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사모하는 영혼(시107:1-9)
시편 107편부터는 제5권이 시작된다. 5권의 시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자비와, 놀라운 일들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역경 중에서, 광야에서, 감옥에서, 병에서, 바다의 풍랑에서, 구원해 주신 일들을, 하나씩 열거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상기시키고,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악을 행할 때는, 징계를 내려 연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롭기에, 회개하고 부르짖기만 하면, 즉시 구원해 주신다. 백성들이 기대하지도 않았던,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주의를 기울이고, 감사하라고 했다.
1. 여호와께 감사하라(1-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에게, 제사장은 예배하면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외친다(호두 라아도나이).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외침으로 제5권은 시작하는데, 이 말씀이, 5권의 총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그의 말을 받아서, 화답하였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키 토브 키 레올람 하쓰도)했다. ‘인자하심’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긍휼히 여김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할 때만이 아니다. 거역하고, 이방의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항상 인자하게 대해 주었다. 감사가 없는 구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진정한 구원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의 은혜를 감사할 때 완성된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로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하게 해야 한다.
다시 제사장은, 회중을 향해 외친다. “여호와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속량을 받은 자’는, 죄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의 속박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제사장의 말에 대해, 회중들도 또 화답한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하나님은 대적에 의해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한 대로 속량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해주셨다.
또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과 성을 건축한 일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모독하는 일이다.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은, 그 모든 구원이 여호와의 손에서 난 일임을 고백해야 한다.
무리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동서남북에서 불러 모으셨다.’ 고백했다. 동쪽은 바벨론과 앗수르를 의미하며, 서쪽(바다쪽)은 유럽, 남쪽은 애굽, 북쪽은 아람쪽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던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동서남북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았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이러한 일들이 여호와에서 났음을 고백하고,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을 이야기한다.
(4-7)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흩어진 무리들 중에는, 광야와 사막을 건너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행해 오는 길에 큰 어려움을 만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성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굶주리며 목이 말라, 영혼이 실신하여 기절할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며, 안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의 모습이다.
광야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들은, 마침내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방황하는 인생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다. 하나님은 방황하며 부르짖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고통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하여, 고통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주할 성으로 인도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 거주할 영원한 성으로 인도했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여기서 기적(팔라)은, 기이한 일, 경이로운 일을 말한다.
광야 사막 길에서,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찬송하라고 외치고 있다. 극한 곤경에서 빠져서 기도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와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함이 마땅하다.
2. 사모하는 영혼이 되자(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모하는’(솨카크)는 ‘뛰어 다니다. 찾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다.
사슴이 물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다. 사슴이 물 냄새를 맡으며, 뛰어다닌다가 결국 물을 찾게 되고, 그 결과 만족함으로 채워지는 모습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때 만족하게 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은혜’는 준비된 그릇대로, 채움을 받는다. 이것이 영적원리다. 준비된 그릇이 없으면, 은혜도 없다. 주어져도 그것을, 은혜로 받지 못한다. (왕하4장)에는, 어느 날 엘리사 선지자에게, 제자들 중의 한 부인이 찾아왔다. 이 부인은 선지자인 남편이 죽자,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지 못해, 빚 준 사람이, 두 아들을 노예로 데려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 그때 엘리사가 묻는다. (왕하4:2中)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고 한다. 그 여인은,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녀에게, (4:3) “너는 밖에 나가서,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라.” 했다. 명령에 순종한 여인은, 두 아들과 함께 빌릴 수 있는 만큼, 빈 그릇들을 빌려 왔다. 놀랍게도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붓는데, 빌려온 그릇이 다 채워지자, 기름이 그쳤다.
이 여인이 빌려온 ‘그릇의 숫자’는, 그 여인의 신용이고, 그 여인의 ‘믿음의 분량’이다. 그녀가 주변사람들에게 신용이 없었다면, 그릇을 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용과 믿음의 크기다. 그녀가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믿었다면, 그 믿음만큼 빌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녀가 준비한 만큼, 채워주는 분이다. 우리는 은혜를 담을, 빈 그릇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 그릇만큼 하나님이, 은혜를 채워 주신다. 그렇다면 그 빈 그릇은 무엇인가? 사모하는 마음이다. 사모함이 크면 클수록, 은혜를 많이 받게 된다.
반대로 사모함이 없으면, 아무리 큰 은혜를 주려고 해도,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임하기를 소원하는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기를 바란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주님은 만족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러면 왜 민족 함이 없는가?
사모하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을 사모하고, 부귀영화, 명예와 권세를 사모하기에,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만족하기 원하면 (골3:1-2) 말씀처럼, 위의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의 것, 즉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한다. 거기는 주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다. 무슨 말인가?
거기만이 영원한 곳이고, 거기만이 우리의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거기 그곳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주린 영혼’도 마찬가지다. 사모하는 영혼이나, 주린 영혼은 같은 것이다. 그래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주려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만족함을 주시고, 그런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보셨나요? 옛날에는 그런 분들이 많았다. 일제 때 그랬다. 6.25 전쟁 때 그랬다. 배고픔의 고통과 어려움은, 세상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육신의 목마름, 육신의 굶주림은 정말 비참하다. 그렇지만 영적인 목마름,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복이 된다. 목마름이 있고, 배고픔이 있다는 말은, 은혜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목이 마른데, 목마름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굶주려 있는데, 배고픔을 느끼고 못함이 문제다. 느끼지 못하니까, 대책이 없다. 느끼지 못하니까, 결국에는 영혼이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목마름이 없었다. 배고픔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사단에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영적 갈급함을 느끼며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살려주셨다. 우리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며(마5:3), ‘의에 굶주린 영혼’을, 의로 배부르게(6)한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3. 받은 은혜를 잊지 말자(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에게 주시는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과, 주린 영혼에게, 반드시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데, 속히 그 은혜를 잊어버림이 문제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히 잊어 버렸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더 편하다고, 돌아가자고 여러 차례 원망하고 불평했다. 참 안타까운 백성들이었다.
눈으로 홍해가 갈라진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교만해진다. 내 손으로, 내 능으로 얻었다고, 교만해진다.
그래서 (신8:17-18)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경고했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사는가? 내 과거에 모습을 잊고 산다. 옛말 올챙이 시절의 모습을 잊지 말자.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던 시절, 정말 대책 없던 우리였는데, 하나님이 세워주고, 복을 주셔서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잊고 산다.
또 과거에 주신, 놀라운 은혜를 너무 쉽게 잊고 산다. 병들어 죽음이 찾아 왔을 때는,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음, 그 약속들은 다 잊어버렸다. 자식이 병들어 사경을 헤맬 때, 한번만 살려달라며 울 때,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듣고 살려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은혜를 다 잊었다. 사업이 부도직전에 몰려, 다 날아가려 할 때,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회복되었는데, 그때 주신 은혜도 다 잊고, 마치 내 능력으로 해결했던 것처럼, 건방을 떨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배은망덕 소리를 듣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겠는가? 미국 신문에 실린, 기사다. 미국의 광고회사 중역인 해리스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식당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행색이 초라한 한 남자가 ‘한 푼만 달라.’며, 구걸을 했다. 그는 노숙자였고 거지였다.
그런데 해리스는, 마침 지갑에 현금이 없었다. 주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그냥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자기 지갑에 있는 신용카드를 꺼내주었다. ‘나 당신 믿어도 돼요?’ 그러자 그 거지가 고개를 끄덕여서, 카드를 빌려주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이 말렸다. ‘야 너,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며 난리였다. 그 노숙자는, 그 카드를 가지고 갔다. 잠시 후, 그는 카드를 가지고 돌아왔다. “죄송하다. 좀 많이 썼다. 미안하고, 감사해요.” 그러면서 카드와 영수증을 주었다.
구입한 품목을 보니까 ‘냄새 제거제, 목욕 세제, 담배 한 갑, 생수 한 병’ 총 25달러를 썼다. 그가 카드를 돌려주면서 말했다.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거지도 믿어주었더니, 배신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노숙자 거지는, 그 카드 사건으로, 거지 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음이,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이 사람을 살린 것이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신뢰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한다. “내가 너를 믿어도 되냐?”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하겠는가?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한다.
그래서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고,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믿어주신 그 하나님께, 어떻게 하고 사는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믿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정말, 끔찍한 비극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속고, 또 속으면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이 우리 눈에, 안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하는 영적인 것들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밀하게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에 필요한 것까지, 지금 다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니 지금이 다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지금이 다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눈앞에 전개되는 일 만이, 다라고 보지 말라. 하나님은 만사를 주관하되, 당신의 백성들을 특별히 보호하며, 운행하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나와, 헤맬 때 하나님이 어떻게 했는가? 이와 동일하게 우리도, 고통에서 건지고, 바른길로 인도하고,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행한다.
2014년도는 더욱 감사하는 자가 되자. 사모하는 영혼과, 주린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 성도들이 되어,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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