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내용
•홈  >  말씀과찬양  >  설교내용
  제  목 : 2014년도 1월 2째주 -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막14:32-34)
  작성자 : bibleman 작성일 : 2014-01-12
  첨부파일: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hwp(23K)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막14:32-34)

예루살렘성전 동쪽에, 감람나무, 곧 올리브나무가 많기에, 감람산이라 부른다. 지금도 감람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이 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있는, 겟세마네동산에 기도하러 갔다. 가는 도중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버리게 된다고 경고했다. 그날 밤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간다고 했다.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다고 했다. 이런 말씀을 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연약함을 깨닫기 바랐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하면서, 예수님만을 힘 있게 의지하기를 원했지만,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렸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3번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로, 그들은 회복되고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은 제목으로 3번 기도했다. 그래서 시험을 이겼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1. 기도했다(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주님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도착했다.

겟세마네는 감람산에 있는, 동산으로,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이다. 그 곳에 감람유를 짜는 틀이 있어서, 겟세마네라고 불렀고, 기름 짜듯이 기도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지만, 기름을 짜듯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성경은 밝히지 않았기에 모른다.

성경을 보면, 헌신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경우도 있지만, 말하지 않을 때도 있다. 예수님이 탔던, 나귀새끼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었던, 다락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에 모른다.

그들은 모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함으로 예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다. 우리도 이처럼, 이름 없이 주님만을 섬겨서, 하늘에서 상 받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기도도 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기에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있는, 다락방으로 가실 때, 가룟 유다는 그 장소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곧바로 잡힐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가룟 유다가 알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때의 제자들은, 열한 명의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뺀 나머지, 여덟 명을 말한다.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에 온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안,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기를 원했다. 이제 곧 잡혀서, 죽임당해야 하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으며, 기도하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시험을 이기는 길이, 기도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마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원받으려면, 기도해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변화 산 아래에서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어 그 아이를 고쳐주었다.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하며, 조용히 물었다. 예수님은 (막9:29)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런 종류, 악령들의 종류는, 우리 힘으로는 안 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이처럼 시험을 이기는 길이, 기도에 있음을 가르쳤다. 곧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다.

하나님이 목자를 치면, 양들은 흩어진다고 예언됐다(슥13:7). (마26:31下)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며,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린다고 경고했다. 그 백성의 죄 때문에, 여호와가 메시아를 친다는 내용을 말씀했다.

따라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아무리 보아도, 제자들이 기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간구한다. 하나님의 우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계속 간구한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이, 완전히 상실되거나,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기도해야만 한다. 아니면 시험에 들거나, 악에 빠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본을 보인대로, 기도하기에 항상 힘쓰자. 그래서 날마다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2. 매우 놀라서 슬퍼했다(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예수님은 여덟 명의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의 입구를 지키게 했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3명을 데리고, 동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예수님의 최측근에 해당하는, 제자들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기를 바랐던 제자들이다. 세 사람은 제자들 중에서도,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예수님은 특별히 이들을 아끼고, 가까이 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릴 때도, 변화 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때도, 예수님은 이들 세 사람만 데리고 갔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3사람만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극한 상황이 찾아올 때,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서, 어려운 상황을 대처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세 제자들은, 그들을 과신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위기가 닥치자, 다 시험에 빠지고 말았다. 이들은 기도하지 않음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지도자 위치에 있는 제자들이었기에,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이들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들어갔다.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예수님은 심히 놀라며 슬퍼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자신이 당할 일로 심히 놀랐다. 그래서 슬프고, 놀랐다고 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심히 놀라야 할 만큼, 충격적이고도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심히 놀라신 것은, 물론 십자가에서 당할 육체적인 고통 때문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이 땅에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당했던, 심적 고통도, 매우 컸던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이며, 베드로는 3번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다.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을, 다 아는 예수님에게는, 그다지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세상 만물을 지은 분이, 피조물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도, 예수님을 심히 놀라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을, 심히 놀라게 했는가?

(히2:9下)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때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한꺼번에 홀로 담당하여, 죄를 알지도 못하는, 거룩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한꺼번에, 홀로 다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이, 심히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예수님이 심히 놀랐음은, 지극히 당연했고, 슬퍼했다. 우리는 무엇에 심히 놀라고, 아파하는가? 돈이 없어서, 건강을 잃어서, 결혼하지 못해서 아파하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못함을 아파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슬퍼한 모습은, 자주 나온다. (요11:35)에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 (눅19:41)은, 예수님이 멸망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울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겟세마네에서 가장 슬퍼했다. 그래서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때 예수님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슬퍼했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버림받는 일은, 슬픈 일이다.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당한다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장 슬프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 받을 때, (마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었다. 변화 산에서 영광을 나타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 (마17:5中)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영원히 하나인데, 이제 곧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 됨을 아파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크게 소리쳤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일시적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아야 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가장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크게 소리 지르며, 버림받는 자신의 슬픔을, 고통스럽게 나타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고, 버림받게 되는 일이, 가장 큰 아픔이 되기 바란다.

우리도 살다보면, 때로는 심히 놀랍고, 슬픈 일을 당할 수 있다. 아픔에도 품격이 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복된 아픔이 있기를 바란다. 그때 예수님이 본을 보인 그대로, 겟세마네의 시간을 갖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께 쏟아놓자.

예수님은 심히 놀라며 슬퍼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모두 이해한다. 예수님께 맡기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의 짐을 대신 맡아 주신다.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아서, 늘 예수님의 위로를 받으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3.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했다(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었기에, 심히 놀라고 슬퍼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 안으로 들어갔다. 제자들은 동산 한 곳에, 머무르게 했고, 거기서 그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결코, 죄를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야 했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야 하니까, 얼마나 그 마음에 고민이 되겠는가? 예수님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만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곧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했다.

모든 인류에게 죄 값으로 내려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이 한꺼번에 몽땅 받아야만 했으니, 어찌 예수님의 마음이, 고민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기에 십자가로 인해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느 정도로 고민했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고민이 깊어지면, 몸속에 있는 모세혈관들이 팽창한다. 그러다 얼굴이 붉어지고, 눈이 충혈 된다. 더 심해지면, 모세혈관이 터진다. 그러면 그 피가, 피부의 땀샘을 통해서, 몸 밖으로 새어나온다.

그래서 (눅22:44)을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밝힌다. 이렇듯 예수님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이때 (눅22:43)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예수님에게 힘을 더하게 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우리를 돕게 만든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돌아가시면 안 된다. 이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했다. 이에 그 마음이 심히 놀라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우리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를 미워해야만 한다. 심히 놀라 슬퍼하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죄를 미워해야 한다. 그래야 죄를 멀리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밝히신 후,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그들은 이제,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이며, 또한 베드로는, 세 번씩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경고를 예수님께 받았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야 했다. 이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기에, 예수님은 잡혀서, 곧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기도하는 동안, 그들도 깨어 있어 기도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아주 강한 줄 알았다. 예수님을 버리지도,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라 여겼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다. 그래서 깨어 기도하지 않고, 다 잠을 잤다. 결국 그들은, 시험에 다 들고 말았다.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에, 시험에 이길 준비를, 전혀 갖추지를 못했던 것이다. 잠자는 자는,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오직 깨어 기도하는 자만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있다. 이때의 실패를 통해서, 베드로는 큰 교훈을 받았다.

그래서 깊이 깨닫고 (벧전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는 깨어있지 못해,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에게, 삼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제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대적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길은, 오직 깨어 기도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 우리도 살다보면, 어려운 일들을 당할 때가 많다. 때로는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 심히 놀랍고 슬퍼서, 우리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내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교훈하신 대로, 우리도 겟세마네의 시간을 갖자.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뢰자. 그러면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① 힘들고 어려울수록,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②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죄 때문에, 매우 슬퍼하셨다. ③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2014년을 맞아, 깨어 기도하기 바란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전글 : 2014년도 1월 1째주 - 날로 새로워지자(고후4:16-18)
  다음글 : 2014년도 1월 3째주 - 감사하고 사모하는 영혼(시107:1-9)
이전글 다음글 목록보기