, 그리고 부모를 거역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문자대로 행하면, 오히려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법과, 형사소송법을 자세히 연구해서, 현실에 맞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③ 도덕법 : 십계명과 같은 도덕법이다. 도덕법은 의식법이나 사회법과는 달리,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법이다. 하나님이 주신 도덕법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했다.
이 법은 우리들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웃 사랑의 계명도, 모든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명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법이다. 본문 19절의 이 계명은, 이런 도덕법을 말한다.
이런 법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고, 그렇게 가르치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간주되고, 모든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르치면, 천국에서 큰 자로 간주된다고 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점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
면,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된다.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613가지나 되는 율법들을, 평생 동안 모두 다, 지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와 관계없이, 은혜로 값없이 구원해준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 의를 포기하고, 예수님이 주는 사랑을, 은혜를 믿고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규례에 당했기에, 율법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구원은 은혜로 받기에,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에 대해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율법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정말 율법은, 나쁜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1)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롬3:20).
성경은 율법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어,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해준다고 한다. 율법을 모를 때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율법을 알면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 수 있다.
(2)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준다(시119:105).
시편 기자는 율법을 가리켜 ‘내 발을 비추는 등불’, ‘내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율법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말한다.
(3) 몽학 선생(갈3:24).
성경은 율법을 ‘몽학 선생’으로 비유했는데, 몽학선생은 자녀들이 성인될 때까지, 교육을 맡은 노예 교사를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보통 2가지로 대한다.
①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약의 성도들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을 ‘율법주의자’라 하고, 이런 주장을 성경은 반대하고, 이단이라고 말한다.
②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를 믿고, 은혜로 구원받기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율법과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은, 신약의 성도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율법폐지론자’라 부르고, 이단 구원파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도들을 타락하고, 방종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타락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에,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율법을 폐기해야한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여전히 율법은 중요하다. 강력한 죄의 세력이 끌고 가기에, 우리 힘으로 율법을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신다. 성령님이 하나님 자녀안에 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원해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3.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데, 일생을 헌신한, 율법의 전문가였다. ‘바리새’(파라쓰)는, 거룩히 살기 위해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을 따라 살려고, 철저히 노력했다. 율법을 지키려고, 엄격한 규례들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2번씩 금식했고, 안식일에 1km이상 이동하지 않았다.
율법을 존중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기에, 백성들이 존경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가르침과 행위가, 성경에서 떠났음을 알았다. 율법의 정신보다, 문자와 형식에 치우쳐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비판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외적, 형식적인 의다. 마음의 정결함보다, 손발을 정결함에 신경 썼다.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생각을, 깨끗이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부패한 ‘회칠한 무덤’같다(마23:27)고 책망했다. 사랑과 의를 행하는 것보다, 종교예식에 더 관심을 가진 의였다.
많은 종교예식을 지키는 일에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과 의를 행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었다. 말은 많이 했지만, 실천은 하지 않았다.
(2) 사람이 만든 규례로, 구약성경을 무너뜨리는 의였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법규를
만들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계명을 세분화해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들도, 많이 포함되게 되었지만, 이러한 것들을, 마치 성경처럼 간주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마땅히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부모님을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계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의 가르침을 무너뜨렸다. 율법에 없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었다.
(3) 스스로 의롭다며, 자만에 빠진 의였다. 그들은 율법에 관심과 열심을 가졌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돌
리기보다, 자신을 과시했다. 기도할 때에도 ‘저를 세리와, 다른 죄인들과 같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금식과 십일조를 하고, 거룩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다.
잔치에 초대되면,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으며,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 받기를 좋아했다. 여러 가
지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기에, 예수님은 이런 의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무엇이며, 어떤 믿음과 의가 있어야, 천국에 가는가?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8복으로 말씀했다.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의는,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
과 부족함을 느끼는, 가난한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이다. 참된 경건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다. 자기의 죄를 애통하면서, 그 죄를 이길 힘을 구하는 믿음이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의를 갈망하는 마음을 주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을 준다. 또 평화를 만들고,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면서도, 기뻐하는 사람을 만들어 준다.
이처럼 성령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 마음을 변화시켜 준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그 중심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선다. 성령님은 성도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들이 비로소, 천국 백성들이 될 수 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성령님과 동행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령님은 진리와 사랑의 영이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 이러한 의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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